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다양한 정의를 내려볼 수 있고, 그런 만큼이나 비평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 합의를 이룬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평가에게 비평이란 개인의 사랑을 고백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설명하는 것에 애를 먹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것을 논할 때 문제가 되는 부분을 지적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것이 왜 문제가 되지 않는지를 말하는 건 어렵다. 예컨대 이는 우리 삶의 기준이 사랑에 맞춰져 있음을 의미한다. 사랑의 정의가 기본값이기에 그에 모자란 것들은 기본적이지 못한 것들로 여겨진다. 길을 걷는 건 사랑에 홀려서이지만 그 아래에 돌부리가 있다면 금세 눈에 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작정 길을 걷는 것이고, 무언가를 비평한다는 것은 길을 걷는 와중에 돌부리에 걸린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로 치부해버릴 수 있음을 뜻한다. 말하자면 비평이란 작업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이기적인 사랑에 더 가깝다. 허나 그것은 단순히 이기적이기만 한 게 아니다. 이기적이라는 게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행위라면, 사랑에서의 이기적 행동은 자신과 상대를 한 몸처럼 여기는 것이기에 양자의 이익을 모두 충족한다. 즉, 비평에서의 이기적 사랑은 호혜적 관계와 같은 말이다. 이 구분이 정말로 중요하다.
비평이 이기적 사랑이라고 해서 이기적인 비평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 문장을 한데 모으면 ‘이기적인 이기적 사랑’이 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부정과 부정, 긍정과 긍정의 중첩은 역을 도출해낸다. 그러니 이기적인 비평은 영화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인 비평을 두고서 우리는 선동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 글을 쓰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동하는 비평이 나쁜 이유는 독자를 현혹해서가 아니다. 그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해야 할 비평가가 자신의 감정대로 상대를 휘두르려고 해서다. 즉 선동하는 비평과 같은 부류의 글들은 일종의 데이트 폭력이다. 인간과 영화 사이에 맺어진 사랑의 관계에서 호혜성이 빠지고 이기심이 들어설 때, 그 관계는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것은 힘의 균형이 깨어져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만약 인간과 영화 사이에 파워 게임이란 게 존재했다면, 인간의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영화를 잘 아는 비평가들이 영화를 가만히 두고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오히려 인간과 영화의 관계는 우리가 알던 것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영화를 아무리 많이 아는 이라도, 영화를 아무리 좋아하는 이라도 예상치 못한 것들이 숲 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까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예상치 못한 현상의 도래를 두고서 그를 섬기게 될 뿐이다. 말하자면 영화에 대한 사랑은 숭배라는 현상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영화가 우리에게 무언가 해를 가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실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영화를 이용하기 위해 그를 실체로 만든다. 영화에 외피를 씌워 형상을 만들고, 외양을 드러낸 모습을 두고서 신의 현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인형에 거죽을 씌운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신의 존재를 믿기에 신을 주물한 게 아니라 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형상을 세워둔 것뿐이다. 물론 자신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신의 형상이 달라지는 건 사실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결핍의 충족으로 다가오는 것이지 만족의 정합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다. 그래서 비평가가 영화를 타인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게 믿음에 대한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평가의 믿음은 신앙심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막연하게 신앙에만 귀의하지 않기에 비평이라는 행위를 할 수 있다. 이때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비평이라는 행위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라면, 신앙이 깊어야만 영화의 본질에 다가서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신앙에 대한 본질적인 오해이다. 막연하게 섬기는 것이 충신이 아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이가 바로 충신이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종교가 제대로 된 종교일 리가 없다. 이는 그들이 믿는 것에 형체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상대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형체 자체에 대한 주장과 반박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두고 하는 것이기에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자신이 믿는 신이 타인이 믿는 신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믿는 대상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어떻게 믿는지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믿음의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의 방식을 보고서 믿음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타인의 깊은 신앙심을 보면서 감명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믿음에 간섭을 가할 때 그것은 행복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여기까지가 사랑하는 방법을 종교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사랑을 종교에 빗대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던 세계로 자신을 이끌어준다는 점이 유사해서다. 그리고 그곳이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세계라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도 있겠지만 다른 곳이기에 느껴지는 불편함도 있을 테다. 