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영화가 하나의 인격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표정을 읽어내려고 시도할 테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인과의 첫 대면에서 가장 처음으로 목격하는 게 바로 얼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첫인상이라고 불리는 이 얼굴의 가치는 레비나스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되고 논의된 바가 있다. 그들은 얼굴을 사물이 세계로 표출되는 최초의 면으로 가정하고서, 이를 도식화하여 세계로 진입하는 문을 만들어냈다. 이에 따르면, 얼굴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그’라는 사람의 세계로 진입하는 출입구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인격체라고 가정할 때, 타자 철학이 자리할 장소는 영화의 얼굴이 그 세계로 가는 출입구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의 만남은, 그와의 눈 마주침에서 비롯된다고 말이다.
영화와의 눈 마주침을 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요하다. 영화에서의 시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변은 그것이 카메라의 움직임이 아니냐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 가정을 따르다 보면, 그 카메라가 과연 누구의 시선을 대변하고 있는지와 같은 곳까지 물음이 닿는다. 요컨대 우리는 그 카메라가 어떤 시점인지를 물을 수 있다. 문학에서 그 방법론을 빌려오자면, 이것은 전지적 작가 시점인지 아니면 3인칭 시점인지 등을 물을 수 있을 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카메라가 누구를 대변하는지에 따라서 영화의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약 이것이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카메라는 말 그대로의 작가를 대변하면서 이야기에 섞여 들어가지 않는 부유물이 될 테다. 또한 3인칭 시점이라면, 그는 작품 안에 있으면서 모든 걸 목격하지만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유령이 될 테다. 즉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는 카메라가 영원한 타자로 남는 반면, 3인칭 시점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찾아만 낸다면 대화는 나눌 수 있는 ‘불려 오는 타자’로 남게 된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그러한 영원성을 횡단하는 과정에서 끌어오는 여러 방법론이다. 영원한 타자를 만나려는 이들은 그곳에 직접 접촉할 수 없으니 그와 유사한 모방체를 끌어오고, 불려 오는 타자를 끌어내려는 이들은 영혼이 자리할 유사 몸체를 가져와 바로 이곳에 눕힌다. 이 두 가지 방법론은 서로 유사해 보이지만 약소하게나마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중간에 경유하는 무언가가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다. 이를테면 전지적 작가 시점이 위에서 아래를 관망하지만 그들에게 관여할 수 없는 불문율에 의해 관리되는 영화적 관찰의 장이라면, 이것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즉 우리는 그것을 두고 일종의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시드 마이어의 <문명>과도 같아서,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만들어낸다 한들 끝내 가상에 불과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물론 그 결과물을 현실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정신분석학에서의 자아가 실재라는 사막을 건너지 못하듯이 가상과의 사투를 벌여야만 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바라보는 타인의 얼굴이란 곧 가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타인의 얼굴이 진실한 상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 타인의 얼굴이 우리 눈에 맺히는 상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이유도 있지만, 얼굴 안에 담긴 내면의 세계가 단지 그 일부만을 표출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얼굴이 표방하는 내면의 세계가 정말로 대표성을 띄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을 수 있다. 즉, 카메라의 시점을 따라 진행되는 영화 속 모습이 정말로 그들이 보여주려 하는 것인가? 하고 물을 수 있겠다. 결국 우리는 영화를 알기 위해서, 그들의 얼굴을 지나쳐 내면으로 잠입하게 되므로 영화의 얼굴은 있어도 없는 것, 가상이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얼굴은 실재이다. 그것은 그곳에 있지만 눈으로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 실재계로부터의 목소리와도 같다. 물론 이 말이 그들이 보여주려는 것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이곳은 단지 입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타자를 부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즉, 전지적 작가 시점을 3인칭 시점으로 전향하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영화 안에 주변인으로라도 개입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잠시 이런 물음을 접어두고서 다음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만약 지옥에 얼굴이 있다면, 그는 망자들의 뒤틀린 모습을 합쳐 보여줄 테다.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지옥의 모습이라고 말할 테지만, 그 지옥에 있는 망자의 별개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망자를 그리워하는 이에게만 그 망자는 불려 온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의 부름을 받고 끌려왔듯이, 망자는 자신의 이름을 불려야만 이곳에 존재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영화에서 목격하는 망자의 모습이란, 우리가 그를 필요로 했고 이름을 불렀기에 이곳에 실체를 드러내는 영화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벌이는 가상과의 사투는 영화적 실재와의 사투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그것이 정말로 있다고 확언할 수 없는 실재를 이곳에 불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발견한' 영화적 실재-영화의 얼굴'을 두고서 진실과 거짓을 판가름할 수 없다. 마치, 영매의 몸을 빌려 이곳에 재림한 어느 영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실 로댕의 <지옥의 문>의 최상단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생각하는 사람’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옥으로의 입구에서 무엇이든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재미있는 가정을 해볼 수도 있을 테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는 것이 곧 그들을 이곳에 소환하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이 복잡한 문제를 설명하려면 절차를 따라야 한다. 