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래빗>(2020)
<조조 래빗>이 어떤 영화인지를 타인에게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대인 감독이 히틀러 분장을 하고 영화에 나오는데 사실은 주인공 꼬마 녀석의 상상 속 친구였다는 기가 막히지만 그리 탁월하지도 않은 비밀에 관한 영화라고 말이다. 이 플롯은 무언가 복잡해 보이지만 영화 전개에 그렇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복잡하기만 하고 큰 의미가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해보고 싶은데, 우리가 영화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아 헤매는 게 과연 옳은 행위냐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읽었으면 해서 일부러 문장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실은 다른 점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우리가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표류기라고 알고 있는 [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자신은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하구 근처 무인도 해변에 표류해 스물 하고도 여덟 해 동안 홀로 살다가 마침내 기적적으로 해적선에 구출된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가 들려주는 자신의 생애와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이야기]를 생각해보거나, 걸리버 여행기라고 알려진 [세계의 여러 외딴 나라로의 여행기. 네 개의 이야기. 처음엔 외과 의사, 그 다음에는 여러 척의 배의 선장이 된 레뮤엘 걸리버 지음]을 생각해보면, 이 긴 제목이 작품 전체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설명이라는 단어가 요약의 뜻으로 쓰인다면 긴 제목은 설명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런 설명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주제라는 단어는 요약이라는 말과 같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로빈슨 크루소와 걸리버 여행기가 쓰인 무렵을 생각하면 이 작품들의 주제는 모험에 대한 로망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다시 보는 두 작품은 모험보다 생존의 의미가 강조된다. 로빈슨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에 대한 답변으로 <캐스트 어웨이>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고, 걸리버가 다녀온 나라들에 대한 탐사는 오늘날 들어 걸리버의 입장이 아닌 그가 방문한 국가의 시선으로 걸리버를 그려내고 있다.
걸리버의 시점으로 묘사되는 여행담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기를 전하지만, 그가 방문한 국가 사람들에게 걸리버는 괴물, 이방인, 바보에 불과하다. 난쟁이의 나라에서 그는 공포의 대상이자 전술 병기이고, 말들의 나라에서 그는 낯선 타자일 뿐이다. 말들의 나라에서는 말과 인간의 자리가 역전되어 있는데, 이것이 노예 제도에 대한 풍자이자 그런 부류의 계급도를 포괄해 지칭하고 있음은 부정할 없는 사실이다. 실은 이게 정석적인 해석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다른 가능성을 확인하려 한다.
난쟁이의 나라와 말들의 나라 사이에는 거인들의 나라와 라퓨타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는 위의 두 가지 나라를 살펴보아야 한다. <조조 래빗>의 이야기가 생뚱맞은 모험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소소하게나마 나치에 대한 이해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당장 이 문맥에서는 이어지지 않지만, 유대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혐오로 변모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말의 나라가 그런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걸리버 여행기]의 말의 나라. 걸리버를 처음 본 마(馬)들은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하지만 걸리버라는 ‘가축’이 마(馬)처럼 행동하는 걸 목격한 그들은 걸리버를 나라에서 추방해버린다.
이 이야기가 점잖은 <혹성탈출>처럼 보인다면 실제로 영화가 소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 해당 단락의 충격적인 점은 걸리버가 마(馬)가 되고자 했기에 그들이 걸리버를 추방했다는 결말이다. 이곳에서 인간들은 말처럼 우매했고 반대로 마(馬)들은 성숙한 문명을 이루어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걸리버는 살아온 나라를 버리고 마(馬)들의 나라에 귀의하고자 한다. 하지만 마(馬)들은 지성을 지닌 인간인 걸리버가 우매한 그들의 지도자가 될 것을 우려한다. 처음에는 지성을 지닌 인간이 있다며 놀라워했지만, 그런 지성으로 인해 그동안 잘 유지되었던 체제가 붕괴될 것을 우려하며 걸리버를 쫒아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조조 래빗>의 도입부는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시구를 읊는 꼬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상상 친구로 히틀러를 두면서 나치에 깊게 귀의한 모습을 보여주는 10살 꼬마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나치는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소년의 모습인데, 이는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 전개이다. 다만 영화 중간에는 우리가 잘 아는 명예 아리아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금발벽안의 소년 조조는 일본인은 아무리 봐도 아리아인처럼은 안 생겼다고 짤막하게 말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일본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겠지만, 그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은 ‘아리아인’이 된다는 환상 자체이다.
