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라는 기생충, 적은 시간

<1917>(2020)

by 수차미
78917007_p0.jpg 영화 <1917>의 팬메이드 포스터 © @lucasdanieljones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다는 건 단순히 듣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방의 말과 함께 달려가는 동반자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떠한 말을 하면, 그에 맞장구치며 다음 길을 제안하는 게 청자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는 인터뷰 상황과 같은 일대일 대화에서 더욱 필요하다. 일대일 대화에서는, 말을 주고받음에 있어 청자 또한 화자의 다음 이야기를 결정하는 논객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타인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호흡과도 같다. 들숨이 있으면 날숨이 있듯, 혼자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고 듣기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들숨과 날숨에 관해 이미지 하나를 떠올려 보자. 먼 길을 달려가는 마라토너의 호흡은 거칠지만 균일하게 이루어진다. 42.195km를 달려가는 인간의 경이로움은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게 먼 길 동안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고, 그런 면으로 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대화하는 능력이 그러한 페이스 메이킹의 일종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질문과 대답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대화는 곧바로 종료되니 말이다. 쉽게 말해, 타인과의 대화는 마라톤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히치콕과 트뢰포의 인터뷰가 수일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있다면, 그 대화가 트뢰포 덕분에 성사되었다는 점 또한 알고 있을 테다. 트뢰포는 히치콕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런 팬심이 히치콕이라는 명감독을 발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례를 언급하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러한 마라톤 인터뷰는 히치콕이 아닌 트뢰포 덕분에 진행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트뢰포는 히치콕(의 영화)에 대해 잘 알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런 세밀함이 인터뷰 사이의 간극을 메웠고, 수일에 걸친 마라톤은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었다.


인터뷰를 일종의 마라톤에 빗댈 수 있다면, 마라톤에서 중요한 건 들숨보다 날숨이다. 말을 하는 사람보다 말을 듣는 사람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는 <1917>에서 중요한 건 관객의 역할이다. 분명, 영화 전체를 롱테이크처럼 보이게 편집한 이 영화의 기술적 면모는 전쟁 소식을 알리는 전령의 이야기와 만나 빛을 발하는 게 틀림없지만, 그렇게 달려가는 전령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며 응원하는 관객의 역할이야말로 이 영화의 숨은 공신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전제를 말할 차례다. 영화가 보여주는 기술적 면모는 쉬지 않고 달려가는 전령의 모습을 마라톤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마라톤의 기원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들어맞는다. 그러니 우리가 이 영화를 본다면, 그런 공통점보다 차이점에 집중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마라톤처럼 보인다는 사실만으로는 롱테이크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기 힘들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와 현실에서 마라톤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다를까. 현실에서도 관객에 해당하는 구경꾼이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는 관객이라는 구경꾼에 대해 말해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에 앞서 해야 할 생각이 하나 있는데, 현실에서의 구경꾼은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에만 있지만, 영화에서의 구경꾼은 마라토너를 경기 내내 따라간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늘 인물과 함께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롱테이크가 아니라 늘 함께라는 동반자 의식이다. 처음에는 두 명으로 시작했던 임무가 한 명으로 줄었을 때도 그가 슬퍼하지 않았던 건, 그의 곁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가족과 친구, 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떠올렸기에 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추상에서 우리가 명징하게 걸러낼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슴 속에 품은 사진일 것이다. 품 안에 있는 사진은 그가 가족과 함께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오브제이면서도, 늘 정면만을 바라보는 존재로서 그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음을 암시한다. 요약하자면 사진은 고정된 정면으로서 그가 맞닥뜨린 삶의 위기 순간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도록 돕는 오브제이다.


