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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7. 2020

<사라진 시간>, 이후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

<사라진 시간>(2020)

영화 <사라진 시간>의 작품 포스터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1.


발터 벤야민은 1900년대 초를 살아가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바가 있다. “자본주의는 꿈을 동반한 새로운 잠이 유럽에 덮쳤고 그 잠 속에서 신화적 힘들이 부활했던 일종의 자연현상이었다.”(『아케이드 프로젝트』)라고 말이다. 이와 동시에 벤야민의 절친 아도르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현대라는 환상이 깨어지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는 이 감상을 두고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을 쓴다. 이 책에서 그는 ‘현대’인의 똑똑함은 거짓된 것이며 현대라는 환상으로부터 깨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벤야민과 아도르노 사이에 견해 차이는 있었지만, 두 사람의 작업을 하나로 이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자본주의라는 신화적 힘들에 빠진 우리는 그것들을 마치 무구(巫具)처럼 사용했다고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아서 클라크의 말을 정반대로 뒤집어서, ‘통제되지 않는 기술(Anthropocene)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된다.’는 테제로 이어진다. 요컨대 이에 따르면,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란 초자연적인 재앙이며, 이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은 바로 그 무구를 통해 반기를 드는 것일 수도 있다.


벤야민이 지지하고 아도르노가 맹렬히 비판한 영화가 바로 그 무구이다. 영화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이면서도, 우리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마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영화가 더욱 영화적이 될수록 우리는 그것을 마법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아바타>). 그런데 우리 시대에 영화를 마법처럼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오늘날 영화는 관객들의 분석을 위한 게임판이 되거나, 드라마나 게임과 결합해 적당히 분위기를 살려주는 매질이 된다. 즉, 영화라는 환상 자체가 환상이 되어버렸다(<휴고>). 우리는 영화를 보며 환상에 젖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만약 이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었다면 과연 우리는 정말 ‘계몽’에 성공한 것일까?


2.


<사라진 시간>은 확실히 불친절한 영화다. 그러나 영화가 남기는 궤적은 흥미롭다. 먼저 IMF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이야기는 순전히 내 추론에 불과하지만 일단은 들어주기를 바란다. 첫 번째. IMF가 일어난 이후로 IMF를 온전히 바라보는 영화가 아직까지 나온 바 없다는 사실은 확실히 이상하다. 혹자는 IMF를 맞이한 가장들의 비루한 이야기, 등을 거론하며 몇몇 이름을 거론하겠지만, 그중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 알 수 없음에 대한 의문이 우리의 주된 토론거리가 될 것이다.


IMF에 대해 만족할 만한 시선이 나오고 있지 않다는 점은, 아직 역사를 평가하기에 너무 이른 시점이어서 일수도 있겠고, 영화로 만들기엔 너무 흥미가 떨어지는 소재여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자본주의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해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에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차라리 그와 함께 몰락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급진적인 문장은 확실히 논쟁거리이지만, IMF가 몰락의 시작이 아니라 진행사임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 영화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영화 상영 중에는 이것이 영화임을 알 수 없다. 니체의 맥락으로 보면 이 말은 영원회귀의 관점으로도 해석된다. “너는 여태까지 해왔던 일을 초단위로 정확하게 반복할 것이며, 그것을 수천수만 번 반복하게 될 것이다. 매 순간 선택의 지점에 서지만, 그럼에도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결론을 낼 것이다." 물론 우리는 니체의 이 말이 ‘희망’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 IMF는 한국 사회의 병폐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신호탄이 아니라,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이카루스의 가르침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라는 것이다. (추락이 아니라 날개가 달렸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 여기서 우리는 벤야민의 선구안을 들춰보게 되는데, 자본주의라는 자연현상이 사회에 덮쳐온 꿈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깨지 않는 꿈속에서 영원히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이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 박형구(조진웅)가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박형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꿈은 결코 깰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타르코프스키식으로 말하면 ‘봉인된 시간’쯤 되겠으나,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그는 거리를 배회한다. 즉 그는 거리를 걷는 산보자이며, 벤야민의 말마따나 자연현상 속에서 꿈을 수집하는 수집가이기도 하다.


3.


수집가의 특징은 촉각적인 것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아적인 집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감각은 영화를 ‘바라본다’는 감정이 어떻게 ‘만진다’라는 소유의 지점으로 넘어가는지를 말해준다. 요약하면 우리는 눈으로 두들기면서 몸으로 체험한다. 이 수집의 절차는 2010년대 이후 유행하는 관객들의 분석게임과 결합해 우리를 꿈 수집가로 만든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주워담아 몸으로 체화하고(추상게임),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조합게임).


그러나 신형철이 문학을 두고 했던 말처럼, 현실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실을 집어삼키는 예술이 더 위대하다. (『몰락의 에티카』, 몰락한 것들은 단 하나를 위해 나머지를 소멸시키기에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즉 예술이란 거울이 아니라 위장이 되어야 한다. 한데 예술이 위장이라면, 잘못 집어삼킨 현실로 인한 배탈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수집가의 면모에서 수집한 것을 적당히 걸러 먹을 필요가 있다. 다만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지를 구분할 수 없다. 우리의 유아적인 면모는 손에 닿는 건 무조건 입으로 가져다 대는 행동을 한다는 점이고, 이 부분은 단순히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질’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멜랑꼴리). 결국 우리는 꿈을 퇴치한다고 생각하는 꿈을 꿈으로써 영원한 몰락에 접어드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영화를 두고 익숙하게 하는 비유가 바로 꿈이다. 영화는 꿈이라고 말하면서 수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작품을 우리는 보아왔다. 이 부분에 대해 <사라진 시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꿈은 밤중에 꾸는 것이고 상상은 낮 동안에 꾸는 것이라고”. 허나 이 말이 낮을 통해 신화적인 힘을 구축(驅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곤 사토시가 <망상대리인>에서 시도한 바 있는 이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꿈을 동반한 잠이 신화적인 힘을 유발한다는 말은, 거꾸로 보면 꿈이 없는 잠은 아무 위험성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기에 그렇다(<아무르>, 이곳에 죽음이 다녀갔다).


