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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23. 2021

한국이 취향이 된 세상에서

<승리호>(2021)


<승리호>는 어마 무시한 돈이 들어간 작품이고 실제로 영화상의 그래픽은 몹시 화려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는 “한국영화답지 않다”는 수사인데, 이 수사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구석이 있다. 첫 번째는 한국영화라는 게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이다. 한국영화답다는 게 뭘까? 한국기술로 만든 작품이라는 건지, 아니면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건지 헷갈린다. 전자의 경우라면 우리의 생각은 아직도 구닥다리 인형 탈을 사용하던 197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게 된다. 이게 너무 먼 과거처럼 들린다면 시대를 비교적 최근으로 옮겨볼 수도 있겠다. 심형래의 <디워>(2007)를 두고서 언론들이 사용했던 몇몇 수사는 이것이 ‘한국기술’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지적은 <디워>의 한국 관객이 칠백 만명이나 들었다는 점을 통해 입증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관객이 ‘영화’를 보러 간 건 아니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아리랑’이 흘러나오던 걸 생각해보면 그렇다. 영화의 내용보다는 ‘한국’이라는 정체성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단순한 국뽕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될 명확한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자본의 논리를 따라가는 상품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줄곧 전세계 영화를 지배해온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는 일이 우리에겐 필요했다. 그 시작은 <쉬리>(1999)였다. 우리나라도 드디어 ‘할리우드’ 못지않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표현이 이때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투입된 자본 등에 대한 평가였었다. 그러니까 <쉬리>에 대한 평가는 ‘한국영화답지 않다’는 게 아니라 ‘한국 시장’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즉, 한국영화답지 않다는 표현은 ‘규격 외’를 뜻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승리호>에 대한 평가를 독해해볼 수 있다. 우리가 타자를 보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듯이, 관객 또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말하자면 “한국영화답지 않다”는 말은 “당신이 있을 자리는 이곳이 아닙니다”라는 말과도 같다. 결론적으로 <승리호>가 한국영화답지 않다는 건, 이 영화가 한국시장의 바깥에 있다는 뜻이 된다. 즉 이 영화는 ‘바깥’을 상정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떠오르는 물음 하나가 있다. 안쪽에 사는 이들이 어떻게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우물 안 개구리에게 하늘이 단순한 동그라미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가 바깥세상을 잘못 이해했었을 수도 있을 테다. 그리고 시장논리로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국영화는 로컬(Local)인가?” 한국영화가 세계 시장에서 통하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근래 한국영화에서 로컬에 관한 문제는 봉준호의 <옥자>(2017)에서 출발해 <기생충>(2020)과 <미나리>(2021)에 다다랐다. 이것들이 넷플릭스의 시대에 와서 유독 부각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아마도 이는 단순한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승리호>가 한국영화답지 않다고 말한다면 전세계를 타깃으로 한 상품영화라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고, 전세계를 타깃으로 영화를 배급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OTT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영화가 OTT에서 배급되는 건 아니다. OTT는 극장의 대체재가 아니라 상보재이기에 OTT의 등장은 극장의 멸종과 맞물리지 않는다. OTT가 나와서 극장이 쇠퇴하는 것도 아니고, 극장에 갈 수 없어서 OTT를 선택하는 것만도 아니다. 이 둘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다. (<승리호>가 넷플릭스에서 배급된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OTT의 등장은 극장에 방문할 수도 있는 몇몇의 발길을 돌려놓았다. 영화를 보는 것에 극장이 필수적인 것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르게 보면 이는 과거에 극장 없이는 영화를 볼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극장 시설이 없거나 노후한 지역에서는 영화를 보는 경험이 불가했다. 하지만 극장 없는 영화 경험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톰 거닝이 말하던 영화사 초기의 “매혹의 시네마”가 다시금 부활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영화적인 것’이라는 말이 극장에 앉아 스크린에 빠져드는 공간의 경험을 의미했다면, 오늘날 ‘영화적인 것’이라는 말은 스크린에 ‘들어앉아’ 극장을 상상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 극장을 상상한다. 


