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 앤 글로리>(2020)
1.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는 칸에서도 오스카에서도 수상작으로 거론되던 작품이었지만, 봉준호의 <기생충>이 칸에 이어 오스카에서 최고상을 받은 현시점에서 이러한 논의는 별다르지 않게 보일 수 있다. 인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보아야 <기생충>을 더 띄워주는 식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가 누군가의 삶을 다룬다는 가정하에서는,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한탄으로 삶이라는 제언을 말할 수 있기도 하다. 영화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매체의 일종인 만큼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재미의 범주에는 ‘타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사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 중에는 다른 쪽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작품이 있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내가 사는 피부>이다. 이 작품은 어느 한 남자가 남자를 납치해 여자로 성형해 육체의 미를 탐구한다는 다소 괴상한 플롯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이고 하는 일은 인공 피부를 개발하는 것이다. (인공 피부를 붙임으로써 ‘그’는 더욱 ‘그녀’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페인 앤 글로리>를 보고 나면 <내가 사는 피부>를 달리 볼 여지가 생기는데, 그것은 <페인 앤 글로리>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는 영화라는 점 때문이다.
2.
<페인 앤 글로리>는 감독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영화이기에 <기생충>과 같은 식의 이야기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삶이 아니라 소설 쪽의 재미를 추구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페인 앤 글로리>가 영화를 만들며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감독의 모습을 영화로 만든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자신과 생을 함께 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하여 어떠한 동반자적 의식을 갖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시네마 천국>과 같은 영화를 떠올려보면 그렇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생각해보게 되는 건, <내가 사는 피부>의 괴상한 플롯에서 피부를 붙이는 방식으로 남성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궁극적으로 부여하게 된다는 방식 자체가 그런 쪽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라는 매체에 성별 같은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 피그말리온적인 미의 축조를 보여주는 방식 자체는 현실에 무언가를 덧씌움으로써 완성되는 영화라는 미(美)를 생각해보게 한다. 영화 내용이 어떻든 간에 기본적으로는 감독의 의도대로 촬영되고, 연출되고, 편집된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피그말리온이다. <내가 사는 피부>에서 의사가 택한 방식이 처음부터 여성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남성을 데려와 피부를 붙이는 방식으로 미(美)를 추구했듯이,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것도 처음부터 완벽한 현실(의 소재들)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적당히 각색하여 여러 조미료를 덧붙이면 그것으로 미(美)가 완성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왜 하필 성전환일까. 남성에게는 강인함이 있고 여성에게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올바른 담론으로 이어지지 못할뿐더러 논란이 되기까지 할 테다. 그러니 보다 합리적인 설명은 <내가 사는 피부>에서 성전환이라는 테마를 성(性)이 아닌 전환 쪽에 초점이 맞추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은 (우리 사회가 그 경계를 차분히 없애는 쪽으로 가는 중이더라도) 가운데 그어진 선을 중심으로 대비되는 무언가를 말하기에 편리한데,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서도 그런 선이 명확하게 그어져 있음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이분법을 현실에 비추어 영화를 말하거나 영화에 비추어 현실을 말하는 식으로 활용하기에 유용하다. 그 둘이 정확히 대응한다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메타포라는 소리다.
자신이 추구하는 모습으로 현실을 변환하려 드는 영화 감독들의 의도는 일종의 페르소나를 형성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페르소나가 꼭 감독 본인과 다른 성별일 이유는 없지만, 평소에 자신이 드러내고 다니지 않는 것을 보여줌에 있어 효과적인 방법은 겉으로 구분되는 시각적인 면모, 이를테면 성별과 같은 것을 ‘전환’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니마 아니무스라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공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저 너머의 성향도 공존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영화에 어떠한 성질 같은 게 있지는 않겠지만 현실의 반대항으로 보았을 때 영화성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현실성과 영화성은 이분법적인 요인이지만 그 둘은 한 자리에 있음을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4.