이를 영화로 옮겨본다면 다음처럼 된다. 영사되지 않는 스크린은 그저 백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환등기가 돌아가며 내뿜는 뿌연 안개가 바로 꿈의 신기루이기에. 바로 이러한 점이 화폐를 위시한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한다. 마크 피셔가 지적하듯이, 화폐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는 그저 돈이라는 것에 촉각의 성질을 부여하는 관념일 뿐이다. 즉 화폐는 꿈이다. 다시 말해서 화폐 없는 자본주의는 그저 백지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화폐/꿈을 원하고 그곳에서 영영 깨지 않기를 원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를 위협하는 마법 같은 힘인 신화(바르트)에 칼을 빼든다. 이곳의 우리는 콜로세움 안의 검투사처럼 그저 헤어나올 수 없는 전투만을 반복할 뿐이다.


4.


벤야민의 1900년대 초와 IMF의 1900년대 말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이 말은 영화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화의 100년 역사 동안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왔나. 어쩌면 우리는 영화의 기술적 발전사를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망상대리인>에서 곤 사토시가 나지막이 귀띔해준 ‘꿈의 섬’이라는 개념이 열쇠(KeyWord)이다. 자본주의 사회 혹은 물질 사회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그것을 홍보하는 이미지 중에는 역사적 징후를 말하는 것이 있으며, 그런 이유로 이미지와 징후는 구분된다. 이를테면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 붕괴는 사건이자 징후이다. 이 이미지는 IMF라는 몰락의 예언이자 한국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직시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여러 많은 사건이 일어났어도 우리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하며, 말마따나 ‘깨지 않는 꿈’ 속을 우리는 살아간다.


이 구조들이 붕괴한 이유는 순전히 ‘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낡은 것이 된다는 것은 낯선 것이 된다는 것이다(벤야민). 그래서 낡은 삼풍백화점의 대들보는 우리에게 낯선 것으로 다가왔으며, 이 낯선 것들이 어떤 유의미한 지점이 된다는 점이 바로 이곳을 위기의 지점으로 만든다. 달리 말해 징후의 감지란 우리가 그것에 비평적 시선을 보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를 두고서 쓰레기 매립장을 부르던 이름인 ‘꿈의 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쓰레기 매립장이 물질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꿈의 섬’이라는 말은 오묘하다. 마크 피셔가 말하듯 깨지 않는 꿈속에서의 몰락은 생성보다 빠른 소멸에 의한 것일 텐데, 소멸되어 가는 것들의 총집산이 바로 쓰레기장이니 말이다.


그러나 아즈마 히로키는 신형철보다 앞서서 이 몰락하는 것들에 위로의 시선을 보낸다. 그는 아도르노가 말했던 현대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역사적 현장에 방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체르노빌, 아우슈비츠, 제주도 4.3 사건의 현장, 히로시마 등. 그는 이를 두고서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아무리 책으로 보고 들어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비록 본판과 달라질지언정 어떤 역사가 기록된 현장을 보존하고 만들고 방문하는 행위는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꿈으로부터 무언가를 만지는 행위, 수집가의 면모야말로 파멸가도를 달리는 꿈/자본/물질 속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5.


이쯤 되면 이 글에서 IMF라는 단어를 왜 언급했는지가 궁금해진다. <사라진 시간>은 IMF라는 단어와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아무 연관성이 없다는 말을 스스로 꺼내본다. 그러나 나는 이따금 사라져 가는 것들, 잊혀지는 것들, 소멸의 과정을 겪는 것들을 유심히 지켜보곤 한다. 우리는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에서 붕괴의 순간이 아니라 붕괴의 이후만을 매만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 붕괴는 소멸의 과정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쓰레기 매립장으로 보냄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동시에 그만한 사건은 다양한 형태로 생산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위한 광고에 열광하다가, 몰락의 순간에야 비로소 ‘예후’, ‘증표’와 같은 표현을 사용할 테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영화를 두고 상업과의 결합을 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사실 오래된 소멸의 과정 안에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같은 논리로 비평의 몰락을 말해볼 수 있다. 비평은 몰락하지 않았다. 다소 급진적으로 옮겨보건대, 비평이 예술에 기생한다면 예술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므로 비평도 소멸하지 않는다. 만약 비평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단지 예술의 내면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흔적기관이 끝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합리성에서 찾을 때, 그는 소멸하는 게 아니라 기능하는 것들 안으로 병합된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포스트 코로나, 혹은 IMF의 이후, 그리고 박형구가 겪은 이후의 시간.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자신을 가두었던 15년의 시간이 아니라, 이전과 이후에 대해 질문했듯이 우리도 영화의 도중이 아니라 전후에 대해 물어야 한다. 전후라는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남은 폐허인 것 같기도 하나, 단 하나를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맞바꿀 이의 용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자문자답. “우리는 그저 달릴(Running) 뿐입니다. 그것이 시간(Time)이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살아가는 이유는 시작지점의 1초부터 마지막 지점의 1초까지 계속해서 달려가기 (Running time)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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