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본래 영화란 영화가 끝나고 나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그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정말로 즐거운 작업이다. 혼자서 생각하든 타인과 대화하든 간에 내가 본 현상에 대해 묘사하는 작업은 자신이 꾼 꿈을 도화지에 옮겨놓는 것처럼 몹시 즐겁다. 이때 혼자의 힘으로 그려지는 영화란 생각하는 게 동화가 되는 구현동화에 가까우며, 타인과 함께하는 영화란 세계에 도전할 동료를 구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당신은 퀘스트를 받아 용사가 되는 것이고 이에 그들은 파티원을 모아 마왕에 대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보통 두 갈래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준다. 하나는 본다는 것이고 둘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목격과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두고 다음과 같은 모습을 연상해볼 수도 있다. 아이에게 횡단 보도를 건너는 방법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표현, 목격하고 생각하고 길을 건너라. 아이는 노란 선 앞에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둘러본 뒤에 생각에 잠긴다. 영화를 본다는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스크린이 묘사하는 세계 앞에서 일단은 멈추어 서서 그 안에 무엇이 있으며 혹은 우리에게 위협이 될는지를 생각해 본다. 이것은 영화가 제시하는 건너편의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 작업이며 미지에 대한 탐구이다. 이때 그 여행길에서 만나는 동료는 그만큼 세상을 알고자 하는 사람일 테다. 그러니 우리가 영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 반가워하는 것은 지식의 갈구이기보다 이곳에서 만났다는 방향성 때문일 테다. 그것은 당신도 나와 같은 곳에 가고 있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눈에 담은 풍경이 당신에게도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다.
목격과 사유는 상대방의 눈을 목격하고 그 안에서 같은 꿈을 꾸는지를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영화 안의 카메라일 수도 있고 영화 안의 인물일 수도 있으며 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동료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목격담의 이면에 시야를 제어하는 인격이 있으리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게 카메라라면 감독일 것이고 사람이라면 사상일 것이며 세상이라면 자연의 원리일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영화라는 세상에 대해 물을 때에는 그 원리가 무엇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고, 그 안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서도 그를 구성하는 원리를 동일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말을 건넬 테다. 첫 번째로 세상을 구성하는 원리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구의 모습, 밤하늘에 빛나는 별자리의 끝없는 순환이다. 이때 그 원리를 받아들이는 신체의 모습은 발레에서의 손과 발끝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그런 신체의 움직임이 생각의 흐름, 시선의 이동으로 옮겨갈 때 카메라는 고개를 돌리게 된다. 요컨대 세상을 이루는 건 인간이고 인간을 이루는 건 사상이라는 점이 영화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두고서 태도라고 부른다.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어떤지를 묻는다면 대부분 예절을 먼저 떠올리고는 한다. 말 그대로 좋은 태도가 바른 예절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예절과 태도는 다른 영역에 있다. 예절이 바르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과 상대를 위할 줄 안다는 것이며, 반대로 말하면 그것이 관계가 아니라 관련일 때에는 얼마든지 바르지 않을 수 있다. 이때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듯하여 덧붙이자면. 관계란 양쪽에서 작용하는 힘의 역학이다. 내가 상대를 인지하고 상대도 나를 인지해야 비로소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나만이 상대를 일방적으로 바라볼 경우에는 스쳐 지나가는 같은 회사의 타부서 동료처럼 그저 큰 틀에서의 관련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쪽에서 이어지는 힘의 역학이 계속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일회적으로 관계를 소모해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 사이에서의 감정은 그러한 어긋남에서 온다. 단층이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충격파가 지진으로 돌아오듯 관계의 역학이 불균형해질 때 평온한 심신의 상태, 예절은 사라지고야 만다.
우리 삶의 아이러니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하는 몇몇 이들에게 영화는 쇼트와 리버스 쇼트의 조합이다. 이것은 정직하게 쇼트의 덧붙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이와 대답하는 이의 관계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미학이 곧 예절이며 그 예절이란 서로를 마주한다는 말과도 같다. 굳이 소개팅 자리에서처럼 잘 보일 필요도 없이 구로사와의 마지막 영화처럼 ‘다 숨었니?’라고 물으면 ‘아직이야.’라고 답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답변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그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A라는 의미작용의 쌍이 작품 안이든 바깥이든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어버린 목소리이고 그렇다면 바람을 맞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영화가 던지는 담론에 응답하여 사회적 실천을 하거나 주장한다. 또는 자신이 발견한 통로의 출구가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것이라면서 기묘한 리듬을 만들어내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리듬이 물체에 공명하여 다리를 무너뜨리기를, 즉 쇼트를 건드리면서 서사를 공명시키고 영화를 정복하기를 그들은 원한다. (그러니 영화에 대한 침략은 유성영화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재즈 싱어>의 우스꽝스러운 발놀림은 식민지를 걷는 군인의 발걸음과도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영화를 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태도인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정복이란 스페인의 침략자가 아니라 탐색을 위해 선발대를 보내려는 시도, 말하자면 영화로의 모험을 떠날 때 문제의 실마리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결론을 먼저 내는 행위이다. 결론을 먼저 내지 말라는 게 무척이나 당연한 훈계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영화의 결론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것을 멈추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의 끝은 죽음이고 마찬가지로 영화에는 끝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구태여 지적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영화를 대하는 예절이 일방향으로의 소통이라면 그것을 정복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말 그대로의 단절을 의미한다. 요컨대 예절만을 지켰을 때 만약 영화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테다. 당신이 나에 대해 파악한 사실들이 설사 맞다 하더라도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가식에 불과합니다. 이런 가식이야말로 우리가 영화에 보내는 애정이 그저 스토킹과 같은 범죄, 일방적이고 왜곡된 해석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일 테다.