<내가 사는 피부>에서 성형외과 의사가 피부를 덧붙임으로써 완벽한 여성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 영화를 만든다는 게 그런 완벽함을 추구하는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름 완벽하게 잘 만들어놨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살짝 부족한 느낌이 있다면 우리는 만족하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우습게도 영화를 완벽하게 만들수록 현실성은 더 커지게 된다. 왜냐하면 영화가 추구하는 건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현실에서 영화를 보기에 영화는 그런 우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실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즉, 현실에서 영화를 본다는 공간적인 분리가 바로 이분법이자 메타포다.
<페인 앤 글로리>가 보여주는 감독의 어린 시절과 현재는 그런 식의 분리를 피해가는 방법 중 하나다. 영화가 현실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고, 현실에서 영화를 본다는 감각이 명확하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그 영화라는 게 자신의 지난 삶이라면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현재의 삶 안에 지난 삶이 있는 게 된다. 이는 현재의 삶과 지난 삶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삶이 현재의 삶을 만족시키려 들테고, 이때 그건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현재에 들어 합리화해버리는 것이 지나지 않게 된다.
5.
이러한 가정이 흥미롭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만. 지난 삶을 현재의 삶으로 합리화한다는 점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다. 무언가 논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판단이기에 그렇다. 삶이라는 담론이 아니라 ‘문제’에 있어서 시간의 구분은 따로 있지 않다. 개인의 삶에서 지난 삶은 경험이라는 이름으로서, 현재에 언제든지 참고할 수 있도록 시간 구분 없이 올려진다. 영어에서 회상을 뜻하는 단어가 ‘Recall’이라는 점에서도 다시 (Re) 부르는 것 (Call)의 맥락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지난 삶이라는 말 자체는 현재의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논리를 따르지만, 그것을 현재에 어떻게 불러낼 것인지는 개인의 몫이다.
<페인 앤 글로리>가 제목에서 제안하는 것은 고통과 영광이다. 고통이 있으면 영광도 있다는 뜻이거나, 영광에는 고통도 뒤따른다는 식으로 다양하게 해석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면서, 기억을 떠올리는 작업에 마땅한 논리와 맥락을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회상의 의미에 부합한다.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유년기와 현재를 오가는 이 작품의 플롯을 우리가 한 줄로 요약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지난 삶이 고통이기에 현재의 삶에 영광이 있다는 말은, 그 지난 삶이라는 게 현재를 위해 합리화되는 것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6.
일반적으로, 어떠한 이야기를 우리가 말할 때는 중점을 대화의 도입부로 끌어오는 게 옳지만, 개인이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타인에게 들려줄 때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대목부터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난 것만으로 세상에 내쳐졌다는 심각함, 중요함을 얻으므로 삶에 대한 대화는 태어남 이후의 모든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살바도르가 자신의 지난 삶에서 얻은 경험으로 영화를 찍거나 극본을 쓰거나 하는 것은, 현재를 합리화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삶의 단락일 뿐 현재를 결정하는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살바도르는 동성애자이며, 그런 성향을 깨닫게 된 계기이기도 했던 어느 남성과의 이야기를 극본으로 쓰지만, 정작 극장에 가서 자기 작품을 관람하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가 살바도르의 연애 이야기를 영화 안에서 보지 못했지만 살바도르가 그것을 현재에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만을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 안에서 극장에 찾아온 관객들 또한 극본으로 쓰인 살바도르의 이야기에서 앞뒤 맥락 없이 현재에서 기억을 어떻게 떠올리는 지만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우선 연극과 영화가 ‘극장’이라는 하나의 관람 형태를 공유할뿐더러, 그 관람 형태는 객석에서 무대를 일방적으로 바라만 보면서도 공간이 분리되어 있음을 명확히 하기 때문이다.
7.
