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살아있는 사람들에 본능적으로 빠져 있었고 그들의 영혼을 탐색하고자 했다. 에이젠슈타인이 전함 포템킨의 영혼을 탐색했던 것처럼. – 푸도프킨 –
1.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는 방법이 여럿 있지만, 시각의 분과에서 그것은 은폐와 탈은폐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직설적으로 말해,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을 불신한다. 유령에 대한 공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신의 대표적 사례이며, 신에 대한 믿음을 어떤 물질로 변환해 포획하고자 하는 시도는 신뢰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둘은 상보적 관계이기도 하다. 은폐는 의지와 표상의 세계로부터 탈은폐되어 있으며 탈은폐는 진실과 거짓이 추구하는 지향적 가치를 은폐하려고 든다. 바꾸어 말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은 수면으로 떠오르는 걸 막는다. 그래서 우리는 은폐와 탈은폐 모두의 사례에서 그안으로 진입하려는 시도를 마다해서는 안 된다. 은폐는 자체로서 지평으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탈은폐 또한 대양과도 같은 표면을 갖는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하늘과 땅이라는 지역의 경계일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도 유령은 있고 땅에도 유령은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의아하게 여기게 될 대목이 있다면 ‘바다유령’이라는 존재를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바다가 인간의 터전이 아니기에 그런 것일까? 아마도 그렇다.
바다는 거대한 무인지대로서 인간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 무법지대(No mans land)이기도 하다. 인간의 법은 지표면의 1기압에 맞춰져 있기에 물밑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바다를 통제불능의 지역인 무의식과 신화의 지대로 만들었다. 이때 무의식의 잔영이 표면으로 상륙한다는 충동적 표현은 확실히 옳다. 하지만 이 경우 대기 중의 유령이란 말은 다름 아닌 바다로부터 기원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우리가 바다에서 바다유령을 목격한 적이 없다는 게 아주 이상한 사실로 남는다. 먼저, 유인지대를 둘러싼 법도를 유유히 통과하는 이 유령들은 보존과 보호의 논리로 작동하는 유법을 탈은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투명화한다. 즉 유인지대에서 법이란 기본적으로 은폐된 상태이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에 보호를 받고 있다. 은폐된 법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문자라는 증서이고, 이 증서가 보증하는 건 어디까지나 법의 힘이 가닿는 영역이지 힘이 작용하는 원리의 유형이 아니다. 말하자면 법이란 우주를 설명하는 별자리이다. 그는 성좌를 엮음으로써 우주에 대한 낭만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우주에 대한 낭만은 존재의 고독에 대한 감정을 뭍으로 돌려놓으려는 인과를 갖는다(<콘택트>). 하지만 바다는 법과 교리에 소속된 것을 완강히 거부한다(<인터스텔라>). 바다에서 생명체가 기원했다면 그곳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은 문자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보면 바다에서 문자가 된 것 중에는 육지에 오르지 않고 잔류한 이들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바다를 하늘로 데려다 놓은 우주를 동경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별자리를 발견했고 이 별자리는 법과 교리이다. 결국에 우리는 우주를 통해 바다를 유인지대로 만들려는 테라포밍을 시도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 가정되는 게 바다유령이고, 여태까지 육지에서만 유령을 목격해왔던 우리는 바다유령을 탐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우주에 전초기지를 세워둔 것이다. 따라서 바다는 육지와 마주한 지대임에도 우주를 경유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곳임이 밝혀진다. 이는 현실에서 남한이 사실상의 섬지대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다에 빠진 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곳은 무인지대이고 우리의 정보력이 통하지 않아서 그 자체로 하나의 소도, 의식과 법이 파면되는 무의식과 신화의 영역이다.
2.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은 항구-물밑에 정박한 포템킨 호의 이미지에서 미끄러지는 잔상을 발견한다. 여기서 에이젠슈타인은 인간의 역사, 육지에 상륙한 법도에 하나의 낭만을 보내는데 그것은 바로 물질이다. 단상 하나, 필름은 멀리서 볼 때 선형적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단편적이다. 필름은 멀리 있을 때 원형태로 존재하며 뒤에서 앞을 향해 빠르게 롤아웃 된다. 그러나 그것을 확대해 보여주는 스크린에는 원형태가 아닌 몽타주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때 원형태가 클로즈업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운동 에너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여기서 사라진 에너지는 스크린이라는 우주에 성좌라는 형태로 고정된다. 인간의 육지와 스크린이라는 우주 사이에는 대양이라는 무법지대가 있다. 현실 세계와는 달리 그에 대항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에서는 대양을 보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항’하기 위해 성좌가 생성된다. 예컨대 에이젠슈타인의 충돌 몽타주는 법과 교리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발견되는 건 의미의 생성이 아닌 발견이다. 그것은 은폐되었던 것을 탈은폐하는 것, 인간의 땅에 부여된 문자라는 증서, 대양으로 돌아가 바다유령을 사냥하고자 하는 ‘전함 포템킨’의 위대한 항해이다.