멀리서는 즐겁지만 가까이서 볼 때는 두려운 것들. 희극과 비극에 관한 찰리 채플린식의 명언. 영화와의 관계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그들과 친밀해지기를 꺼리면서 가까이 다가가지를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비극이며 다르게 말하면 언제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태도이다. 그래서인지 허우 샤오시엔은 ‘영화는 세계를 대하는 예절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우리가 말한 용도와 본래의 용도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해 해당 발언을 하였다. 우리가 말하는 용례로의 예절법이란 일방적인 해석을 통해 영화를 타자화시키는 것, 즉 공손하고 환하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진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는 태도이다. 반대로 본래의 용도로서 예절이란 상대방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면서 차후에도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는 간접적인 의사표현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예절의 두 가지 사용법은 우리가 영화를 바라본다고만 생각했던 것의 영역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허우 샤오시엔이 영화에 보내는 예절을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다.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에는 길고 긴 롱 테이크가 전면으로 드러나면서 그 뒤쪽으로는 늘 무엇인가를 흘려보내고 있다. 이는 영화에서 카메라가 보고도 놓치는 것이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데, 그게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시대로의 항명인지 알 수 없다는 게 그 방식대로의 예절이다. 그러니 우리가 허우 샤오시엔에게 왜 아무 말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그런 흐름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하나의 예절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영화는 마치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돌아갔을 때 세상에 통감하면서도 패러독스 때문에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 여행이란 과거를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미래를 위해서는 그곳에 손을 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놓치는 것이자 놓아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허우 샤오시엔의 예절은 그 자체로 하나의 태도를 이루고 있다. 이 태도는 그가 어떻게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그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예절과 그 시대를 바라보는 사람의 예절을 한 자리에 모으려고 한다. 물론 그게 소통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다른 시간대의 만날 수 없는 자신을 타자로 설정해둔다는 게 그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 세상에 보내는 예절인 셈이다. 어쩌면 이 딱딱한 말 대신에 의지나 투지라는 식의 감성적인 표현을 쓸 수도 있을 테다. 그 말이 맞기에 딱히 거부할 생각은 없다만 아무쪼록 그것이 오용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예를 들어 영화를 찍는 사람이 교과서에 나온 내용대로의 카메라 쇼트를 충실히 재현하는 건 그에 대한 예절이 바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예절이 영화의 삶과 질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영화를 정석적으로만, 예절 바르게만 찍는다면 그는 그저 한 명의 테크니션에 불과할 것이며 그렇다면 이것은 성냥갑 아파트처럼 몹시도 맥없는 게 될 테다. 허나 우리는 그런 불상사를 원치 않는다. 영화의 전신이 된 사진기가 일방적으로 세계를 포착하면서 벌어졌던 우스꽝스러운 일들은 우리가 단순히 예절만을 갖춘다고 해서 좋은 태도인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었다. 예절 바른 질문과 답변은 우리가 세상을 일방적으로 바라볼 때 자문자답이 되어 버린다. 다르게 말하면 예절 바르게 던진 질문이 꼭 세상에 진실을 몰고 오는 것은 아니다. 즉 모나리자의 미소가 성모 마리아적 따스함인지 혹은 살인을 저지른 자의 희열인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영화란 고도로 응축된 예술인의 사고작업이며 그것을 단 한 번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든지 아니면 다른 타인과 대화하든지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소통은 꼭 필요하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영화가 스스로 답하지 않는다면 고개를 돌려 다른 이에게서 답변을 들으면 그만이다. 영화라는 세상이 답해주지 않는다면 현실 세상에 질문을 던지면 되는 것이고 카메라가 보여주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현실에서 리버스 쇼트를 찾으면 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영화 안에서도 벌어질 수 있지만 영화 밖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서로를 향한 오해는 대체로 허울뿐인 격식을 차리는 것에서 비롯되니 말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무조건적인 자국 옹호와 폐쇄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면 흥선대원군식의 결말을 맞이하리라 예측할 수 있을 테다. 영화에서의 고립주의는 자기 방식대로 쓰인 허울뿐인 예절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일방적인 예절은 타인에게 예절이 아닐 수도 있고 따라서 좋은 태도는 아니다.