이것은 시퀀스이다. 첫 번째로 영화 자체로만 존속하는 시뮬레이팅 된 세계가 있다. 이것은 영화 안에서 등장인물 개인의 모습으로 설명된다. 말하자면 영화 안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별개의 세계로서 자체적으로 시뮬레이팅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인식하거나 이해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 우리 이전에도 그들은 있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의 열차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최초의 열차로 시작한 영화가 그 안에 여러 것들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순차적으로 오르내리는 역마다 시민들에게 별 관심을 쏟지 않는다. 요컨대 그 열차는 시뮬레이팅 된 것을 가지고 오가는 교환의 장이다. 저승을 오가는 열차는 영화라는 저승으로 우리를 건너갈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과거의 저승 탈 것이 카론의 나룻배였던 것과는 다르게, 그만큼 저승이 현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이것을 영화가 그만큼 고도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금단의 장소, 영원한 실재로서 자리한다고 여겨도 좋다. 하지만 그게 스틱스 이전의 레테의 강에서 모든 것을 망각하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영화는 그들이 구축한 실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망각하게 할 뿐이다. 아마도 이것이 영화가 주는 몰입 효과에 비견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 딱히 특정한 위치를 부여하면서 인식하지는 않는다. 나라는 이는, 타자를 만나 타자 앞의 주체를 설명하기를 요청받을 때만 예외적으로 소환될 뿐이다. 결국 주체는 곧 실재이며, 영화에서의 카메라는 주체 앞에 설 때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열차 안의 시민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열차가 어디를 오가는지, 즉 동선을 분석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영화 안에 적용하면, 영화 안에 설정된 여러 시점이 어떤 대열로 놓여있는지를 분석하는 게 될 테다. 또한 영화 밖에 적용하면, 영화라는 하나의 시점이 다른 것들과 어떤 대열로 놓여있는지를 분석하는 게 될 테다. 말하자면 이것은 사구 안에 놓인 모래 알갱이의 개별적 움직임이 아니라 사구 전체의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이것은 카메라가 어떠한 시점을 지니기만 한 주체가 아니라, 그곳으로의 투입을 가정하는 열차의 노선을 설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즉 그는 내비게이터일 뿐 특별히 어떤 영혼을 지녔다거나 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현실 세계를 영화에 대입하려는 사고의 여부에 따라서도 시점이 나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우리 세계의 주변인으로서 영화를 바라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 세계의 방관자로서 영화를 바라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가정은 주변인과 방관자라는 영화적 테마로 변환되어 영화 안에 적용되고 전시된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의 안과 밖에서 각각의 자리에 자리할 수 있고, 그 자리는 총 네 가지로 분류된다. 바로 이때, 영화에 외부 세계를 얼마나 끌어올 것인지의 문제가 대두된다. 다르게 말하면 이것은 영화의 속살에 얼마나 양념을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에서의 카메라는 감독의 사적인 기억을 투여해 이른바 대리물로서 보여지는 면이 있지만, 사실 그것은 감독의 대리물이 아니라 그의 기억 속 어딘가로 향하는 열차의 노선도를 우리에게 안내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이 경우에는 세계 안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는 주체가 곧, 영화 안에서 영화를 관망하는 주체의 존재에 대응한다. 즉 우리는 그들을 태울 열차를 외부에서 이곳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 우리는 주변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열차는 차장 없이 달리는 유령 열차이기 때문이다. 영화 밖에서 알폰소 쿠아론은 자신의 기억을 내버려둔 방관자이지만, 영화 안에서 주체로 자리한 그의 모습이 명백하게 주변인인 이유에는 그런 점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서 이 영화에는 주체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것이 무섭게 느껴진다 하여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주체 없이 반으로 나누어지는 하나의 상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던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얼굴의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 얼굴은 실재이다. 우리가 타자를 처음 마주하는 장소인 얼굴, 그 시선이 닿는 표면의 장소에는 공허만이 맴돈다. 이 얼굴은 우리를 초대하지만 길은 안내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뚜렷한 욕망이 없다면 그 얼굴을 투과하는 시선을 만들어낼 수 없다. 뚜렷한 욕망, 그것을 지닌 카메라가 내비게이터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길을 잃고 헤매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3인칭 시점에서는 불려 오는 타자를 우리가 가정하게 되는데, 이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구도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시뮬레이션하는 영화도 결국에는 영화 밖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존재, 즉 스크린을 경유해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존재가 곧 카메라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부분의 영화는 우리가 길을 잃도록 설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열차 안에서 깨어나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만을 알 뿐, 어디에서 내릴지는 알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만약 이러한 모습이 세계를 떠도는 우리 개인의 모습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영화의 속살을 살펴보는 시도의 첫 발자국일 테다. 많은 사람이 세계 안의 인간 주체를 도시를 달리는 열차에 그대로 적용하고는 하지만, 그보다는 열차 안에 갇힌 하나의 영혼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즉 열차는 얼굴이며, 그 안에는 여러 영혼이 매역마다 타고 내린다. 결국 우리라는 이름의 주체가 설정되고 유지되는 것은, 출발지와 도착지가 개인의 것으로 지정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실재라는 공동 안을 오가는 여러 개인의 것들은, 얼굴이라는 하나의 교집합 안에서 하나가 되어 영화 안으로 나아간다. 