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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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가 떠올리는 대표적인 것들은, 시위나 집회처럼 어느 정도의 갈등을 수반하는 의견표출 활동일 것이다. 물론 정치라는 게 꼭 그런 현장의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탁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는 이상만이 존재할 뿐 실질적인 힘이 없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니, 아무쪼록 강조되는 건 행동으로서의 정치이다. 이때 행동이란, 현장에 나가 시위를 하든 책상에 앉아 이론을 짜든 간에 그것이 ‘얼마나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따져 묻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행동이란 것은 변혁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며, 행동하는 사람이 생길 때 변화는 시작된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대두되는 문제의식 하나는, 우리의 삶에서 어디까지가 정치의 영역이냐는 점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여성 운동의 대표적인 문구가 있지만, 삶에서 여러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개인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정의될지는 불분명하기에 이 문장 또한 혼란을 가중시키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정치라는 단어에 대해 굉장히 다양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이를테면 개인은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다.


먼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모습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현대 사회라는 전제에서 사회라는 단어를 떼고 현대만을 들여다보면, 현대 철학의 어떤 경향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에 걸쳐 있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해당 철학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시대의 흐름에서 가장 뒤에 자리한 ‘포스트~’로 정의한다는 점이다. 이는 영단어 ‘POST’가 우편을 뜻하듯이 과거에서 현대로 보내오는 편지를 손에 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는데, 예컨대 우리는 과거를 보며 우리 자신을 무어라고 정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편지는 자유로이 왕래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보내지는, 오직 수신만이 가능한 일방통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편도티켓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오직 받아들 것만을 요청받는 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티켓이 편도이기에 그곳으로 향할 수는 없으며, 미래로 향한 이상 이미 과거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이때 떠올리는 시간 여행의 법칙 하나.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지만 미래로는 향할 수 있다. 이는 빛의 속도를 추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광속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갈 수야 있겠지만, 당연히 그건 불가능하고 단지 현재를 가두어 미래의 어느 순간에 우리를 풀어놓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게 바로 순간을 박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시간여행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건 현재와 미래 사이의 시간을 반으로 접어 그 사이를 관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자는 냉동인간이라는 방법으로, 후자는 웜홀이라는 방식으로 이론화되었고, 아직은 둘 다 실현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방법론만큼은 유효하다.


그렇다면 그 방법론이 어느 분야에서 유효할까. 그것은 바로 정치다. 먼저 알아본 바로는, 우리가 자신을 정의하는 모습에는 과거에 견주어 현재를 파악하되, 상상은 단지 미래로만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 담겨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미래를 가정하는 방법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현재의 풍경을 그대로 담아 미래의 한순간에 떨어트려 놓는 것. 두 번째, 현재를 미래로 복사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유사해 보이지만 공간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후자는 공간을 반으로 접어 관통하는 것이기에 시간 위의 공간을 따져보게 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시공간이라는 단어로 통칭되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별개의 개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시간은 선형적이지만 공간은 선형적이지도 비선형적이지도 않으며 단지 원형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시간이 멈출 때 그것이 점으로 보인다면, 공간이 멈출 때 그것은 면으로 보인다. 이게 시간과 공간의 결정적 차이이자,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의 두 가지 갈래다.


2.


점과 면. 여기서 빠진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선이고, 선은 곧 시간이다. 그렇게 점을 이으면 선이 된다는 점에서 시간은 선형적이고, 선을 여러 번 왕복하면 면이 된다는 점에서 공간 안에는 여러 시간이 오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모습을 두고 기차에 빗대는 건 현명한 비유이다. 기차는 막대를 하나로 이어 선을 만드는 운송수단, 그러면서 하나의 플랫폼에 여러 선이 오가면서 면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면이라는 승강장에는 열차라는 시간이 오가는데 그 안에는 점의 형태로 된 우리가 있다. 그런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니터 안의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디스플레이 장치는 점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처럼 점이 모여 만들어내는 거대한 착시는 시간이 멈출 때 그것이 모든 인간의 총아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점적인 사고는 대부분 인간에 대한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켄 로치의 ‘정치적인(정치 영화가 아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앞에는 화면 위로 떠오르는 일말의 대사가 있다. 그녀는 인간이란 존재는 모니터 위의 점으로만 묘사되는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모니터 바깥의 사람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는데, 영화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는 몰라도 이 대사가 디지털 시대의 우리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탈구조와 해체의 시대에서 우리가 주로 논하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의 바깥 풍경이지만, 디지털이 만든 풍경의 바깥에는 그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지독하게 오른 인건비에 대항해 사람 대신 키오스크를 들여놓는 가게들과, 키오스크가 장애인과 노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디지털 사회의 아날로그 배격에 대한 논쟁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키오스크의 도입은 비용과 같은 효용을 고려할 때 분명 합리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주변부의 문제가 따라붙는다. 예컨대 정치라는 게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논하는 것이라면, 그건 아주 분명하게도 역학(力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때 역학의 영어 표현은 메커닉이고, 그렇다면 힘의 원리에 관한 표현은 메커니즘이며, 이에 따르면 정치라는 건 결국 힘을 가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에 대한 인식의 시작이다.


