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세상 모든 것의 최상급 표현이다. 어떤 문장이든 간에 죽음을 덧붙이면 가장 극단에 서게 된다. 이를테면 ‘죽을 만큼 사랑해’라는 말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죽음에 비견할만한 사랑’이라는 ‘최상급’의 용례를 발견한다. 어쩌면 우리가 태어난 곳이 태초의 어둠, 혼돈이라 불리는 죽음 속이었기에 그런 말이 성립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죽음에서 태어나 죽음으로 향한다. 모든 인간이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말은 비가역적이라는 것, ‘되돌아올 수 없는 선’을 뜻하기에 우리는 어떠한 감정이나 상황의 가장 끝자락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놓는다.
태어나기 이전은 시간상 과거이기에 우리가 돌아갈 수 없다. 죽음 이후는 시간의 바깥이기에 우리가 향할 수 없다. 결국 죽음이란 시간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옛 그리스 신은 저승에 흐르는 스틱스 강에 맹세를 하는 것으로 약속의 순결함을 증명했다고 한다. 그 순결함은 두 남녀가 상대에 요구하는 정조를 뜻하기도 했다. 상대방 이외의 이성과는 사랑을 나누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정조를 어기는 행위가 죽음에 해당한다는 말이 된다. 예컨대 순결을 잃는다는 건 곧 죽음에 이르거나 그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죽음의 순결성을 확인한다.
말 그대로 죽음은 그 자체로 순수 무결하다. 그래서 죽음과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 우리는 그 순수 안으로 빨려 들어가버린다. 그리고 이는 비가역적인 절차를 밟는다. 암과 같은 죽음의 직접적 현신을 겪은 이후로 인체는 비가역적인 손상을 겪게 된다. 운이 좋아 죽음에서 벗어난다 하여도 신체는 이전과 같은 성능을 내지 못한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죽음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떠나 죽음에 안착하는 존재이므로 언젠가는 그를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지 않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되는데 그게 바로 시간의 보존이다.
시간을 보존한다는 건 시간을 흐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허나 시간은 흐를 수밖에 없으니 관념만으로 해결하게 된다. 이른바 감금, 우리는 시간 안에 생각을 가두어버린다. 이렇게 가두어진 생각은 변화하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우니 처음에는 자유롭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고 고인 호수가 썩어가듯 감금된 시간도 부패한다. 이때 그런 모습을 대변하는 여러 증상과 징후가 있는데 대표적인 게 바로 치매이다. 치매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향하는 비가역적 질환이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있을 수 있는 질환이다. 모순되지만 그런 모순을 가능케 하려는 우리의 마음이 그곳에 있다.
치매에 걸린 이들은 특정한 순간에 감금된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면 대체로 유년기의 한때로 돌아간다. 우리는 이를 두고 그가 젊어졌다고 말한다. 나쁘게 말하면 퇴행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단어에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젊어지는 건 불가능하게 여겨지지만, 퇴행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시간을 넘는 행위이고 후자는 시간의 허락 아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시간을 신의 영역에 둔다. 시간 그 너머를 넘보는 행위는 신의 영역에 손대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가 시간의 바깥을 들여다볼 때 그것은 종교적인 문제로 변화해버린다. 그렇지만 종교학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그리 체계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연역된다. 체계적이지 않은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어쩌면 이게 광적인 믿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광이라는 낱말은 미칠 광(狂)이기도 하지만 빛 광(光)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빛에 대한 맹목이다. 어둠을 피해 빛으로 향하는 걸 두고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둠을 죽음이라 생각하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죽음을 피해 빛으로 향한다는 것, 문제는 여기서 빛이 과연 무엇이냐는 점이다. 그게 무엇이기에 맹목적으로 믿게 되는 걸까. 체계가 없다는 점에서는 본능일 수도 있겠다. 또는 본능에 대한 본격적인 해석을 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본능이라는 이름 자체가 갖는 함의가 그로의 접근을 꺼림칙하게 만들어서다.
