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클라크가 남긴 세 개의 법칙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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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F 소설 작가이자 미래학의 권위자, 아서 클라크가 남긴 세 개의 법칙이 여기에 있다. 제 1 법칙. 나이 든 과학자가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경우에는 거의 확실히 틀렸다. 제 2 법칙. 가능의 한계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불가능으로부터 조금만 더 나아가보는 것이다. 제 3 법칙. 어떠한 과학기술이라도 충분히 발달했다면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법칙은 과학기술이 보여줄 미래를 우리에게 지긋이 암시하고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 걸쳐 언급되면서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그 넓은 지평중에 하나를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우리에겐 영화로의 적용이 흥미롭게 다가올 것 같다. 이를테면 제 3 법칙을 다음처럼 새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제 3 법칙. “어떠한 기술적 쇼트라도 충분히 발달했다면 마법처럼 느껴진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고, 그 기술의 발달이라는 게 영화 외부의 변천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을 연역 해볼 수 있다. 이 부분을 알아보기 위해 영화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시오타 역에 도착한 열차의 모습이 프랑스의 어느 카페 지하에서 영사기를 통해 상영되었을 때, 그것은 시공을 초월해 도달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이 사실은 너무 많이 언급되어서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의미가 크다. 영화가 등장하기 전에는 영상(Image)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셈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눈이 어떻게 ‘영상’을 만들어내는지를 몰랐다. 구체적으로는 안구의 원리가 무엇인지도 알았고 빛을 통한 감광판을 제조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오직 정지된 상을 그려내는 것에 불과하거나 원리적인 이해에 불과했다. 예컨대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이 데카르트를 통해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영상에 대한 생각은 영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최초의 열차가 오늘날에 ‘영화’라고 불리는 매체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사후적으로’ 붙인 생각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두고, 영화에 대한 생각이 아닌 영상에 대한 생각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말하자면 영상의 출발지점을 지적하는 것은, 영상이 분화하는 현대 사회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고 영상은 뮤직비디오와 어떤 차이가 있고, 영화라는 매체는 티브이와 어떤 차이가 있고, 실사 영상과 그림 영상(애니메이션)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와 같은 문제를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오히려 어떤 감각을 주는지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영상은 본래 감각으로부터 출발했으며, 그런 감각이 우리를 ‘마법’에 휩싸이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2차 성징을 겪으면서 느꼈던 사춘기의 감정과도 유사하다. 또는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았더니 그 안에 있는 낯선 이에게 이질감을 느꼈을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삶에 대한 어떤 목격담을 훗날 다시 보게 될 때, 그때의 자신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계속해서 비교하게 된다는 점이다.


젊은 날에 찍은 내 초상을 노년이 되어 다시 볼 때,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에는 젊은이가 있지만 그것을 보는 건 늙은 육체라고 말이다. 예컨대 나라는 주체의 정신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는데 사진 안에는 지금의 나와는 명백하게 다른 ‘낯선 이’가 있다. 이때 우리는 나의 반대편에 자리한 낯선 이에게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정신으로 살아왔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신체의 변화를 눈으로 감지한다면, 그 변화는 몸이 아니라 눈에 찾아온 게 아닐까?


신기한 점은 신체의 변화가 영상이라는 매체의 본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영상은 수많은 정지된 상들의 연속이거나 연역이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처럼 시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 그들 또한 정해진 롤 안에서 늙어 간다고 할 수 있을 테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음 지점으로 생각이 닿게 된다. 영상을 이루는 하나의 주된 축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일 테다. 그렇다면 영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신체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는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목격하고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이다.


2.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소피는 마녀의 저주에 걸려 노인의 모습을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이것은 마법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늙는다는 건 몸에 갇힌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평상시에는 서서히 진행되기에 모르지만, 젊음의 한 때와 지금의 나를 한 자리에 놓고 보면 그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사실 소피의 늙음은 마법에 의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 늙음을 목격한다는 마법을 선사하기도 한다.


또는 이 기묘함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벤자민은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아기의 모습으로 ‘늙어간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젊음과 타인의 늙음을 매 순간 경험한다. 즉 벤자민의 노화는 다른 이들과 다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벤자민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어떤 대상, 이를테면 영화라는 이가 우리처럼 늙어가지만 반대로 그는 영화이기에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늙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전체를 견인하는 주체가 무엇인지를 제쳐 두고서라도, 나라는 주체가 그곳에 대입된다는 상상만큼은 피할 수가 없다. 가정하자면 이런 생각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와 죽기 직전에 나라는 사람의 정신이 또렷이 살아있지만, 그 시작과 끝에서 우리가 우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우리가 육체에 내내 갇혀 있었기에 어느 지점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보면서 그것들 모두가 나라는 한 사람에 의해 관찰되어졌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에 대해 그 삶의 시작과 끝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니 그 두 가지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영화라는 매체는 우리에게 마법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그 마법이 환희인지 비탄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오즈의 나라에 착한 마녀와 나쁜 마녀가 공존하듯이, 그 마법이란 게 긍정과 부정 중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선과 악이라는 게 상대적 개념이라는 걸 떠올려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마법의 성질이란 더욱 모호해진다.