언젠가 티브이에 나오는 5G 광고를 보면서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들은, 무엇이든 간에 빠르게 돌리면 흐름의 형태로 보인다는 점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쉽게 말해, 정지된 사물이라도 시간 아래에서는 어떠한 흐름의 형태로 변형된다. 아마도 이것이 사진이 영화로 발전하기 위해 첨가된 중요한 조미료일 것이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이를 두고서 세상 만물 모두가 이어져 있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진이 순간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점에 해당한다면, 이 점을 빠르게 돌려 시간이라는 선형적인 것을 선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영화란 결코 선이 아니다. 영화를 보면 그 안에 수만 가지의 주장이 오가는데 그러니 이것은 선이 아니라 면이고, 우리가 영화라는 스웨터에서 뽑아내는 게 한 가닥의 선일 수는 있어도 그 선이 모두 풀리고 나면 스웨터가 말끔하게 증발해버린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영화를 완벽히 독해할 수 없는 이유이자, 그래서도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영화 한 편을 정복한다면, 정복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형체를 잃고서, 점조차 되지 못하고 세상 안으로 사라지게 될 테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의도적으로 독해를 하지 않아야 하기도 한다. 영화를 분해할 줄 아는 역학자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영화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겠지만, 본래 살던 환경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두면 금세 죽어버리는 생명체가 있듯이 영화 또한 오직 그 자리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 그러니 영화를 통해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다음 둘 중의 하나가 된다. 그것은 영화를 죽일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행동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바라보면서 어떤 역학이 자리하는지를 관찰해 그 원리를 바르게 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3.


그런 맥락에서 영화는 마치 예쁜꼬마선충 같다.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생명이 있는데, 이는 현재까지 인류가 삶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한 유일한 생명체이다. 그러한 이해 덕분에 우리는 예쁜꼬마선충을 컴퓨터 안으로 옮겨 실제 생명을 가상의 생명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가상의 생명이라는 말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생물이 살아가는 원리는 DNA 안에 염기서열 형태로 잠들어있는데, 우리는 예쁜꼬마선충을 완벽하게 독해하여 그의 삶을 모니터 안에 구현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체가 살아가는 원리를 완벽하게 구현했으니 모니터 안이나 바깥이나 결국에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육체를 지닌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생명체라는 의심을 우리는 거둘 수 없다.


육체를 지닌 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생명체라는 말. 이게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모니터 안의 복지체계가 현실의 사람을 보듬지 못한다는 점과 연결된다. 다르게 말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기도 하다. 눈에 띄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돌아봐 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의 눈에 띄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데, 그게 짝사랑이라면 모를까 이권 다툼으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눈앞의 이익 앞에서 사람들은 절박해지고 조급해지며 때로는 눈이 멀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이때 현재 자신의 수준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보다 좋지 않은 삶을 영위하는 타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기도 하다.


물질과 비물질, 가시와 비가시, 디지털과 아날로그. 이것들은 우리가 논하는 정치의 어떤 부분을 가르는 직접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비물질과 가시와 아날로그라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에 대한 확실함을 심어준다는 점은 말해볼 수 있다. 이쯤에서 사이버 테크라는 담론은 인간의 실존 유무에 대한 질문을 넘어 정치에 관한 물음으로 연결된다. 사이버와 정치는 선뜻 연결해 생각하기가 어려운 개념이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고 말하며 점으로부터의 계몽을 주장하는 현대 사회의 정치 운동 경향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니터 안으로부터의 계몽이 현실 정치로 이어진다는 게 어쩌면 사이버스페이스 또한 공론장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과거에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은 광장에 나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영화는 김태리가 나오는 <1987>이다. 그런데 분명, 현대 사회는 아랍의 봄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온라인이 오프라인 모임을 주도하고 또한 오프라인이 해체되어도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모여있는 연속성을 띤다. 예컨대, 우리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현대 사회의 경향 중 하나는 사람들이 하나의 관심사를 토대로 뭉치면서도 단체로는 소속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는 점조직이자 조직이라고 부를 수도 없기에 그저 점으로만 남는다고 말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 현대 사회는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의 변화를 따라가는 듯 보인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디지털이 우리에게 남긴 편리함이 무척 많이 있고, 사람들 또한 그 편리함에 천천히 적응해나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아날로그를 죽여놓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어지는 흐름은 선형적인 게 아니라 원형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의 터전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이라는 역사적 흐름으로 발전한 게 아니라 그 두 가지 모두 우리 삶이 자리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 영향을 미쳐야만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행위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런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육체를 가진,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현실 정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질이 자본에 대응하고 그것이 정치로 이어진다는 점, 또한 그것이 선형적 흐름-역사관을 내보인다는 점에서 왠지 모르게 떠오르는 이름 하나가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건 그것과 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흔히 정치적이라 부르는 것 중에는 꼭 육체를 지닌 것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라는 것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정치적이라는 말은 그런 것의 경향 즉 흐름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라는 흐름은 단지 선형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라 원형으로 뭉쳐져서, 우리가 지금 내디딘 공간을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그러니 아마 이것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정치적 영화를 관람함에 있어 기억해야 할 주의사항일 테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맥락 전부는 아니다. 그것들은 점의 형태로 분해되어 흐름이 되고, 다시금 점묘법으로 응용되어 우리가 모르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치환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했던 말을 이렇게 다시 써야 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게 아니라, 점은 공간을 만들어낸다고 말이다. 그래서 눈을 마주친다는 건 점을 마주한다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꼭짓점을 이어 도형을 만드는 행위이다. 그러나 단지 표면만이 도화지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인식이 닿는 곳까지가 우리의 세상이다. 정치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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