우리는 이미 태어났다. 그래서 첫 번째 죽음은 막지 못했다. 하지만 끝자락의 죽음이 아직 남아있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기에 우리는 고민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시간을 멈춘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여러 시간에 관한 추상이 개입한다. 그런 추상이 바로 빛이라는 이름의 종교이다. 그리고 빛으로 만든 정지된 시간이 종교로 발현하는 건 적어도 내가 아는 것 중에는 영화밖에 없다. 영화는 빛의 끝자락이 세상과 닿을 때 태어난 매체이다. 그것은 천지창조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었다. 동시에, 어둠에서 태어난 우리가 다시금 영화관이라는 어둠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영화의 시간이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의견이 갈릴 수는 있지만, 시간을 담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어찌 되었든 간에 영화는 특정한 시간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 모든 일은 영화관이라는 어둠에서 시작되어 영화관이라는 어둠에서 끝난다. 이 모습이 마치 우리의 삶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어둠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은 죽음 아래의 우리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니 영화의 시작을 우리는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태어났고 영화도 이미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와 마찬가지의 문제를 영화도 겪을 테다. 영화도 자신의 죽음을 걱정한다. 그래서 그는 시간을 가두어 두려 한다. 그 행위는 인위적인 치매, 알츠하이머라는 이름의 방부처리이다.
이때 방부처리라는 말에서 하나의 의식을 떠올리게 된다. 고대 이집트의 미라이다. 미라는 죽은 이가 돌아올 육신을 보존하려고 시신을 방부처리 한 것이다. 말하자면 미라는 죽음으로부터의 귀환을 염원하는 종교적 의식을 기반에 두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미라는 죽음 당시의 육체를 보존하는 것이니 시간을 멈추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 미라는 시간의 정지이다. 그리고 이는 저승으로 가야 할 망자가 구천을 떠돈다는 점에서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걸 거역하는 행위, 즉 시간에 대한 반기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천계와 명계가 있다면, 천계에서 내려온 파라오가 다음으로 향할 곳은 명계라는 점을. 그래서 명계로 가지 않는 건 일종의 쿠데타라는 점을.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화가 끝나고 그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갈 때 잠깐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야 만다. 덧붙여서 이것은 비가역적인 시간을 우리에게 선고한다. 되돌아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며 우리는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와 우리 삶의 공통점은 단 한 번 이루어진다는 점이기에 우리는 영화에 자신을 대입한다. 단 한 번의 삶, 물론 영화는 다시 한 번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게 우리의 용기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삶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영화는 마치 미라와도 같아서 명계로 가지 않고 현실을 떠돌 수 있지만 우리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인간은 살아가는 존재다.
사람들은 흔히 이집트의 미라가 파라오라는 신적인 존재에만 허용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대중적 행위였다. 누구나 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도 미라로 만들었을 정도다. 그러니 미라는 종교의식이지만 신적인 무언가는 아니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일종의 종교로서 기능하기도 하는데 신적인 무언가는 아니다. 영화 또한 불멸을 갈망하는 우리 곁의 생명에 불과하다. 여기서 다소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는다. 영화가 우리의 삶에 비견될 가능성을 타진하는 건, 영화 같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영화 같은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어떤 영화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이건 특별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영화처럼 살았어요. 또는 영화가 그를 따라가지 못해요. 이 두 가지 감탄사 중에 전자는 영화에 빙의하는 것이고 후자는 영화를 추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빙의와 추월이라는 점에서 갈리는 이 표현은 그럼에도 시간 아래 귀결된다. 예컨대 우리가 시간에 빙의하거나 그보다 빨리 갈 수는 없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시간의 속도가 빛의 속도’인 우리 세계에서 ‘빛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숭배는 탄생했다. 광적인 숭배는 빛에 대한 숭배나 마찬가지니까.
죽음을 피해 빛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빛에 대한 숭배란 죽음에 대한 숭배와도 같다. 두려움에 의한 숭배는 인류 역사상 흔했고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줄 의사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육신의 상처와는 다르게 마음의 상처는 치료받을 곳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세상에 내놓은 육신은 빛을 쐬지만 내면은 늘 빛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육신은 마음을 감싼 껍데기이고 육신을 벗기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기에 내면을 치유하려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간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간은 봉인되었다.
