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의 중심에서 오늘날의 영화 관람을 말하다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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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영화관람이 점점 더 극장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지적하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기에, 발언하기 전에 한 번쯤은 숙고를 거칠 필요가 있다. 티브이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도 영화가 몰락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고, 비디오를 통한 영화 관람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도 영화 산업 전반에 걸친 우려가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길을 찾은) 인터넷 시대의 영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어쩌면 우리가 영화에 대해 보내는 우려는 영화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로 행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을 찾는 게 일종의 유희거리가 된 현재의 멀티플렉스 환경에서는, 밖으로 나가 지인과 약속을 잡아 방문하는 곳이 바로 영화관이니 말이다.


단순히 본다는 것만으로는 모니터 안을 들여다보아도 좋겠지만, 보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욕구도 있다. 디지털 시대에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런 의미를 지닌다. 카카오톡이나 이메일과 같은 비대면 방식의 접촉이 약속을 잡고 현장에 나가는 것보다 훨씬 편리함에도 우리는 밖으로 나간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에 어떤 이유도 덧붙일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문자나 전화로는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어서가 아니다. 문자라면 몰라도 전화통화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음성으로 전달할 수 있다. 영상 통화의 경우라면 표정이라는 비언어적인 부분까지 표현할 수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는 것일까.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왜 영화관에 방문하는 것일까.


사람에 대한 만남이기에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게 옳겠지만, 여기서 나는 내가 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다. A 평론가는 영화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 극장에 갈 여건이 안되어서 영화사로부터 디지털 파일을 제공받았다. 그러자 그의 주변인들은 “무슨 평론가가 극장도 안 가고 영화 글을 쓰느냐”고 A를 타박했다고 한다. B 영화 교수는 자신이 프랑스 유학 시절에 자주 놀러 갔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주 :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보관소로, 영화 역사와 함께한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를 언급하면서 “이곳에 다녔던 경험이 영화관이라는 장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놓았다”고 말했다. 그는 <잔다르크의 수난>과 같은 무성영화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요한 영화관 안에서 ‘바라본다’는 경험이 정말로 특별한 경험이었다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A 평론가가 다른 사람들에게 타박을 들은 것도, B 평론가가 유학 시절에 깨달은 것도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아야 한다.”는 감각이었다. 그렇지만 그 둘의 감각은 맥락적으로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A의 시선이 영화에 대한 관습을 의식한 것이라면, B의 체험은 영화라는 관습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깨우친 것이었다. 물론 A 평론가에게 영화를 모니터에서 본다는 건, 그로서는 중대한 실험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고 보수적이 될수록 그동안의 관습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의 시도가 시사하는 바는, 영화관이라는 게 사문화된 조항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게 영화관은 최소한의 도덕이라 여겨졌지만, 요즘 시대에는 개봉조차 하지 않고 온라인에 올라가는 영화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의 대표격은 넷플릭스를 둘러싼 영화인들의 대립이며, 우리 주변으로 눈을 돌려보면 IPTV와 VOD 서비스로 빠르게 가고자 극장에 단 하루 개봉했다가 내려버리는 몇몇 싸구려 영화들이 있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가 예전 영화를 찾아보려면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극장이 아닌 기타 매체로 보게 되는 것도 그런 현실 중 하나이다. 고전영화는 한때 영화관에서 개봉했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을 영화관에서 볼 방법은 없다. 가끔가다 영상자료원과 같은 곳에서 ‘특별’ 상영을 하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 되었다는 점부터가 영화애호라는 행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영화관을 벗어난 영화는 마치 박물관에 있는 멸종생물의 모형과도 같아서, 외견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안다 해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멸종된 생물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전에 남겨두었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반대로 보면 그런 기록을 거치지 않고서는 해당 생물을 목격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시간의 저편이라는 인과의 바깥 부위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매 순간이라는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시간 안에서 목격되지 않은 것들은, 시간의 저편으로 넘어가 우리의 기억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영화관에서 실시간으로 상영되는 영화를 목격하지 못한 우리에게 그런 영화는 시간의 저편으로 넘어가 잊혀져 버린다. 물론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상 매체이고 육체를 지니지 않았기에 멸종된 생물과 일대일로 비교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관을 필요로 하는 영화라는 개념을 몸을 필요로 하는 영혼이라는 것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물음은 육체 없이도 영혼을 믿을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따분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여기서 사례 하나를 들어보고 싶다. 얼마 전 한국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는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이를 모델링하여 VR로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아이의 부모는 생전에 아이를 촬영해두었던 비디오를 제작진 측에 제공하였고, 이를 토대로 제작진은 아이의 신체와 목소리를 디지털 파일 형태로 구현하였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역사적, 사료적인 측면에서 아이를 기리고자 하는 마음에 의거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이의 부모와 아이를 VR 공간 안에서 재회시켰다. 이 순간은 부모에게 죽은 아이와 재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시청자에게는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몇몇 시청자는 죽은 아이를 그렇게 해서까지 만나고 싶으냐고 비판했다. 과격한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러한 행위가 ‘시체팔이’가 아니냐고 그들은 말했다.