그리고 이때 대부분의 사람은 접촉의 순간에 얻은 황홀함에 빠져 다른 부위에서 감지되는 불편함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러면서, 원래 세계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본 풍경을 예찬하기만 할 뿐 다르게 느껴진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해버린다. 이 상황에서 이 세계에 대한 이상향은 깊어지고 환상은 증대된다. 말하자면 그 누구도 환상의 뒤에 잠든 위험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떠난 이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 있는 괴리를 몸소 느끼면서 집으로 귀환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 있는 괴리가 과연 중요한 사실인지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 누군가는 그 괴리가 없는 게 더 낫다고 말하면서 완전한 현실이나 환상 둘 중 하나를 택할 테다. 말하자면 그는 완벽한 세계를 원한다. 모호함은 혼란만을 낳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재를 감추려고 세계를 완벽으로 덮는 행위는 결핍을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만족에 정합을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 결핍에 대응하지 않고 그 위에 산을 쌓아버린다면 부재한 것은 영원한 부재로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실은 진실로부터 눈을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진실이라는 게 사실과는 다른 말이라는 점에서 그 선택은 유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의 진실이 자신이 믿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타인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행위는 선동이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비평가의 말이 선동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가 그만큼 영화라는 곳에 빠져있다는 점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세계에 몰입하면 그곳이 자신의 전부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예컨대 이 몰입감은 물아일체라는 나와 세계의 관계에 적용되는 사랑에 의존한다. 즉 사랑이란 몰입감이 자기 세계 전반에 적용되고자 할 때 그것은 이기심이 된다.
이런 모습을 다르게 표현하면, 부재하는 것을 감추고 존재하는 것을 부풀리는 게 될 것이다. 이를 장점은 부각하고 단점은 가리는 식으로 응용한다면, 좋은 자기소개 기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장점이 단점을 상쇄할 만큼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만약 단점이 장점보다 더 크다면 그것을 가리는 건 장점에 대한 모독이자 단점을 선택한 이들에 대한 기만이 된다. 예컨대 이는 존재(presence)와 부재 (absence)를 어떻게 다루어 할지에 대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존재와 부재라는 두 가지 성질은 하나의 평면을 공유한다. 즉 존재와 부재는 대립항이 아니다. 평면 위에 툭 튀어나온 것은 존재이고 아래로 푹 꺼진 것은 부재이다. 같은 맥락에서 존재는 만족의 행위이고 부재는 결핍의 행위이다. 그러니 우리는 비평이라는 게 사랑을 고백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존재를 보듬으면서도 결핍을 지적하는 게 평면에 대한 바른 예우라는 점을 확인한다. 허나 여기서 존재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거대한 동상이 되어 우상숭배로 변질되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의 믿음을 가속화하고, 부풀려진 믿음을 먹으며 점점 더 성장해간다. 그리고는 끝내 세계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단독자로서 군림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존재만을 의식하게 될 때 그는 세계 유일의 존재자가 되어 우리가 다른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이는 우리의 사고를 어느 한 방향으로 규정해버린다는 점에서 선동이다.
동상은 숭배를 먹고 자란다. 다르게 말해서, 영화에 대한 사랑이 선동으로 변질되는 과정에는 제동장치의 부재가 원인으로 자리한다. 과한 애국심이 국가주의로 변질되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 어떤 것이든 간에 과몰입은 좋지 않다고 할 수 있을 테다. 세계에 대한 관심이 세계 전반을 관심으로 만들어버릴 때, 그것은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심을 강요하는 게 되어버린다. 빈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빈곤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쇼트가 클로즈업이라는 점도 그러하다. 클로즈업은 대상을 제한 나머지를 배제하는 쇼트다. 우리는 클로즈업이 대상에 관심을 보내는 쇼트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계를 배제하는 배반의 쇼트다. 같은 이유로 롱테이크라는 시간적 이어짐의 표현이 세계로의 이어짐을 뜻한다고 우리는 알아왔지만, 다른 면에서 그것은 주어진 시간 이외의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협소한 시간으로의 유도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가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리얼리즘의 다른 얼굴은 존재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부재를 은폐하는 것에 그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이라는 게 존재의 정합성을 따진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자신이 들여다볼 곳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행동이다. 존재와 부재 중에 관객의 지위가 스크린 안으로 자신을 존재하도록 하는 게 리얼리즘의 요인이라면, 그것은 스크린을 이겨낼 힘을 앗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최대한 현실에 가까워지려는 시도를 통해 스크린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지우고, 그런 상황에서 관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크린 안으로 잠식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의 현실은 스크린의 존재에 잠식되어 일시적으로 부재 상태에 빠진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이 존재를 부각하는 방식에는 현실의 영역을 잠식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던지게 되는 의문은 타인의 영역을 헤쳐가면서까지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행위이기만 하느냐는 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장점을 추구하고 단점을 가리는 게 좋은 자기소개 기술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기 위해 타인의 단점을 부각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이기적인 행동이 세계에 대한 사랑 고백의 행위가 될 수는 있지만, 고백하는 비평이 될 수는 없다.