여기까지 말했으니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다. 이것은 시퀀스의 두 번째 단계이다. 만약 영화 전체를 하나의 시뮬레이팅이라고 한다면, 그 게임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면서 출구 없이 맴돌기만 할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영화가 우리를 현실의 어디로 안내하는지를 따져 묻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창동의 <버닝>이 이런 방식으로 촬영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영화는 누구의 시점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외부적인 전지성을 띠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열차는, 안착할 장소를 찾지 못해 떠도는, 실시간으로 탈영매화 되는 어느 시뮬레이팅 장소 안을 맴돌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이는 주변부에 자리하는 3인칭 시점이 된다. 이때 혹자는 해당하는 3인칭 시점을 주변인으로 해석할 테고, 혹은 방관자라고도 말할 테다. 이러한 두 가지 가정은 우리가 3인칭 시점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힌트가 된다. 예를 들어 전지적 작가 시점이 3인칭 시점으로 변환되는 과정은, 가상과의 사투를 벌이는 대신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아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영원한 타자를 만나지 못해 내내 그리워하기보다는, 그 안으로 들어가 언젠가는 올 그대를 기다리면서 똬리를 틀라는 것이다. 이는 <버닝>의 종수가 혜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논밭을 찾아 헤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비닐하우스가 영화라는 전체 형식의 메타포로서 그들을 품는 공동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달려온 우리는 얼굴의 가치를 두고서 다음처럼 정리해볼 수 있을 테다. 얼굴은 실재이고 그것은 영화에서의 카메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체가 얼굴을 통해 발산되기만 할 뿐, 얼굴이 우리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듯이, 영화는 카메라라는 얼굴을 통해 발산되기만 할 뿐 영화 전체를 헤집어 놓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장 뤽 고다르가 왜 <미치광이 삐에로>의 마지막 장면을 카메라와 인물의 얼굴에 일치시켰는지를 생각해보면 설명되는 문제이다. 누군가는 고다르의 영화를 카메라의 영화로 기억하겠지만, 반대로 <비브르 사 비>에서의 안나 카리나의 얼굴이 표현하는 것 또한 고다르의 카메라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방점은 고다르가 아니라 카메라이다. 즉 고다르는, 사람이기보다는 카메라 그 자체로서 영화를 통과하기에 위대할 수 있었고 또 존경받을 수 있던 것이다. 쉽게 말해 그는 열차의 선로를 폭파한 테러범이고 인간의 얼굴이 단지 가죽 덩어리, 가면 안의 텅 빈 공동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해준 시네아스트이다.
그렇다면 이제 역사상의 다른 카메라-얼굴을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바로 오즈 야스지로다. 흔히들 오즈 야스지로의 카메라가 영화적 형식을 이탈해 하나의 인격체로서 만들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서술하고는 하지만, 그러한 착각은 애초에 영화적 형식이라는 게 열차의 선로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전혀 착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열차의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물론 이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 영화 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일종의 수미상관으로 작용하면서, 얼굴로 진입했다가 얼굴로 나가는 일종의 출입구로서 작용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는 <동경 이야기>의 그 열차가 도쿄라는 나라의 중심부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겠고, 여기에서 연역하여 오즈가 생각하는 시대의 얼굴이란 바로 아버지의 얼굴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신도 알다시피 오즈를 두고서 보수적 우파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그게 한국인인 우리에게 어떠한 평가적 지표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허나 오즈 영화의 가장 큰 화두는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라, 그곳에 아버지가 ‘있었다’는 존재의 징후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오즈의 영화에 삽입된 데드 숏들은, 그저 아무런 효능 없이 형식의 미로서 자리한 열차의 정차지점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던 어느 아버지의 불특정한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오즈의 영화는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얼굴들이 카메라라는 영매를 빌려서 영혼의 형태로 진입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아버지는 전통적으로 우리가 욕망에 관하여 말해왔던 오이디푸스적 팔루스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시대의 흔적, 그 징후에 불과하기에 오직 슬픔 만으로만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아버지는 오즈 영화의 류 치슈였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인상 깊은 얼굴 중 하나는,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에서의 마지막 장면쯤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데커드를 끌어올리는 로이의 얼굴이다. 명확하게 어느 특정한 시점이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그려지던 이 영화가 갑작스럽게 두 사람의 관계를 비출 때, 카메라는 시점을 바꾸어 3인칭 시점, 불멸자와 필멸자라는 두 가지 테마가 공존하는 이 영화에 이도 저도 아닌 주변인으로 참관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그들이 말하던 레플리칸트라는 인간과 비인간의 판가름도에서 벗어나, 로이와 데커드라는 그들만의 세계 안으로 진입한다. 그러니까 사실 이 구도는, 그들의 입장이 교환되기 때문이 아니라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를 떠돌던 열차가 우리 바로 근처, 로이와 데커드 사이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정말로 많은 감동을 준다. 그야말로, 세계 안의 실재에 불과했던 로이의 얼굴이 대변하던 전지적 세계가, 그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3인칭 시점-주변인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oAzpa1x7j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