영사기에서 흘러나온 빛이 스크린에 맺힐 때 영화는 시작되지만 그건 표면에 불과할 뿐 내면을 반영하지 못한다. 내면을 보려면 육체를 벗기어 시간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 순간 육신은 죽음에 이르게 되고 내면도 죽어버린다. 그래서 영화의 시간은 육안으로 관측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영화 같은 삶을 사는 누군가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를 두고 숭배에 빗댈 수 있다면 영화 같은 삶에 대한 생각은 종교적인 무언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종교적인 무언가일 뿐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빛에 대한 환희가 맹목적인 만큼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영화를 숭배한다는 건, 자신의 삶이 영화가 되지 못한다는 빛과 어둠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특별해지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무대 위에 올라가 홀로 조명을 받는다는 게 아니다. 영화가 한 편의 이야기를 보여주듯이 자신의 삶 또한 이야기가 되고 싶어한다. 그 이야기는 언제나 산자의 기록이기에 삶으로 귀결되곤 한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보는 이야기에 망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이는 말이 없고 우리는 그렇게 되는 걸 경계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야기 없는 삶은 죽은 삶이기에. 그런 이유로 미라가 되어버린 삶은 우리에게 큰 슬픔을 준다. 봉인된 시간 하에 우리의 삶은 경계를 잃어버리니 말이다.
영화는 항상 같은 이야기를 보여주고 그래서 그는 죽어있는 상태로 취급된다. 일종의 대상물이다. 여기서 대상이라 함은 우리와는 다른 무언가이다. 이들에게만 빛이 내리쬐고 그게 바로 시간이 쏟아져 내리는 일종의 ‘방부처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영화 같은 삶을 사는 어떤 이는 우리 곁에 멀쩡히 살아있다. 그러니 대상물로 취급될 수 없어야 하는데 대상물로 취급된다. 다르게 말해 영화 같은 삶을 사는 이는 타자라는 객체조차 되지 못한다. 객체가 아니기에 객관적으로 파악되지 못한다. 객관적으로 파악되지 못하니 주관으로 파악된다. 바로 그렇게 그는 모두의 주체가 된다. 만인의 주관이 만들어낸 만인에 대한 주체. 그것은 투쟁이다. 그리고 투쟁이 벌어지는 곳은 전장이다.
죽음을 마주한 우리가 죽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가장 밝은 곳을 부러워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영화관 안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심정이다. 어둠에서 빛을 그리워하기보다는 흘러가는 시간의 끝자락에 죽음이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는 영화가 영원할 것으로 여기지만 실은 그것도 끝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에 빠져드는 건 영화가 영원하리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영화가 봉인한 시간이 시작과 끝, 그 중간에 자리하며 언제까지나 영원하지 못할 우리 자신을 위로하기 때문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지만 그걸 보는 우리가 막연하게 우주의 넓음을 느끼듯이, 영화의 시간은 우리가 도피하지 못할 내면을 대신하여 삶의 투쟁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이 가리키는 죽음의 징표를 마주하기를 꺼리면서 그것을 주체의 외부로 돌린다. 이때 외부로 돌아가야 할 징표가 내면에 맴돈다면 그것은 정신질환으로 발현된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자기 신체에 갇혀버린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라고 말했으나 그에 선행하는 건 몸에 갇힌 우리의 영혼이다. 어둠 속에서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는 것들이 내면에서 소리칠 때 그것은 지옥의 비명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이른바 망자, 허나 살아있는 이들, 그것은 좀비이거나 미라이다. 살아있지만 죽지 못하게 방부 처리되어 죽음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의 얼굴이 이곳에 있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하면 사람들은 무대 위에 시선을 보내지만 실은 그곳에 아무도 없다.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실렌시오 극장의 가수가 쓰러져도 음악은 계속된다. 말하자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밝은 빛들은 오로지 내면의 목소리만으로 발현된다. 이 장면에서 관객과 배우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는 영향을 받는다. 여기에 <에반게리온>의 신지는 모두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내면으로 들어간 그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방부 처리하는 듯 보이고 그건 어쩌면 박제이다. 시간으로부터의 박제, 그것은 치매이다.
알츠하이머라는 이름은 뇌의 노화현상이지만 마음의 쇠락을 뜻하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노인을 돌보는 건 노인 자신이나 주변 사람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우리 세상에는 흔히 일어나고 있다. 알츠하이머라는 병명이 아니라 봉인된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실렌시오 극장에서 립싱크하던 가수가 쓰러졌을 때 우리는 눈과 귀의 시간이 분리되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사기가 고장 나 소리만이 홀로 들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함을 느끼곤 했다. 우리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들었지만 눈에 비친 현실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일종의 부재이거나 괴리이다.