비평이란 개인의 사랑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비평이라는 게 존재와 부재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라면, 그 사랑의 방법은 존재와 부재 모두를 끌어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이기적인 사랑이 이기적인 세계를 구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비평을 함에 있어 소비자로서의 자신과 관찰자로서의 자신이 구분되어야 하는 게 꼭, 그런 이유 전부를 설명하는 것만은 아니다. 비평을 할 때 객관적이기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비평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을 둔 장소가 어디인지를 확보하고 그것을 타인과 견주어 보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대상이 타인의 대상과 비교해보았을 때 어떨지를 미리 생각해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영역이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는지를 미리 생각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영역을 두고 싸우는 그릇 싸움이 아니다. 서로가 자신의 것을 부단히 지켜내려 한다면 그 방어의 이유가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사랑의 홀림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구분하기 위함이다. 예컨대 우리가 영화에 접근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대우를 해줄 것인가.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방법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하는 날카로움만이 있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것만이 꼭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세계에서 여러 방식으로 존재, 혹은 생존하려고 한다. 우리 다수가 부재한다고 여기는 것들도 사실은 그들만의 존재 방식이다. 말하자면 존재와 부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기준에서의 만족과 결핍이지 세계 전반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존재와 부재를 주체와 타자라는 두 개의 대립항으로 두게 되면 그때 세계에는 돌출하는 것과 물러나는 것만이 남게 된다. 돌출하는 것은 세계를 결핍의 상태로 만들며 그에 자신을 찔러넣는 것이기에 어디까지나 자신만을 위한 행위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평을 한다고 말할 때 세계에 찔러넣는 날카로운 물음들은, 세계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할 때 사랑의 원칙을 배반하는 행동이 된다. 사랑의 원칙이 앞으로의 전진이고 비평의 원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지의사라면, ‘그럼에도’라는 말에는 그것을 택함으로써 얻는 수혜가 단점을 상쇄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내가 아닌 세계를 향해 던져보아야 한다. 만약 그 물음이 반대로 던져진다면 그것은 이기적 비평이라는 이름의 선동이 된다. 그리고 그런 선동은 우리가 스크린에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여기게 한다는 점에서 무서운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이 상황에서의 우리는 세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결핍된 세계에 자신의 완벽함을 투영하고만 있을 뿐이다. 영화가 자신의 완벽을 뽐내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어느 정도는 세계에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무리 잘난 것이라도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재로 남을 뿐이다. 그러나 그 도움이 전체를 사랑으로 매워 부재의 그늘을 지워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대로, 부재하는 것은 부재하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세계는 온전히 그곳에 있을 수 있다. 영역을 점유하는 것은 존재와 부재의 이권 다툼에 영향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의 행복을 위해 존재나 부재 둘 중 하나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다. 어느 하나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그것만으로도 세계라고 불릴만한 지위를 잃어버린다. 예컨대 완벽한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의 동시다발적인 분출만이 목격될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대립항이 아니다. 그 둘은 한 자리에 있기에 비로소 존재와 부재라는 단어로 불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관하여 같은 말을 해볼 수 있다.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은 무언가의 존재를 압도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의 부재를 압도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세계에 대한 가장 완벽한 긍정이자 부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