정면만을 바라본다는 말은 뒤돌아볼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문제를 회피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후회하지 말고 마주하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내가 떠올린 추상은 사진과 초상화의 관계이다. 먼저, 사진과 초상화는 사람의 얼굴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사용되었다는 점에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나 정면을 논함에 있어 사진과 초상화는 그 용례가 다르다. 초상화를 그릴 때는 인물의 정면을 그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어떤 구도로 찍어도 큰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초상화의 보급형 버전으로 사진 기술이 제시되었을 때, 사진을 찍는 이들은 대부분 ‘정면’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답은 쉽다. 부유층만이 할 수 있었던 행위를 모방하는 것, 모방함으로서 부유층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정말로 지위가 올라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허나 그러한 행위가 말해주는 사실은 단명하다. 서민들이 초상화의 대안으로 사진을 선택했던 이유는, 단지 부유층에 대한 모방심리뿐만이 아니라 기록을 남기는 가장 저렴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진이든 초상화든 시간에 맞서 싸우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 삶을 영위하는 게 곧 생존의 조건인 시대에서, 시간의 최전선인 오늘을 무사히 보냈다는 것, 그것이 사진 속 포즈가 정면이어야 했던 이유다.


거센 파도가 닥쳐올 때 그에 정면으로 서있기가 힘든 것처럼, 닥쳐오는 시간을 버티어 낸다는 구명의식이 사진에 담겨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민들에게 사진은 그런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사진 기술이 발달하고 사진을 찍는 방법이 간편해지기 시작했을 때, 사진에서는 정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사진에 찍히기를 거부한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 찍히는 걸 막아서도 아니었다. 사진 기술이 시간의 최전선이 아닌, 최전선으로 나아가는 도중을 포착하게 됨으로써 그곳에는 정면만이 있을 이유가 사라졌던 것이다.


‘순간’으로서의 포착이 등장했다. 카메라를 든 사진사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서민들의 모습을 찍기 시작하자 그곳에는 정면이 아닌 측면이 드러났다. 이제 시간은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도 관측되는 현상이 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놓쳐왔던 것들이 드러났다. 인간의 눈은 늘 앞쪽의 것, 정면만을 바라보지만 카메라의 눈, 기계의 눈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모두 보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 세계의 불청객에 해당하는 유령은, 정면으로만 포착되는 것을 거부하고 측면으로도 관측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측면으로만 관측되는 유령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이 유령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우리는 그들에게 쫓기고 있으니 시간이 많지 않다.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막아낼 시간은 충분하지 않고, 이는 사진기술의 발달이 불러온 게 축복만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우리는 관측하는 신분에서 관찰당하는 신분으로 변화했다. 타인을 바라보고, 타인으로부터 응시당하는 것만이 아닌, 제3의 시선이 세계에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너와 나로 구성되어있던 유령이라는 현상은, 너도나도 아닌 제3의 무언가가 되어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너와 나, 주인과 노예, 상류층과 하류층, 대상과 비대상 사이에 흘러들어오는 제3의 존재는 누구와도 무관하게 생명을 앗아갔던 흑사병처럼 우리 곁에 흘러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그림에 있는 기울어진 해골처럼, 이전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우리 삶에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끼어든 죽음의 형태는 우리의 삶이 얼마든지 절단될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떠나온 삶의 언저리에는 늘 죽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쉽게 말해, 죽음이 우리 삶에 갑작스레 끼어드는 ‘침입자’가 아니라 ‘동반자’였음을 말해주었다.


이 대목에서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1917>의 장면을 돌아보면, 이 영화의 카메라는 관조하는 무언가라기보다 저승의 관문을 지키는 사신에 가까워 보인다. 응시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운 이 시선은, 얼마나 잘 연결되어있느냐가 아니라, 계속해서 바라본다는 인식 자체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흐르는 물처럼, 자동 기술법처럼 다가오는 이 카메라에서 시간과의 정면 승부를 피할 수 없다는 다짐을 찾아볼 수 있다면, 그런 터널의 끝이 언제쯤 다가오는 지가 모두의 화두라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는 시간과의 정면 승부다. 한국 배급사 측에서 작성한 것이겠지만, 이 영화의 홍보 문구는 “그들이 싸워야 할 것은 적이 아니라 시간이었다!”라는 강렬한 서두로 시작한다. 이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적은 독일군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은 독일군에 쫓기지만 시간에 쫓기기도 하니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전장은 총알이 빗발치는 평원이 아니라 살아있는 의식 그 자체이다. 살아있는 한 인간은 시간 아래에 놓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이라 부르고, 죽음을 영원한 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잠은 그런 죽음의 축소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잠은 일시적인 시간의 절단을 부른다. 영화의 중간 부분에 그것을 말해주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롱테이크로 시간의 연속성을 확보하던 영화가 고집을 일시적으로나마 포기하는 장면이 있다. 스코필드 일병(조지 맥케이)이 적군의 총알에 머리를 맞아 기절하는 장면이다. 저격수와 문 하나를 두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문을 걷어차고 안을 바라보자마자 총알이 날아온다. 다행히도 총알이 철모에 도탄되어 목숨은 건졌지만, 피탄시의 충격으로 인해 날이 저물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야 만다. 이 장면에서, 검은 화면은 꽤 긴 시간동안 유지되면서 그동안 롱테이크로 진행되어 왔던 영화 전반에 확실한 쉼표를 찍는다.