그런데 이 말은 확실히 이상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 ‘극장을 상상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이 그렇다. 극장이 없어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 왔는데 우리는 왜 극장을 거쳐야만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예를 들면 VR 시네마 기술 중에는 영화를 360도 영상으로 변환해 상영하는 게 아니라, 극장 공간을 가상으로 구현해 둔 뒤에 그 안의 스크린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기법이 있다. 여기서 재현되는 건 영화 속 공간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공간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냥 허공에 영화 영상만 틀어두어도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영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도는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에 대한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대한 스크린 크기나 웅장한 스피커 성능을 제하더라도,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에서 어떤 경험이 생겨난다. 요컨대 ‘영화적인 것’이라는 말은 단순히 영화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생각해보건대 이 말은 한국영화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듯 보인다. 한국영화를 말하는 것에 로컬리티가 필수적인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한국이라는 로컬 없이도 ‘한국영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적인 것’이라는 말은 단순히 한국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며, 한국영화를 본다는 건 단순히 ‘한국’을 느끼는 게 아니라 ‘한국적인 것’에 대한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어가 나오지 않거나 한국인 스태프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영화가 아니게 된다면, 필름으로 만들지 않았거나 혹은 24프레임을 지키지 않는 영상은 영화가 될 수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이는 ‘한국영화’라는 단어 자체에 어폐가 있음을 말해주기도 하는데, 세계화되는 이 시기에 한국만의 것은 거진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가 나온다고 해서 일본 영화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듯이, 판소리나 이순신이 나온다 하더라도 한국영화가 아니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보건대, 바쟁이 말했던 것처럼 이제 영화는 그냥 하나의 ‘영화’로서만 분류될 때가 온 듯하다. 바쟁이 말했던 영화 언어의 진화라는 건, 인간의 언어가 영화 언어로 집약되는 시점을 말해주었던 게 아닐까? 


먼 옛날에는 한 편의 영화를 두고서 각각의 언어로 더빙하는 방식이 영화 배급에서 우세를 점했었다. 영화사의 극초기에 있었던 일이지만, 스파게티 웨스턴이 유행하던 60년대에도 아직 잔존했었고, 70년대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홍콩의 영화 제작사와 손잡은 한국인들은 홍콩 배우와 한국 배우들의 ‘영상’만을 찍고서 소리는 그들 각자의 언어로 더빙했다. 그리고 이 촬영현장에서는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고들 하는데, 영화사의 이러한 사실들이 말해주는 바는 영화도 결국 하나의 영상 언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에 따르자면 한국영화는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 고유의 영상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면도 살펴보자. 프랑스 평론가들이 미디엄 쇼트를 두고서 “쁠랑 아메리카”로 지칭했던 것처럼, 어느 지역에서 흔히 쓰이는 영화 언어가 로컬리티를 획득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인도 영화에는 꼭 춤이 나온다거나 한국영화에는 꼭 신파가 나온다거나 하는 공식이 세워진 근래의 풍경은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지역성이 해당 지역이 아니라 전세계의 불특정 다수에게도 먹혀들어갈 때, 이것은 로컬리티가 된다. 요컨대 한국이 아니라, 한국적인 것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로 변한다. 그런데 오늘날은 가히 문화의 혼종 시대라 할 수 있지 않던가? 문화의 혼종 시대에 우리는 문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혼종 시대에 우리는 영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다. 


가령 햄버거나 샌드위치가 어느 나라 음식인지를 제대로 답하기란 어렵다. 특정 지역에서만 소비되지 않게 된 이 음식들은 하나의 공산품이 되었고, 그 탓에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즉, 무국적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영화가 처한 상황이 이와 유사하다. 영화는 전지구를 떠도는 데이터 상품 중 하나가 되었고, 이 때문에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대신해 ‘영화적인 것’이라는 유사품이 생겨났다: 영화가 사라지자 영화적인 것이 등장했다. 오늘날에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인 것이 바로 문화다. 로마가 멸망한지 벌써 수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 로마가 서양 사회에 건재하듯이, 영화가 폐허가 되어가는 현재에 영화는 문화의 형태로 잔존한다. 