해당 시청자들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죽은 사람을 디지털로 구현해 현실에서 만난다는 개념이 다소 생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겐 아직, 영혼에 대한 믿음만이 있을 뿐 육체에 대한 믿음은 없다. 이는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영혼에 대한 믿음, 속세로부터 영혼을 불러내어 대화할 수도 있다는 제의적 행위에서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건 아주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영혼을 불러내어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대로 말하면 육체는 사망하면 끝이기에 그만큼 소중히 여겨야 했음을 지적해볼 수 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 영웅의 최후가 늘 승천으로 끝났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헤라클레스는 불에 타고 남은 신체로부터 영혼이 빠져나간 후에, 올림푸스의 신이 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는 망자가 돌아올 육체를 ‘보존’하는 의식이었으며, 중세 유럽에서 뱀파이어 설화는 망자들이 현세의 육체로 되돌아오기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육체의 노화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행위처럼 여겨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시간으로 이곳에 존재하면서 목격되는 육체만을 믿는다. 이때 실시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실시간으로 늙어간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은, 늙어감으로써 끝내는 사망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인간이 아닌 것을 묘사할 때 주로 부여하게 되는 속성이 바로 불사이다. (울버린의 힐링팩터 능력 상실을 다룬 영화 <로건>에서, 울버린이라는 캐릭터에 노화를 부여함으로써 영화 전반에 뿌려지는 속성이 ‘인간성’이라는 점에서도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울버린은 육체의 강인함으로 인해 영혼을 타임리프*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영웅이기도 했다. [*엑스맨 : 데이 오브 퓨처 패스트])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위의 사례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몇몇 대중의 삐딱한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아이는 늙지 않는다. 늙지 않으니 죽지도 않는다. 이를 질병의 측면으로 바라보면 암이라는 게 세포의 무한한 분열이라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세포 분열하지 않으면 암에 걸릴 일이 없는데, 실시간으로 세포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에, 암은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질병이다. 인간의 육체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에 의해 살아있음을 증명받는다면, 암은 육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비극적인 증표와도 같다. 따라서 아이를 사이버공간, 정지된 곳에 가두어 놓는 행위는 아이를 전혀 살아있게 하지 못하며, 만약 그것에서 무언가 감정을 느낀다 하여도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희극의 뒤에 ‘어쨌거나 돌아오지 못한다는’ 비극이 뒤따를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희극 속에서 비극의 요소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그걸 다 포괄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바라보기에 그것은 영화의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첫 번째로 영화의 수명에 관해서다. 보수적인 시선으로 영화의 생애를 바라보면 그들의 삶은 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기간에 그친다. 이제 막 걸렸다가 어느 정도 흥행하고 나면 극장에서 나가야 한다. 영화 제작이라는 자궁 내 성장 기간을 거치고 나서, 영화관이라는 육체로 풀려나 자신의 영혼을 마음껏 뽐내다가, IPTV와 VOD라는 디지털 저승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절차에 따라 위의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면 디지털 저승으로 향해 영혼을 불러오려던 부모가 육체의 부재로 인해 그를 데려올 수 없다는 슬픔만을 강조하는 게 되어버린다.