여기서 영화는 자신의 근본인 영상의 성질로 몸을 숨긴다. 우리가 늙어가며 안구가 흐릿해지듯, 시각은 모호해지고 이미지가 맺힐 망막은 하얗게 질려버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육체의 눈보다는 마음의 눈에 더 의지하게 된다. 속된 말로, 늙음이 현명함을 체득하는 과정에는 ‘자신의 근본이 신체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우침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영화의 늙음을 목격하는 것에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작용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늙음의 현명함이라는 게 과연 마법 같은 일인지를.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 마법과 분간할 수 없다면, 죽음으로 향하는 ‘고도화된’ 이가 자아내는 모습은 거의 마법과도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죽음이라는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의 성숙함에도 대응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을 두고 성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이게 너무 감성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신기하게도 영화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이 마법과 분간할 수 없다고 말했던 아서 클라크의 대목과도 정반대이다.


우리의 생각은 다음으로 닿는다. 과학기술이란 게 기본적으로 차가운 인상을 주는 분야이지만, 과학기술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뿐 그 본성은 몹시 따스하다. 아니, 따스하다기보다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기술만능론이 아니다. 기술이 모든 것을 해줄 수는 없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 또한 따스해지고 그래서 차가운 기술을 보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술이 어떻게 발전해도 그걸 다루는 건 인간이기에 인간이 대단하다거나 하는 식의 인간예찬이나 기술긍정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우리의 눈이었고, 그 영상이 자아내는 마법이 우리의 눈에 근접해질수록 우리라는 존재는 더욱 세상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뜻이다.


3.


아서 클라크의 제 2 법칙은 가능의 한계를 알기 위해 불가능으로부터 조금 더 나아가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실험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대표적으로 장 뤽 고다르나 앤디 워홀과 같은 이들이 있다. 이 영화들은 확실히 재미는 없고 심지어 딱딱해 보이기까지 한다. 미술관에 걸리기도 하는 영화이니 어찌 보면 고상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가능의 영역이 아닌 불가능의 영역으로부터 가능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형태를 취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너무나 큰 낭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맨티스트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여기서 불가능의 영역을 향하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탐험이 아닌 귀환의 판타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즉,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목격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런 그가 살아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큰 슬픔을 우리에게 제공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는 우리는 말해서는 안 된다. 사실 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서 클라크의 1 법칙, ‘그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경우에는 거의 확실히 틀렸’기 때문이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이것이 기술만능론을 말하는 건 아니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정말로 죽었다가 살아온다 하여도 그사이의 단절된 기간은 전에 알던 인격과 지금 인격이 동일하다는 점을 확증하지 못한다. 예컨대 어제의 내가 잠자리에 들었다가 오늘 아침에 일어난다면, 어제의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복사해 ‘오늘’ 만들어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즉 시간선이 다른 것이다. 굳이 육체가 갈라지지 않더라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정신적인 면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을 때, 그 둘은 내가 한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루마다 시작과 끝을 반복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것이 영화와 우리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근본으로 올라가면 약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화의 근본은 영상인데, 영상은 매 순간 우리의 눈 안에 구축되는 것이라서 시작과 끝이 따로 없다. 그러니까 위의 가정에 따르면, 우리에게도 영상이란 게 있고 그것은 시작과 끝이 따로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시작과 끝의 차이를 한 자리에서 모아보는 게 바로 마법이니 영상으로의 상승은 마법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말을 이어보고 싶다. 영화가 마법이라고 생각했던 최초의 시대가 있었다. 그게 바로 시오타 역에 도착한 열차다. 그런데 영상으로의 상승은 마법으로부터의 탈출과도 같다. 말하자면 우리가 삶과 죽음을 초월한 무언가가 되는 과정에는 영화를 더는 기술로 생각하지 않는 사고가 필요하다. 영화를 기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마법이 아니게 될 테고, 마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라진 마법을 찾아 헤매거나 또는 그것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여기서 다시 안구를 불러내고 싶다. 영상은 우리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로 들어온다. 그런데 이 눈이 사라지면 우리는 더는 살아가지 못한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고, 눈을 잃으면 신체의 9할을 잃은 것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눈을 잃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눈을 수복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부분이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 대응한다. 헬렌 킬러가 말했듯이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며, 이 축복은 분명 과학적이지만 그걸 모르는 우리에게는 단지 마법처럼 보일 뿐이다.


21세기의 영화는 과학기술을 통해 배우와 현장 없이도 현실 세계를 만들어내거나, 고도로 정교화된 CG로 모든 현실을 조작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여러 탐스러운 영화를 만날 수가 있었다. 여기에는 <아바타>처럼 거대한 블록버스터도 있고, <타이타닉>처럼 낭만을 담은 영화도 있다. 심지어 죽은 이가 출연했던 영화에서 모델링을 따온 후, 그것을 사후적으로 구축해 죽은 사람을 영화에 출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마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마법’은 우리가 영상의 등장 후에 사후적으로 붙인 것일 뿐, 그 근본은 영상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상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곳에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영상은 언제 어디서나 여러 형태로 우리를 찾아온다. 스마트폰에 있는 영상은 영화와 드라마, 또는 15초짜리 광고이거나 위아래로 스크롤 하는 웹툰이다. 다른 곳을 둘러보면 VR과 같은 서비스가 게임과 영화에 접목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영상의 홍수 시대에 글로 풀어나가던 인간의 인격이 방향을 잃고 선로를 이탈한 열차처럼 될 것이라고 비관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 마법과 같은 풍경이라는 감탄사가 아니라 이것 또한 그저 하나의 기술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이라는 풍경에 한탄하라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우리와 맺힌다(Mating)’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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