신지가 귀를 틀어막고 소리를 내지를 때 영화는 알 수 없는 화면을 보여준다. 부서진 내면을 시각화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오직 소리만을 들을 수 있다. 이 모습이 마치 분리된 시간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신지가 모두 죽었으면 좋겠다고 소리쳤을 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죽지만 내면에서는 여전히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럭키 호러 픽처쇼>의 도입부처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이다. 어쩌면 몸이 없는 체셔 고양이의 속삭임일지도 모르겠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두고 신체 없는 기관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그것은 신체 없이 작용하는 시간이다. 어둠 안의 우리가 바깥의 것을 두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봉인된 시간에 대한 탐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걸 두고 죽음충동이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점을 여기에 덧붙인다. 신지에 자신을 투영한 안노 히데아키가 지독한 우울에 시달릴 때 그의 예전 사장이자 스승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게 되었던 결정적 원인 하나를 다시금 들려주었다. ‘살아라’라는 정언명령. <붉은 돼지>의 마르코가 비행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와 <센과 치히로>의 치히로가 온천에서 일하는 이유는 그들이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하기에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눈앞에서 흐트러진 시간을 내면의 목소리가 바로잡아주는 것뿐이다. ‘살아야 한다’는 시간. 부패는 되지 않으나 노화라는 성숙 또한 없는 방부제 같은 삶. 어쩌면 자폐 또는 치매.
그렇다면 내면의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올 땐 어떻게 될까. <로건>에서 치매에 걸린 찰스 자비에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정신 능력자일 뿐이다. 영화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찰스 자비에의 모습을 소리가 울려 퍼지듯이 표현한다. 정신에 대한 통제를 시각화한 셈인데 사실 이는 개인의 주제성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시간의 찬탈과도 같다. 정신이 붕괴해가는 노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간의 붕괴를 본다. 그의 육신이 늙어가고 있지만 그런 시간의 퇴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게 바로 세상인 것이다. 여기에 그의 친구 로건은 주특기인 자가치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는 시간이 퇴화하는 세상에 내쳐졌고 이 이야기는 얼마 가지 못할 테다. 자신을 잃은 찰스가 세상에 가하는 복수는 이제 곧 끝이 나니까. 이윽고 로건은 어둠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모두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정말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우리 삶이 영화라고 말하는 멋진 수사를 듣고는 한다. 오즈 야스지로는 인생은 드라마라고 말하며 영화는 모두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 방점은 영화의 보편화가 아니라 모두에게도 영화가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근본이다. 우리가 죽음에서 태어나 죽음으로 향하듯 우리의 시간도 그 끝자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혹자는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 영원성을 대변한다고 말하지만 영원에 대한 갈망은 박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썩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양산된 좀비는 영혼이 없기에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한다. 그러니 벽 안에 있는 것들에게는 무간지옥이라는 형벌이 내려진다.
영화가 우리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영화 같은 삶이 아니라 영화라는 무대를 갈망하는 것이다. 영화라는 무대가 만들어내는 특별함의 환상이 삶의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목소리 말고 아무것도 없다. 실렌시오 극장에는 내면의 목소리가 행동의 지배자로 자리한다. 몸에 갇힌 우리는 무대 위에 올려진 배우를 보며 그것이 우리 행동의 지배자로 군림하기를 원하지만 이상은 엇나가고야 만다. 그럴 때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이상향에 베임을 만들고 우리는 낙원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같은 삶을 산다는 게 정말로 낙원을 말하는 것이냐고 말이다.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게 자신의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무대가 영화 같은 삶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일치점을 찾는다. 내가 되고 싶은 것과 네가 되고 싶은 것의 차이가 스크린에 드러날 때 우리가 찾아내는 건 그사이의 간극이 아니라 허공에 떠도는 목소리이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게 무대를 통제하는 한 우리는 그런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기에 선택한 무대가 우리 자신을 얽매여 온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른다.
영화관에서 오직 영화만이 밝게 빛나지만 밖으로 나오면 빛은 세상에 만연해 있다. 이는 영화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물음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가장 최상급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최상보다 위에 자리한 빛이 꺼질 때 우리는 심연에 자리하는가. 분명 인간은 가장 깊은 심연이다. 우리가 심연에 자리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거대한 심연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영화 같은 삶을 사는 셈이다. 알 수 없는 영화라는 심연과 그곳에 자리한 당신이라는 무대와 들려오는 목소리에 더는 속지 않기를, 혹은 그곳이 두려워 자신을 가두어 두려고 시도하지 않기를, 삶의 바닥에서 죽음을 말하는 게 단순히 최상급의 표현일 뿐 실제로 이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빛은 무대에 찾아오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