마(馬)의 나라에 방문하게 된 걸리버가 말들을 추종하게 된 것을 두고서 명예 마(馬)가 되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마(馬)들은 그런 걸리버를 마(馬)로 인정하지 않고 추방해버린다. 이것을 명예 아리안이 되지 못하는 영원한 타자, 다른 것도 아닌 신체적 특징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본다면, [걸리버 여행기]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할뿐더러 <조조 래빗>이 말하는 나치 독일 시기에는 더욱 잘 들어맞는다. 신체적 특징이 계급에 관한 문제로 나아갔던 시기의 대표격이 바로 나치 독일이기 때문이다.
신체를 귀속해 노예로 만드는 건 고대 로마 (이를 테면 스탠리 큐브릭의 <스파르타쿠스> 같은)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은 인정했다. 예컨대 고대 로마가 노예 제도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계급을 나누는 방식은 승자와 패자의 논리에 따랐다. 물론 여기에는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지만,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인간의 소유권을 규정하고 다루는 방식 자체에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주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리고 우생학이 등장했다. 골상학과 같은 것도 등장했다. 인간이 아닌 것들을 식별하기 위한 이론으로 도입된 것들이었다. 우습게도 그 과정에서 뱀파이어나 마녀와 같은 것들이 그런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무언가에 대한 공포가 신체로 집약되면서 역으로 그런 신체에 차이를 부여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이형의 신체에 대한 두려움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들의 ‘비교적’ 온전한 신체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특권을 부여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평범했고 평범했(다고 생각했)기에 악을 행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뭔가 이야기가 착착 진행된다고 당신이 지금 느꼈다면, 한나 아렌트를 말하려는 게 맞다. 악은 평범하다. 하지만 이게 <조조 래빗>이라는 영화를 통해 내가 하려는 말은 아니다. 조조는 그저 평범한 꼬마에 불과하고 마지막에는 나치를 탈당(?!)하기까지 한다. 애초에 이 영화는 나치에 대해 진지하게 이 야기 하려 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나치를 소재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조의 성장을 위한 요소일 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나치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 가벼움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존재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주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인용.)
평범한 이들 중에서도 비교적 가벼운 편에 속하는 히틀러 유겐트(히틀러 청년단)에 소속된 조조의 모습을 보면, 나치 꿈나무라는 생각보다 그냥 10살 꼬마 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 대목에서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어린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토르 : 라그나로크>를 만들었던 걸 고려하면 심각하게 생각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듯하다. 두 영화를 같은 선에 놓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나라 하나가 통째로 멸망하는 걸 그렇게 긍정적으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나치 꼬마를 통해 당시를 비판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타이카 와이티티는 유대인이다. 그는 “유대인이 히틀러 연기를 하는 게 히틀러에게는 가장 큰 치욕일 것”이라고 개인 트위터 계정에서 발언한 바 있다. 이러한 발언과 영화 전체를 종합하면 그는 나치라는 시대가 아니라 나치라는 광기를 조명하고 싶었던 듯 보인다. 그는 역사에 따라 마주하게 된 어떤 시대가 바로 나치인 게 아니라, 인간의 광기가 표면으로 올라온 게 바로 나치라고 믿었다.)
예컨대, 나치에 대한 소재를 다룬다고 해서 나치 비판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많은 평자가 지적했듯이 <조조 래빗>은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보다는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트 킹덤>에 가깝고, 이는 곧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어둡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굳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히틀러를 상상 친구로 내세워 아이의 내적 성장을 묘사하는 이 영화가 [안네의 일기] 같은 역사적 전례를 참조하고 있음 또한 주지의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쓰고 보니 <거친 녀석들>처럼 중화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하지만 농담이다.)