영화를 보며 드는 호기심은, 그 긴 적막 동안에 스코필드를 제외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관객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다. 말하자면, 주인공을 따라가던 우리가 주인공이 사라졌을 때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시간의 연속성이 사라지게 되는 게 곧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라는 게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으로 여겨질 때, 중간 부분에서의 단절은 우리가 영화의 마지막에 마주할 검은 화면, 엔딩 크레딧의 적막을 미리 체험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가사 체험이다. 우리는 장막을 들추어 미래를, 죽음을 엿보게 된다.


적막을 깨고 스코필드가 눈을 뜨기 시작할 때, 미래를 당겨와 허리춤에 채우던 것이 다시금 제자리로 튕겨 나간다. 그의 주변을 맴돌던 죽음의 메아리가 저편으로 물러가고, 우리는 이전처럼 시간의 연속성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니 이 대목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중간에 이미 한번 끊어진 것을 다시 ‘이어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이것이 연극이었다면 스코필드의 의식이 끊어졌을 때 1막이 끝나고 2막이 올라갔을 테다. 이때 우리는 1막과 2막 사이의 경계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1917>에서는 만연하는 죽음, 전장의 파열음이 그런 감각을 차단해버린다. 엔딩까지 달려가는 이 마라톤 경주에서, 도중에 쓰러졌다는 사실이 망각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모습은 잠을 자고 일어나 새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영원한 잠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반대로 해석하면, 잠을 자는 것으로 죽음의 총량을 차분히 줄여나간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잠을 잔다는 건 죽음을 미리 당겨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에 붙은 이자를 성실히 납부하는 납세자가 바로 우리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끼어든 사진이라는 유령은 우리가 납부하는 이자를 먹고사는 기생충이다. 사진에 포착된 이는 시간으로부터 빗겨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그는 죽음의 영역 밖에 있고 그곳은 치외법권이다.


영화에는 숱한 전투에도 진척이 나지 않아 그대로 방치되어 버린 무인지대(No Man's Island)가 나온다. 영화 초반과 중반, 죽음이 닥쳐오기 전까지 스코필드와 그의 동료가 건너던 곳이다. 기묘하게도 그곳에는 흑사병의 상징과도 같은 생쥐가 독일군 벙커 안에 있다. 영화는 영국군과 독일군의 차이를 생쥐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으로 말해주는데, 아마 그것은 그들에게 닥쳐올 죽음의 총량일 것이다. 자그마한 쥐는 좁은 틈새도 비집고 들어가지만 큰 쥐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띄는 게 큰 크기의 쥐이다. 하지만 눈에 잘 띄는 만큼 방역하기가 쉬운 건 아니다. 어느 쪽에나 이 쥐는 인간이 가는 곳에 죽음이 뒤따른다는 것을 상징하는 동물로만 남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라는 기술(技術)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하지 이야기를 기술(記述)하는 것에 있어 전부가 아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필멸자의 심정을 바라보기 위해 화자로 설정된 게 바로 그(He)이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초청된 것이다. 그러니 임무의 종착지가 영화의 끝자락을 택한다면, 그들의 적은 영화라는 ‘시간’으로 지적될 수 있을 테다. 제한시간 내에 임무를 완수하는 게 관건인 상황에서, 최종 목표가 영화의 마지막 지점으로 연결되리라는 것쯤은 누구나 예상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시간에 쫓긴다는 건, 영화의 러닝타임에 쫓긴다는 말과도 같다. 이는 마치, 극장에 한번 들어온 이상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꾸어 말하면, 스코필드는 달리기 시작한 이상 종주지점에 도착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 영화를 굴러가게 하는 기술적인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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