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영화와 정치적 영화, 라는 삶에 관하여

by 수차미
KakaoTalk_20180328_001831906.jpg


1.


정치 영화와 정치적 영화라는 분류에 대하여 장 뤽 고다르는 다음처럼 말했다. “정치에 대한 영화가 있고 정치적인 영화가 있다.” 이 문장은 개념을 분할했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설명을 덧붙이자면. 먼저 정치라는 현장이 있다. 사람들은 그곳의 풍경을 바라볼 때 정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때 ‘그 주변부’의 이야기, 즉 ‘현상’에 대한 관찰이 바로 ‘정치적’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풍경 말고도 그것이 작동하는 과정과 원리 전반을 포괄한다. 그리고 우리는 고다르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이 두 가지 단어를 두고서, 당신은 과학자이거나 철학자가 되기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때 과학자와 철학자라는 두 가지 갈래에 대한 설명을 잠시 접어둔다면,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치란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이다. 과연 정치란 무엇일까? 물론 이 물음은 정치를 공부하는 이들이 바르게 답해줄 수 있겠지만, 정치를 위해 사용되는 수단 중에 영화라는 매체가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영화를 정치적인 것에 응용할 수 있다는 말은, 반대로 정치가 영화에 응용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를 하는 방법, 즉 방법론이 영화에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은 흥미로운 가설이다. 정치란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며, 그 가짓수를 따져 보면 밑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고를 게 많아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를 이루는 여러 방향 중에 다음과 같은 부분을 생각해보려 한다. 정치가 우리의 생활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라면, 영화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이때 어느 영화가 정치 영화이고 정치적 영화일까.


2.


정치적이라는 말은 정치의 주변부에 자리한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리얼리즘을 표방하고자 한다면, 그 리얼리즘의 주변부를 맴도는 게 ‘정치적’이다. 이때 누군가는 영화의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할 테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대 영화에서 리얼리즘의 문제는 영화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환원되어버린다. 쉽게 말해 스크린에 어떤 풍경을 늘어놓든 그것은 영화라는 말로 외면되거나 합리화된다. 과도한 폭력성이나 부도덕함도 예술을 위해서는 마땅히 허용될 수 있고, 일반적으로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그것이 직시하는 현실의 이야기에 부닥치기도 한다.


여기서 문제, 우리는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라고 말하는 영화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영화 자체로만 어떤 일에 대해 알게 된다면 우리가 평소에 알지 못했던 것을 접하게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그게 정말로 옳은 정보인지를 바르게 판별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판단의 과정이나 절차에 관하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정치적인 것의 연장에 불과할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아니라, 영화가 영화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물을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정치’가 아니라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자는 것이다.


이 논의는 꽤 복잡하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관객이 영화를 볼 때 말고도 영화 자신이 자신에 대해 ‘그렇게’ 정의할 때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부분 영화는 자신이 담은 게 정말로 사실이라고 믿어주기를 원하거나 또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이 경우에 관객은 둘 중 하나가 되는데, 영화에 홀려 그 리얼리즘에 동참하거나 또는 그걸 그저 ‘영화의 주장’일 뿐이라고 여긴다. 물론 여기서 전자는 ‘알고도 속아주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후자는 ‘영화의 주장’일 뿐이라고 표면적으로는 말하지만 속으로는 동의할 수도 있다.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직접적으로 연루되면 그곳에 참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3.


농담을 조금 섞어 정치를 ‘잘살아 보자’라는 여러 사고와 행동을 축약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치적’이라는 말은 그걸 돌려서 말하는 것쯤 된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발언은 잘 살고 싶다는 걸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산다는 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에 선행하는 것은 삶 그 자체에 관한 물음이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개인의 삶이 있고 각자의 자리가 있는데 그걸 모두 포괄하는 해답을 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정치란 늘 갈등과 분열의 연속이며, 가끔은 만장일치를 내놓을 때도 있지만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우리네 현실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의 정치란, 본연의 자리에서 이탈해 형태만으로 우리 곁에 찾아온다는 점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문구가 그걸 보여주기도 한다. 허나 우리가 알아둘 부분은 정치가 국가의 경영을 뜻한다는 것, 그렇기에 여기서 국가라는 단어를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걸 이렇게 말해보자. 우리는 우리 몸을 경영한다. 즉 주체이다. 어쩌면 운전(Drive)라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겠다. 마치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도입부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 자리한 나라는 이름의 운전대를 잡았다.


정치가 투표와 같은 직접적인 형태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반면, ‘정치적’이라는 것은 오히려 ‘주변부’에 있기에 우리 삶에 더 잘 밀접한다. 그렇기에 정치보다는 정치적이라는 말이 더 많은 변용을 거칠 수 있다. 영화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는 순수한 정치보다 더 고차원적이다. 왜냐하면 영화에는 주체가 양측에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관객의 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또는 소설의 형식처럼 가이드라인 바깥의 인물에 이입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감독의 옆에 앉아서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추론을 해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영화라는 세계 안에 사는 누군가가 되어 영화를 마치 ‘뉴스’처럼 즐기기도 한다. 즉 이것은 티브이 뉴스라기보다 옆집 사는 누구의 아들은 어느 대학을 갔다는 식의, 이웃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4.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위의 이웃 네트워크는 꼭 우리가 정치를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직접적으로 연루되면 그곳에 참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때 부모님은 옆집 아들이 정말로 존재하든 아니든 간에, 정말로 어느 대학을 갔는지와 같은 진위 확인에는 그렇게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대화의 주된 목적은 아들을 훈육하기 위함이지 옆집 아들을 부러워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대화는 어머니의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있다. 다르게 말하면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 ‘정치’의 주변부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른바 일상 속의 정치이다.