이는 마치, 오르페우스 설화를 디지털 버전으로 번안한 후에, 저승에 있던 에우리디케에게는 - 돌아갈 육신이 없기에 어차피 되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지하며, 만남의 순간에 다다른 오르페우스에게는 – 여태까지 자신이 한 고생길을 돌아봄과 동시에 마지막으로나마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기회를 부여한 것으로 해석한 것과도 같다. 그러니 몇몇 대중이 했던 ‘시체팔이’라는 비난은 ‘영 혼팔이’로 바꾸어야 용례가 옳을 듯하다. 시체는 싸늘하게 식은 육신을 의미하니 말이다.


이때 싸늘하게 식은 육신은 관객이 떠난 영화관의 온도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떠나 텅 비어버린 공간뿐만 아니라 영화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죽었고 더는 이곳에 없다. 영사기에서 실시간으로 흘러나오던 따스한 빛들을 더는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영화의 죽음을 생각해보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이를 안아볼 수 없다는 것, 육체의 따스함을 느껴볼 수 없다는 게 지금 우리가 느끼는 슬픔의 요지이다. 그리고 떠나간 영혼을 디지털 – 저승으로부터 거두어들여 이곳에 구현했다는 게 그들 비난의 이유이다. 구현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따스함을 지닌 육체를 영혼에게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영혼팔이라는 것이다.


육체를 떠나간 영혼이 다시금 육체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돌아올 것이라면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디지털 시대에 잊혀진 고전영화들에게 ‘따스한 육체’를 부여하려는 몇몇 시도를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는데, 디지털 시대에 고전영화를 보는 방법은 토렌트나 유튜브밖에 남아있지 않고, 그들이 극장에서 상영될 때의 따스함을 우리가 더는 느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위의 사례에서 B 영화 교수가 느낀 감정이 아마도 그것일 테다. 분명하게도,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영화의 어떤 면모가 있는 게 사실이고, 이것은 영화관이라는 장소에 ‘굳이’라는 의문사를 부를 수도 있는 생각이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듯이 영화관이라는 장소에 달려가지 않을 이유 또한 없을 것이다.


굳이 영화관에 가야만 영화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고전영화 관람은 온라인이 아니라면 힘든 일이기도 하다. 원래라면, 고전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디지털 저승으로 향했으니 다시는 불려 올 일이 없어야 했다. 잊혀진다는 소리다. 그런데 디지털 저승에서 망자들을 꺼내올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토렌트와 유튜브 서비스에서 고전영화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때 토렌트를 통한 고전영화 파일의 다운로드는 파일을 조각내 분할 전송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디지털 저승에 있는 영화들은 정신적인 분열의 상태로 우리를 찾아오고 다시금 조합된다. 그래서 혹자는 그렇게 영화를 본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 단순히 영화관의 문을 두드린다는 문제가 아닌, 삶과 죽음의 존엄에 관한 예우이자 담론을 말하는 것이다.


기술복제시대는 복제 기술의 발달이 우리가 그들을 언제든지 안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하면서 다가오는 시대를 긍정하지만, 그렇게 차가운 육체 사이에서 발견한 단 하나의 따스함만이 우리에게는 가장 진솔한 원본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를 ‘바라본다’는 경험 자체보다는 그들에게서 돌려받은 온기야말로 영화 경험의 모든 것이다. 그러니 위의 사례에서 A 평론가에 대한 주변인들의 비판은, 사람을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일 처리를 한다고 면박을 준 것이리라. 인터넷 서비스가 발달하고 비대면으로 할 수 있는 일의 범주가 넓어졌다 하여도, 사람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상대방과의 신뢰형성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 형성이 B 영화 교수가 말한 ‘영화관이라는 장소에 관한 인식’일 테다. 문자와 전화로 사랑을 속삭인다 하여도 단 한 번의 현실 만남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현실이 주어져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육체는 바로 이곳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늙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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