무엇이 영화인지를 알 수 없게 된 시대에 영화는 하나의 로컬이 된다. 지금의 우리가 ‘영화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바로 로컬리티다: 이 물음은 짧게 짚고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지만 여기서는 ‘로컬’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고자 한다. 오늘날 로컬은 취향의 문제가 되었다. 무엇이 로컬인지를 알 수 없게 된 이 시대에서 로컬리티라는 것은 말 그대로의 상품이 된다. 즉, 취향을 영토화한 것이 바로 상품이다. 사람들은 오렌지 주스가 아니라 오렌지 맛이 나는 설탕물을 마시고, 콩으로 만들었지만 소고기 맛이 나는 햄버거 패티를 삼킨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비용상의 문제, 이념상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더 심각한 미래가 우리에겐 아직 남아있다. 그건 바로 원본이 사라진 시대이다. 기 드보르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것들에 대해 경고했던 이래, 원본의 가치는 곧 ‘취향’이 되었다.


원본의 가치가 취향이 된 사회는 <매트릭스>의 1편에서 사이퍼가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이퍼는 가상 세계인 매트릭스에서 만찬을 즐기는데, 아무리 맛있다 한들 이것이 일종의 기만에 불과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퍼는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살아가길 원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매트릭스의 바깥에도 원본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은 오직 매트릭스 안에만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국영화의 바깥에서 한국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라는 말은 일종의 취향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우리가 한국영화를 찾아 헤매는 일은 이미 사라진 원본에 대한 좌절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마치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유니콘처럼 말이다. 


 우리는 ‘한국’ 영화가 자기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원본을 대체한 상품들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영화가 아니라 한국적인 것에 관한 영화만을 만들 수 있고, 또 소비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본 없는 사회란 취향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런 사회에서 취향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것들에 의해 본래 위치를 빼앗기고야 만다. 따라서 나는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영화를 ‘영화적인 것’으로 지칭해보려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영화란 ‘한국적인 것’을 표방하는 영화를 의미한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원본에 대한 의심이 자리한다. 국가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오늘날 한국은 하나의 네이션이 아니다. 오늘날의 영화는 다양한 이념과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때의 무대는 다름아닌 세계다.  


나는 지금 한국영화를 ‘한국’의 영화가 아니라 ‘한국적인’ 영화로 보자는 들뢰즈식의 주장을 하고 있다. <승리호>에서 중요한 건 한국영화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무엇을 한국영화로 생각할 것인지다: 우주시대를 그린 <승리호>에서 로컬이라는 단어는 두 개의 뜻을 함축한다. 첫 번째는 지구와 화성 간의 관계이다. 지구가 모든 이들의 로컬이라면 화성을 비롯한 우주는 더 나은 세계, 넓은 장소로 묘사된다. 즉, 우주는 월드와이드(Worldwide)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언어와 인종에 관한 문제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들은 국적과 인종이 다양하지만 서로 간의 소통에 별다른 문제는 없다. 귀에 달린 통역기가 그들 사이를 실시간으로 매개하기 때문이다. 즉 이 통역기는 그들의 언어가 아무리 다르다 해도 의사소통을 해줄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이다. 


핵심은 이들이 사용하는 게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즉, 이들이 사용하는 건 ‘공용어’가 아니다. 보통 이런 영화라면 영어를 세계 공용어로 내세울 법도 하지만, <승리호>는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람들의 언어를 보존하고는 그 사이를 무언가로 채우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위에서 영화 언어의 진화를 제기했던 대목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영화가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없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통하기 마련일 테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언어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영화를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어야만 영화 담론은 비로소 풍부해질 수 있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의 생각이 어떤 언어를 구성한다면, 우리의 생각은 늘 다양해야만 하고 그것들을 통역해주는 기계가 바로 영화가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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