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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6. 2021

당신이 스파이라면 스파이의 아내가 될게요

<스파이의 아내>(2021)


구로사와 기요시의 근작 <스파이의 아내>를 보았다.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들의 글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그러던 중에 송경원 기자의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Kmdb의 2021년 1월 8일자 ‘사사로운 영화리스트’에 기고된 그의 글에는 기요시 영화의 ‘리듬’에 대해 지적하는 대목이 있다. 이 말이 작가론적 성격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와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먼저 내가 인용하려는 건 다음 문단이다.



“매 장면은 꽉 차있고, 리듬은 빈틈이 없다. 빈틈이 없다는 것이 꼭 칭찬만은 아니다. 쉽게 가는 장면이나 완급 조절 없이 정해진 속도로 뚜벅뚜벅 걷는 쪽에 가깝다는 의미다.”



송경원의 이 말은 어떤 면에서 이 영화의 무장소성과 가능성 모두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후자는 전자에서 파생된다. 후술하겠지만 김병규가 씨네 21에 기고한 4월 6일자 글 ‘'스파이의 아내'는 어떻게 밀도 있는 실내극을 완성해냈나’를 살펴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내가 지적하려는 건 다음 문단이다.



“정신병동에 갇힌 사토코는 말한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바로 그 사실이 이 나라에서 내가 미쳤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은 모든 내부의 가능성을 소진해버린 비어 있는 인간의 형체를 각인시킨다.”



김병규의 이 지적은 전적으로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에 기대고 있는데, 이는 뒷문단에서 “이미지의 열병에 사로잡힌 것처럼, 섬광처럼 나타난 형상으로 사토코의 얼굴은 백색의 빛으로 물든다.”라고 서술하는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왜냐하면 들뢰즈가 베케트 극을 비평하면서 눈여겨보았던 게 바로 어두운 무대와 그 중앙에 내려오는 하나의 빛줄기였기 때문이다. 여러 수사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들뢰즈가 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하나였다. 빛줄기가 존재의 형상을 드러낸다는 것, 그리고 이 형상이 바로 내부의 가능성을 소진해버린 비어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비어 있는 인간의 형체가 단지 거죽뿐에 불과한 게 아닌 이유는 바로 그 ‘비어 있음’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가능한 것이란 곧 소진과도 같았고, 이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베케트의 『고도』를 통해서도 쉽게 파악된다: 언젠가는 올 것이다. 하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이에 따라 “그는 가능한 것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을 소진한다.” 들뢰즈는 바로 이를 통해서 잠재태의 이전인 결정체로 돌아갈 수 있음을 주장하는데, 비어 있는 인간의 형체란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인 것, 아니 모든 가능성 전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스파이의 아내>를 결정체 이미지로 구성할 수는 없다. 이는 심한 비약이다. 물론 작품 중간에 방문을 닫고, 빛이 새어들지 않도록 암실을 구성하는 장면이 있기는 하다. 이 장면들은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스파이’의 아내가 [스파이와 아내]로 변모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개심이 역사의 어떤 변인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분화를 끌어낸다고는 볼 수 없고, 따라서 그녀를 소진된 인간으로 설정하는 건 바르지 못하다.



잠깐, 나는 ‘바르지 못하다’고 말했지 ‘틀렸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송경원이 지적하는 균일한 리듬이 서스펙트나 멜로, 스릴러가 잠입해올 틈새가 없는 구석을 의미한다면, 이는 얼마든지 역사의 균질함이 될 수 있다. 틈새 없는 리듬이란 것은 곧 영화의 콘티뉴이티, 즉 역사의 선형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던가? 그렇다면 아마도 이는 역사의 전진과 막힘, 그 필연성에 관한 멜로드라마가 될 테다.



노엘 스미스는 멜로드라마 장르를 두고서 그 중요성이 이데올로기적 실패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실재하는 현재나 이상적인 미래에 그 문제들을 조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자면 만족스러운 결말이 불가능하기에 그 어떤 이야기든 간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다. 쉽게 말해 멜로드라마들은 행복의 가면을 쓰고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들에겐 이데올로기적 실패가 예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런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게 멜로드라마 속 인물이다. 그러니 이를 필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의 시곗바늘이 하나의 시간을 가리킨다면, 우리는 다가올 시간 앞에서 평화로울 수 있을까? 누군가는 초조한 표정을 지을 테고, 누군가는 체념한 표정을 지을 테다. 요컨대 이는 도래할 것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에 다름없다. 역사는 하나의 결말을 갖고서 타임라인 위의 우리들을 다가올 시간 앞에 인도한다. 이는 우리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바로 그 대지가 움직인다는 점에서 모종의 운동성을 띠기도 다. 말하자면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과거가 우리에게 운동 에너지를 부여한다.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에서 이러한 필연성은 태평양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먼저 1:12:35에 나오는 장면 하나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와 그녀가 부부가 아닌 스파이와 아내로서 나누는 대화이다.







그: “난 스파이가 아냐. 내 의지로 움직이니 스파이와 전혀 달라.”

그녀: “뭐든 상관없어요. 저한테 당신은 당신일 뿐이에요.