<조조 래빗>은 마치 [안네의 일기]처럼 집안에 몰래 숨어 사는 유대인 엘사(토마신 맥켄지)를 이야기의 일부로 끌어온다. 이 끌어옴은 엘사가 숨어있는 집이 다름 아닌 조조네라는 점에서 더욱 면밀히 결합된다. 영화의 첫 시작이 집 안에서 무언가에 열중하는 조조의 모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상상친구 히틀러로부터 나치식 경레를 교육받는 중이었다는 점에서 그 집은 일종의 신성영역이다. <문라이트 킹덤>에서 인디언 천막이 꼬마의 전부이듯이 <조조 래빗>에서의 집 또한 꼬마에게 전부인 것이다.
이 집은 조조의 상상친구가 등장하게 된 곳이기에 조조의 내면세계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상상친구 빙봉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는 디즈니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과 이 영화는 아이의 성장’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문라이트 킹덤>이 컵스카우트라는 야생 탐험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것처럼 <조조 래빗>은 히틀러 유겐트라는 나치 사상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조조의 집안에서 조조는 용맹한 꼬마이지만 집 밖의 히틀러 유겐트 활동에서는 ‘조조 래빗(토끼처럼 연약한 조조)’이라는 멸칭을 받기 일쑤다. 하지만 조조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어쩌면 조조에게는 나치라는 게 사상이라기보다 용맹함의 상징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그런 조조가 자신의 조그마한 세상에서 한발자국 나왔을 때 목격한 것들은 히틀러 총통을 위해 전쟁에서 몸을 불사를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다고 말하는 징집 중의 청년단이다. 아마도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슬픔을 드러내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영화가 공간을 통해 묘사하는 조조의 내면 세계에서 마을 밖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조조에게는 집과 마을이라는 두 개의 장소만이 있다. 영화에서 조조의 아빠는 전쟁에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아직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가 살아있지 죽었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정말로 소식을 모를 수도 있지만 영화에 나오는 나치 수뇌부들도 조조 아빠의 소식을 모르는 걸 보면 아마 그는 사망한 게 분명하다. 어쨌거나 이러한 설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마을 밖은 미지의 세계로 남겨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미지의 세계로 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을 밖으로 끌려나가면서 조조를 ‘래빗’이라고 조롱하던 청년단원들도, 나라 밖으로 나가 전선에 투입된 조조의 아버지도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독일이 패망했음에도 집안에 있는 엘사에게 ‘독일이 이겼다’고 거짓말을 한 건 조조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조조가 말하듯 그건 이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 포괄적으로 보면 인류애라 할 수 있는 그것일 테니 말이다.
인류애라는 말은 포괄적일뿐더러 거창하기까지 하니, 굳이 거기까지 쓸 필요는 없다. 지구는 둥글고 우리는 인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모든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더욱이,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가 겪는 일련의 모험들이 마치 환상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조조가 사귀는 상상 친구 히틀러를 설명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걸리버와 조조의 나이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다. 걸리버가 맞닥뜨린 세상이 어느 정도 자신의 기준에 따른다면 조조가 바라보는 세상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늘 가르치려 들었었다. 조조에게 줏대가 없다거나 한 게 아니고, 어린 나이에 주관과 소신이 있기란 힘든 일이어서다.
걸리버에게 주어진 현실은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조조가 바라보는 세상은 현실 그대로가 아니다. 이는 마치 <판의 미로>가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이라는 현실을 잊게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조조 래빗>에서의 환상은 “나도 너만 할 때 상상친구가 있었단다.”라는 어른의 동의를 얻으며 현실 안으로 편입된다. 예컨대 위의 두 가지 사례를 결합해보았을 때 이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조조의 어린 마음과 그런 조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객석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패전했다는 게 실패했다는 말과 같지 않다는 것, 물론 나치의 패전 자체는 기쁜 일이지만, 그것으로 성장했던 아이에게 패전이라는 말이 실패와 같지 않음을 알려주는 건 필요한 일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이든 주어졌을 때, 그 안에서 자신을 평범하게 생각하게 되는 아이의 삶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