누군가는 선동이라 말할 것이다. 조금은 과격한 표현이지만 아주 이해가 안 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진다. 영화가 만드는 이야기가 리얼리즘이든 아니든 간에, 주된 목적은 관객을 훈육하기 위함이지 무언가 전달하고 고발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영화가 몇몇 있는데 우리는 이런 영화를 두고서 정치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들은 관객을 계몽시키고자 한다. 의도가 어떻든 간에 어떤 면에서는 자신을 가르치러 든다는 느낌이 들 수 있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이 생각은 우리 현실처럼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기에 더 심화된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 하는 잔소리는 자녀가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영화와 관객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라는 대상성만을 공유하니 말이다.


영화라는 세계 안의 주민이 관객인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또는 그렇게 여기는 몇몇 영화들에서 우리는 정치적 참여의 요구를 본다. 영화가 다루는 논제가 어떻든 간에, 이러한 설정이 갖는 효과는 우리가 직접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그곳에 참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거리를 다닐 때 만나는 모든 행인에게 관심을 쏟지 않듯, 그저 현상처럼 떠나보낼 수 있다. 그래서 대체로 이런 영화는 관객에게 몰입감을 주기 위해 이런 선택을 한다. 당신의 주변부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허나 그것뿐이다. 또는 그렇기에 언젠가는 당신도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식의 자유간접화법이다.


5.


이런 경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면, 감독이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에 담았을 때, 우리는 감독 또한 우리 곁에 있는 어떤 사람일 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때 감독의 영화는 소문이 되어 자신을 가리는 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문이 어떤 의도로 발원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사실은 영화는 영화로만 보아야 한다는 대전제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믿는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한다. 물론 우리가 지레짐작한 사실이 오해일 수도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예우이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 자신이 정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영화가 다루는 게 정치 그 자체라는 뜻이 아니라,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직접적인 ‘정치’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혼동을 막기 위해 번안을 거치자면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지’에 관한 가장 개인적인 물음이 영화가 된다. 어느 감독에게는 영화가 다루는 게 자기 삶에 대한 고민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영화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을 담는다. 이에 대해 우리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 긍정의 언사를 보낼 수 있을 테다. 자신에 심취하라는 게 아니라, 삶을 긍정하라는 것이다.


또한 어느 감독에게는 영화라는 게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낳기도 한다. 이 경우 그런 긍정은 자신이 아닌 영화에 적용된다. 이에 따르면 영화는 그가 낳은 자식과도 같다. 그래서 그는 영화를 통해 자신을 전하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분명 자신과 독립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니 오히려 자기보다 더 잘 되기를 바란다. 이때 감독은 영화를 정치로 남겨두면서 자신은 정치적인 것, 즉 ‘주변부’에 남는다. 그는 영화의 주변부에 남아 어떻게 해야 영화가 더 영화다울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때 그런 영화는 본편만으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관객에게 남기게 된다. 그것은 잔여물이다.


6.


어떻게 보면 전자는 국가를 운영하는 것, 후자는 자녀를 양육하는 것에 빗대어질 수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곧 정치, 영화를 정치 그 자체로 여기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면, 영화는 가장 개인적인 게 된다. 그러니 이 경우 관객이 영화에 동의할 수 없다면, 그건 감독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긴 것이기에 그렇다. 사실은 개인적인 생각이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의 문제는 화법에 달려 있기도 하다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고다르가 말했듯이 영화에는 그러한 두 가지 분류가 있다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영화와 정치적인 영화. 즉, 주체와 주변인.


주체와 주변인이라는 두 가지 테마에 대하여 말해보자. 정치라는 게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관한 여러 방향성을 우리가 다 따져볼 수는 없기에 이 논의는 명확한 해답이나 방안을 제시할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안 하나는 그것이 바로 화법의 일종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말할 것인지의 문제다. 또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정치에 참여하는 여러 방법이 있기도 한데, 시위가 정치의 직접적인 참여라면 그에 대한 후원은 간접적인 참여이다. 이때 그 다른 부분을 번안하자면, 그것들은 각각 은유와 환유이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현실의 은유, 또는 환유라고 말할 이도 있을 테다. 그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영화를 현실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화에 현실을 동일시해버리는 오해를 겪게 된다. 방금 서술했듯이 그 오해는 우리가 직접 수행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모습에서 관측된다. 예컨대 영화와 현실을 동일선에 두면 우리는 영화라는 타인에 대해 거울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우리의 모습에 취할 수 없게 된다. 정치라는 것은 자신, 정치적이라는 것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주변부에 자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막연하게 취하기보다는, 영화라는 자기 삶을 어느 정도는 긍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전 13화보지 않았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깊숙한 곳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