당신이 스파이라면 스파이의 아내가 될게요. 그걸로 족해요"



두 사람의 대화에서 눈여겨볼 만한 지점은 ‘아내’가 단독자가 아닌 일종의 수사로써 이용된다는 점이다.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야만 하는 아내는 표면상으로 남편에 종속된다. 따라서 ‘스파이’의 아내가 아니라 [스파이의 아내]가 되기를 자청하는 그녀의 모습은 유별나다. 셜록 홈즈의 조수인 왓슨이 아니라, 셜록 홈즈’와’ 왓슨의 관계처럼 동반자 관계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영화가 그녀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타임라인 위에 새겨진 역사의 사건들이 단독자가 아닌 동반자 관계로서 우리에게 호명될 수 있음을 예견한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므로 스파이와 전혀 다르다고 말하지만, 과거가 그를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는 스파이와 동일한 동력원을 사용하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스파이는 과거를 지워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과거의 속성과 모순되기도 한다. 스파이는 자신의 소속을 숨겨야 함과 동시에 자신의 소속을 적극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즉, 표면적으로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이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는 단독자가 아니며, 역사와 동반자 관계에 있기에 그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역사에서 이탈한 스파이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데커드처럼 실재의 사막 너머로 사라지기만 할 뿐이다.



반대로 보면 이는 스파이는 오직 역사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파이가 있는 곳에는 늘 역사가 있으며, 이는 <스파이의 아내>를 관람하는 것에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므로 스파이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런 언행의 대가는 싸늘한 죽음이다. 스파이임을 부정한 스파이는 아군도 적군도 아닌 역사로부터 배신당한다. 즉 그는 스파이임을 부정한 대가로 역사와의 동반자 관계를 상실했으며, 이에 따라 스파이가 역사 안에 설 자리는 사라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상상 하나를 해볼 수 있다. 그가 그녀를 밀고한 것은 자신의 이런 최후를 미리 예감했기 때문은 아닐까?



역사와 동반자 관계이기를 포기한다는 건, 자신을 있게 한 역사로부터 이탈한다는 것과도 같다. 이는 그가 자신을 ‘코스모폴리탄(세계주의)’이라고 지칭하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 삼은 그의 발상은 “상처는 자신을 찌른 창에 의해서만 회복된다”고 말하는 지젝의 행복윤리학을 정면으로 빗겨간다. 그는 왜 일본이 아니라 세계의 편에 서서 일제를 고발했던 것일까? 이는 우리가 가장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 영화의 미스터리다. 그러나 그만큼 손쉽게 해결되기도 하는데, 이 영화가 [스파이의 아내]를 주인공 삼는다는 점이 그렇다.



위에서 리듬에 대해 틈새 없이 균질하고 평탄한 시간이라고 설명했던 대목을 기억한다면, 이게 바깥의 것들이 침입해올 수 없는 견고한 프레임이기도 하다는 점을 자연스레 추론해보게 된다. 그리고는 정해진 역사는 바꿀 수 없다는 불변의 법칙도 떠올리게 된다. 쉽게 말해 역사는 개변하지 않는다. 단지 흘러가기만 할 뿐이다. 무언가 거대한 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소시민적 일상에서도 유효한 발언이다. 이를테면 영화 중간에 스쳐 지나가는 야마나카 사다오가 오즈 야스지로의 친구였다는 점, 그리고 둘 다 중일전쟁에 참전했는데 오즈는 살고 야마나카는 사망했다는 점이 그렇다. 오즈 영화의 동반자적 세계관이 이 시기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성립되었음을 떠올려본다면, 동반자 관계란 배를 타고 떠나는 쪽이 아니라 폐허가 된 대지에 남아서 세계의 멸망을 바라보는 쪽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서 여성들의 ‘걷기 행위’가 모종의 리듬을 형성한다는 점이 떠올랐다. 영화 내용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지만, 이러한 걷기 행위의 리듬이 철두철미한 이데올로기적 구역을 만들어낸다는 점은 가져와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리듬들은 무언가 대안을 생각해보는 쪽의 실천성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실패의 슬픔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물은 오히려 세계의 멸망에 대한 슬픔보다는, 자신을 찔렀던 창이 다시금 회수됨으로써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에 대한 환희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어차피 자신을 더욱 아프게 찔러야만 진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영화가 영화 자체보다는 일종의 텍스트로써 기능하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당대를 비판한다기보다는 자신을 더욱 아프게 만듦으로써 무언가 치유를 꾀하는 <큐어(치료법이라는 뜻이기도 한)>의 감성 말이다. 아마 기요시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역사에 대한 반성의식 같은 건 아니라고 말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반성과 치유는 다르다. 반성은 어두운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대하여 밝은 내일을 고대하지만, 치유는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자신이 병리적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고서 그 ‘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에 방점이 찍힌다. 자. 이제 우리는 다시금 ‘창(Window)’의 문제로 돌아왔다.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은 여기서 다시금 출발지점으로 돌아간다.



덧붙임 : 본문에서 언급한 1:12:35의 지점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폐허이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은 페허에 홀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끝난다. 당겨진 시간의 화살은 스크린 바깥을 돌아 스크린 안으로 박혀온다. 이 외상들을 그녀가 홀로 감당하도록 내버려둔 것은 남편의 의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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