몽타주의 간극에 어떤 것이 자리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곳은 거대한 우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양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다=무의식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키지는 않는다. 충돌 몽타주가 남긴 항해의 흔적이 대양에 대한 반란이라는 점을 통해 순서를 역전시켜야 한다. 몽타주는 비트를 잘게 쪼개는 방식으로 흔적을 남기는 EDM처럼 쇼트를 쪼개는 방식으로 항해의 흔적을 남긴다. (콜라보, 매쉬업) 전함 포템킨 호가 바다로 나아가자 배의 후미에는 물보라가 얇게 저민다. 그러나 우리는 말 그대로 항해의 흔적만을 볼 수 있다. 이는 포템킨호에 GPS와 같은 현대 문물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연한 치레일지도 모른다. 충돌 몽타주는 영화의 고전이고 부딪히는 원자처럼 불변의 법칙으로 남았다. 현대 영화는 쇼트 융합, 쇼트 분열이라는 (원자력에 비견될) 쇼트 단위의 에너지 발전에 많이 의존한다. 역설적인 것은 가장 오래된 이 발명품이 가장 최신의 기술(記述)이라는 점이다. 충돌 몽타주는 발명 이래로 발전하거나 변형되지 않았다. 그것은 영화의 근본이다.
여기에 우리가 이 항해를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이 있다. 하나는 항해의 지난 길에 경로를 그려보는 내삽법이고, 다른 하나는 항해의 남은 길에 좌표를 찍어보는 외삽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의 사례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인간과 영화 모두에게 영원의 문을 여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예언은 실질적으로 불가하거나 혹은 실효성이 없다. 이곳에 예언자가 있을 자리는 없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건 항해의 경로이다. 물 위에 저미는 것들은 잘게 쪼개지는 시간이며 우리가 현재조차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은 여기서도 공공연한 사실로 입증된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우리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법도라는 사실은, 비교적 외면되거나 간과되어 왔다. 우리가 함선의 진행에 확신을 가지려면 끝없는 지평을 보기보다 운동 에너지의 잔영에 천착하는 게 옳았다. 그래서 이는 덧없거나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지극히 합당한 관측이다. 반대로, 그렇게 남겨진 대양의 흔적으로부터 밤하늘의 별자리를 추론해내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대항의 성격이다. 별자리는 어딘가로 향해야 함을 말해주는 GPS가 아니라 운동 에너지의 잔영을 기록하는 보드판이다.
3.
몽타주를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생성된 우주, 무의식은 아니되 신화이기는 한 것, 죽음을 예지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별자리의 틈새를 관통하는 것은 의식이다.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을 붙들 수 있는 건 오직 지금 당장의 관측이다.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는 건 운동 에너지가 그를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주마등을 뒤따라가는 우리는 운동 에너지의 잔영이다. 이를 역산하여 스스로를 별자리이자 보드판이라 칭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기록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기록을 눈으로 목격한다. 이 기록은 몽타주가 남긴 항해의 흔적을 나란히 병치해 보여줌으로써 한눈에 들어온다. (콜라주, 브리콜라주) 그러니까 우리의 최종 목표는 영화라는 거대한 우주, 죽음이 아니라 바다유령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함 포템킨이 우리에게 남긴 영화적 사례이며, 그들이 육지에 상륙하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리얼리즘에 빠진 우리는 우주를 경유하지 않으면 현실에 다다를 수 없는 처지에 놓였고, 그에 대한 해법은 대양을 테라포밍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포템킨 호의 반란은 충돌하는 힘이 아닌 발견하는 힘이 된다. 즉 A의 쇼트가 B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건 그다음의 C 기호가 아닌, A의 후속이거나 B의 전속인 A1 혹은 B1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몽타주의 종말은 스크린의 종말과도 같다. 영화의 재생이 끝나면 우리는 배의 후미를 돌아볼 수 없다. 대양에 대항하는 성좌는 대양 없이 홀로 남겨질 때 그 의미를 잃는다. 왜냐하면 현실-육지로의 상륙은 포템킨 호의 종말과 같기 때문이다. 현실의 역사에서 포템킨 호는 위대한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영화: 열차가 도착하는 역사(驛舍)에서 포템킨 호는 파편과 잔상으로 남아있다. 시오타 역사에 도착한 철마를 대신해 포템킨 호는 박살났다. 유모차는 아래로 끌리고 여인은 피눈물을 흘린다. 이 쇼트 구성에서 군인과 아기의 병치는 여인의 피눈물을 예언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예견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바다로 나가 바다유령을 잡으려 했던 포템킨 호의 여정을 우리가 이어받는다. 바다는 분명 인간의 터전이 아니지만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그곳을 향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찾는 바다유령이 망자-유령이라는 탈은폐인지, 아니면 육지에서 도망친 죄인-무인지대로의 은폐인지 알 길은 없겠지만. 선원을 집어삼킨 것은 바다에 대한 낭만이 아니라 그곳에 두고 온 한 마리의 고래였기에 그렇다. (『모비딕』)