영화에서, 살바도르가 무대에 올린 연극이 진행 중일 때 객석에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남성 한 명이 있다. 이 사람이 바로 살바도르의 옛 동성애인이라는 점은 이후에 확인되지만, 그에게 연극의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그의 이야기이다. 영화가 연극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우리가 상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지만, 살바도르와 애인 사이였다면 그 이야기가 살바도르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고 실제로 그러했다. 연극을 보고 살바도르의 집에 찾아간 남성은 도란도란 소회를 나누다가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데, 이 장면은 영화 전반에 감정선이 있지 않고 살바도르의 지난 삶으로부터 깔려온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이상하다고도 느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반대로 말하면 <페인 앤 글로리>는 그런 흐름을 잇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네마 천국>처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현재를 읽어내려가는 식의 고고학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살바도르의 어머니는 자기 주변 이웃들의 모습이 영화에 나오는 건 싫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살바도르의 어머니가 죽자 살바도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영화로 만든다. 이때 살바도르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점은 영화가 진행 중인 현재로부터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에 얼핏 보아서는 시제가 잘 구분가지 않는다. 영화에서 과거 시제로 나오는 장면은 아주 어린 꼬마 시절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감독이 어머니가 살아 계시던 장면을 그러한 헛갈림을 감수하고서라도 넣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의문은 현재에서 과거의 순번을 딱히 정리하지 않는 영화의 시간관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제시할 수 있는 문장이다.
8.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던 바로 다음 장면에 현재의 살바도르가 나오는데, 둘 사이에는 기껏해야 3년 정도의 시간적 차이만이 있을 뿐이니 외모 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동안에 살바도르는 작품 활동을 쉬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삶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면 간과하기 쉬운 사실인데 본편의 내용은 작품활동을 쉬던 감독이 작품을 다시 찍기까지의 시간, 즉 재기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때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자리하는 것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시되었던 살바도르의 어린 시절을 똑 닮은 영화 촬영 현장이다.
이 촬영 현장은 처음에는 마치 도입부의 그것을 그대로 복사해놓은 듯한 것처럼 진행되는데, 조금 지나면 화면 가장자리에 붐 마이크와 지미집이 있다는 점이 드러남으로써 그들이 영화배우이고 이곳이 영화 촬영 현장임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보았던 쇼트가 감독의 실제 ‘지난 삶’을 복사해놓은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덧붙여서 이는 과거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쳤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회상이라는 방법으로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불러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에 의해 요청되는 과거였었고, 어떤 면에서 그것은 마치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는데, 그런 인과를 뒤틀고 우려를 씻어낸 것이다.
9.
살바도르는 어머니와의 지난 대화에서 자신은 ‘팩션(Faction-사실에 기반한 허구적 창작물을 뜻함.)’ 따위는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이 장면의 바로 뒤에는 살바도르가 자신의 지난 연애를 팩션으로 각색해 연극으로 올리는 대목이 자리한다. 이러한 구성이 살바도르의 회상이 연극 장면으로 넘어가기 위해 ‘삽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살바도르의 어머니는 이미 살바도르가 팩션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에서 팩션에 관한 기억의 한줄기로 딸려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마치, <내가 사는 피부>에서 미(美)를 만들기 위해 피부를 한 조각씩 붙이던 성형외과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회반죽을 바른 벽면에 타일을 시공을 하던 청년이 그리던 그림이 아무런 맥락 없이 현재에 등장하게 된 것도 말이다.)
이미 지난 일과, 앞으로 되어야 할 일이라는 두 개의 구분이 있다면, 우리가 설계하는 이상향은 당장에는 현실이 아닌 것일 테다. 당장에 현실이 아니기에 그걸 현실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게 우리이고, 작가에게 그런 노력은 피그말리온이라는 설계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작가는 시행착오를 겪는다. 무엇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향일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일단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의 지난 삶과의 연결고리를 차분히 쌓아 올리는 것으로서 이 현재는 완성된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게 아니라, 무엇이 현재에 영감을 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영화의 제목을 빌려 쓰자면 ‘고통과 영광’의 앞뒤 순서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오직 느끼는 피부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