머릿속으로 파악하는 관계의 역학이 실무에서 어떻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렇다면 실천해보는 게 가장 빠를 테다. 이때 누군가가 영화를 단 한 번의 관측만으로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우리는 비난하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잘못된 태도가 아니다. 영화를 한 번의 관측만으로 안다는 것은 인생을 한번 살았거나 혹은 태어나서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다른 곳을 보여주거나 배우거나 하면 될 일이지 편협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나라별로 다른 예법을 우리가 모두 익힐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무엇이 진심인지만큼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 영화와 세상을 보는 가장 좋은 태도는 쇼트와 리버스 쇼트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확답을 받으라는 게 아니다. 질문을 던졌을 때 확실치는 않아도 우리가 그곳에서 무엇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 호혜적인 가정을 해보라는 것이고, 그런 생각이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어떤 이득이 될 수 있는지를 진정으로 고민해보라는 뜻이다.
언젠가 현장에 나온 이들이 책상에 앉아있는 이들을 두고서 그들은 생각만을 할 뿐 정작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는 이론가와 운동가의 역할분담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카메라가 세상을 관조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어떠한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그런 태도를 보면서 자라난 우리만의 예절일 테다. 여기서 우리만의 예절이란 게 꼭 질문과 응답의 형식, 세상에 정답이 있다고 콕 집어 말하는 숨바꼭질이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운동이라는 것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내보이는 자신의 태도라면 그것을 보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예절일 테니 말이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기 이전에 세상이 나를 바라본다는 점을 명심하면서 이곳의 쇼트와 리버스 쇼트가 나라는 타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명심해야 할 사항 중 하나이다.
던지고 받는 이들, 그들은 쇼트와 리버스 쇼트처럼 떼러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론가와 운동가, 비평가와 감독. 언젠가 사람들이 감독이 되지 못한 이들이 평론가가 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운동하기가 두려워 이론을 공부하는 이들의 모습과도 일치했었다. 현장에 나간다는 것은 늘 괴리와 모순에 시달려야 하므로 비교적 순수성을 유지하는 이론에 몰두하게 되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또는 단순히 몸이 나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프랑수와 트뢰포와 박찬욱과 같은 실제 유명인들을 떠올릴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둘의 차이에 대해서는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론을 토대로 운동하는 것이니 운동가가 곧 이론가의 상위 호환인 것만 것 분명하지만, 개중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곧바로 전선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다. 물론 현실과 영화 사이에 무엇이 먼저 손을 내밀지를 구분 짓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허나 분명한 것은 비평가는 자신이 물음을 던질 세상과 사물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며 반대로 말하면 그들은 자신이 옹호하는 단 하나의 대상을 기필코 방어하려 든다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비평가라는 탐험가는 자신이 떠난 세상 속에 존재하는 나만의 보물을 골룸처럼 보존하려고 드는, 세상 전체에 질문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영화라는 것에 기생하는 족속이다.
비평가가 작품에 대해 자신이 본 것을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타인에게 영화에 대해 계몽하려 든다는 것은, 단순히 교육적인 측면으로만 본 이야기일 뿐이다. 그건 투입이 있다면 재생산이 있어야 하기에 요구되는 환류일 뿐이다. 무엇보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이 있어야 그곳으로의 모험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모험을 떠나던 와중에 감독이 말하는 비평의 본질에 대해 목격담이 들려오는 순간 영화는 숭고해진다. 늘 주장만 하면서 세계에 대한 물음을, 어쩌면 공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영화가 태세를 바꾸어 외부세계로부터의 공격을 받을 때, 정확하게는 그 태도에 관하여 꿋꿋함을 관철하면서 자신에 대한 예우를 갖출 때 영화는 숭고해진다. 그 방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한히 열려있던 영화라는 우주가 결국에는 하나의 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는 영화라는 개인이며 막연히 질문만을 던지기보다는 자신에게 답변을 돌려주면서 그 불확실함에 관해 연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그의 모습은 그가 틀렸든 맞았든 간에 숭고함에 반하여 지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요컨대 숭고한 영화의 미학이란 공손하게 환하게 웃는 게 곧 자신의 진심이자 나라는 타자에 대한 방어표시이면서도, 그에게 다가가려 한다는 적극적인 시도로서의 움직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