영화사라는 거시적 흐름 안에서 영화는 러닝타임이라는 미분적 역사를 지니며, 그곳에는 쇼트의 항해 과정에서 잘게 부서진 잔해가 성좌로 자리한다. 여기서 우리가 바라보는 건 아름다운 성좌이지만 성좌의 구성원이 숨기고 있는 의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간과해왔다. 그렇게 간과된 것이 우리를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주었던 법도였으며, 우리는 충돌하는 쇼트에 의존해 영화 자원을 획득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 에너지의 대안은 없는 것일까? 충돌의 힘은 미끄러지는 관성에 의존하므로 총구를 떠난 순간 통제력을 잃게 된다. 문자라는 증서,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너머로 사라진 우주선은 치외법권 지대인 바다에 빠지게 된다. 이쯤에서 세상을 돌아보면 우리가 왜 영화의 바깥만을 탐색하려 했는지가 궁금해진다. 바다와 우주는 우리가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여건이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지구의 안과 밖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이를 반대로 이야기하면 영화의 법도를 정착시키려는 시도는 어디까지나 열차가 지닌 태초의 관성에 의존해 왔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은하철도인가?)
4.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전함이 우주에 나갈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주전함이 아니다. 우주로 나가는 건 멜리어스의 역할이었고 그의 달나라 여행은 원주민에 의해 테라포밍에 실패했다. (<달나라 여행>) 허나,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이 인간이 우주를 정복할 수 없다는 식으로 되어선 곤란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주마등의 종착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주마등이 남긴 잔영은 필름이 롤아웃되는 운동 에너지의 여분이며 그곳엔 우리가 흩어지는 물결을 붙들고 있다. 이쯤에서 흩어진 지금, 순간을 무의식으로 기록하려는 시도가 성좌이고 그런 성좌에 의존해 우리는 역사의 한 지점을 예견해 보려고 시도한다. 요점은 바로 그 시도에 있다. ‘정복할 수 없다’가 부정사로서 탈은폐에 대응한다면 ‘시도한다’는 긍정사로서 은폐에 대응한다. 그러니 우리가 은폐를 시도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미래 설계의 한 조항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충돌 몽타주의 형식은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밖으로 밀려난 위법자들이 현실 분해의 척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부정적 사실이 드러난다. 필름은 스크린에 닿으려 하지만 이 시도가 단지 영화적 관성에 의한 것일 뿐은 아닌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첫 번째, 우주를 향한 관측 시도가 모든 것을 기록하려는 순간 포착의 성질이라면 그곳에 유령이 탄생하는 건 필연적이다.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필름과 스크린 사이를 매개하는 우리에게서 이탈한 것, 엑토플라즘(ectoplasm)이라는 나의 잔여물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관측자에게서 자원을 얻어 힘을 얻는 영화라는 유령은 인간에게 길들여진 생명들처럼 시간 편향을 갖는다. 고양이의 시간이 주인의 시간에 종속되는 것처럼 시선의 투입이 갈라놓은 시간의 영혼은 항상 우주로의 틈입을 갈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좁혀질 수 없는 시간의 간극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미분된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적층해 둔 필름들이 과연 우리의 시야로 좁혀질 수 있는 것일까?
영화라는 새까만 우주가 아니라 영화들이 공존하는 생명의 정수, 대양으로 선두를 돌리는 게 우리의 생에 필요하다. 균열의 자리에 격정적인 시선을 보낸다고 해서 메시아가 이곳에 불려 오는 것도 아니고, 영화의 법도를 새로 쓴다 해서 무법지대를 온전히 수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영화의 안쪽도 미처 다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외부에 대한 동경만으로 배를 띄우는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바다에는 유령이 살고 있고 그들은 진공상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유령이 아닌, 깊은 수압으로 인해 졸망히 쪼그라들어 있는 원형태이다. 클로즈업이 지배하던 과거에서 ‘줌인’이라는 탐색의 가능성이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의 우리가 멀리 보기를 행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멀리서 볼 때 잔상을 남기지만 가까이서 볼 때 끊어지는 건 (채플린의 말을 빌어) 아주 성대한 희극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