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기억이 이끄는 흘러가는 시간에 관하여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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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시간을 끌어가는 시대가 오다


‘시간을 달리다’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매체는 영화이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화가 최초로 시간을 품에 안았다는 점에 있다. 말이 달리는 모습을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그것을 원통에 넣어 돌렸을 때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는 점을 그들은 발견했다. 머이브리지의 위대한 실험이 23년 후의 뤼미에르에게로 도달했고, 이 시점부터 영화는 폭발적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 바로 그 폭발 이전에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빅뱅 이전의 우주나 원숭이 이전의 인류로 묘사되는 미싱링크가 영화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이른바 시간의 문제, 혹은 기억의 문제이다.


영화에서 시간이란 무엇인지를 논한다면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여러 분야에 걸쳐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기억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 이야기는 범위가 축소되어버린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늘 흘러가는 시간 속을 살고 있기에 ‘움직이는 시간’으로서의 필름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사진이라는 게 ‘순간’의 기억을 담는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기억’으로서의 필름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동굴의 벽화에서 출발해 그림을 거친 우리에게 기억이란 늘 순간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에서 기억을 찾아내는 방식은 인류가 태동한 이래로 사용해왔던 ‘순간’에만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 테다.


이에 대한 여러 인물의 다른 설명이 있다. 먼저 레네. 그는 ‘살아있는 생명은 살아있는 기억’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이 발언은 ‘시간이 곧 기억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사는 인간에게 기억 또한 그렇게 흘러간다’는 점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영화가 흘러가는 시간을 임의로 변형한다는 점에서 그곳에 담긴 기억도 변형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영화에 담긴 기억을 변형하려는 시도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영화를 보는 게 사람이라는 점에서,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할 언어를 만들어내면 안 되었던 것이다. 결국 레네에게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단지 계속해서 이어지기만 할 뿐이다.


바르트는 그런 순간을 두고 푼크툼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알다시피 이 용어는 영화를 보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반대편에는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속해있는 건 ‘움직이는 시간’이고, 그래서 그들은 살아있는 기억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문제는 ‘살아있는 기억’이 묘사한 필름을 과연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느냐는 점이다.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변형된 이것이 다시금 3차원으로 불려 나갈 때, 원본과 동일하게 전달되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요컨대 이것은, 여태까지 정지된 기억을 품에 안고 살아가던 우리가, 어떻게 ‘살아있는 기억’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물음이다.


엄밀히 말해 바르트는 사진에 대해 말했지 영화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푼크툼을 그대로 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평면적인 기억이 단편적인 시간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착안한 번역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바르트의 업적은 기억을 시간의 종속절에서 탈피해 주어로도 활약하게 한 것이다. 본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시간이 기억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기억이 시간을 끌어가는 시대가 왔다. 이 시대의 도래로 사진에 한정되었던 규격이 영화에게도 적용되었다. 즉, 현실의 시간을 기억하려는 용도에서 벗어난 궁극의 영화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기록으로서의 영화가 다큐멘터리라는 시선을 보내던 게 그 변화에 대한 징후이다.


살아있는 기억, 그 꿈속으로 들어가는 가장 첫 번째 단계


다큐멘터리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힘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리얼리즘이라는 말과 동일하지는 않다. 카메라가 취사선택하는 시선에는 시점의 배후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담겨있다. 따라서 시선이 속한 세계를 일차적으로 바라보고, 그 시선이 특정하는 곳을 알아내는 게 다큐멘터리 시청자의 역할이다. 말하자면 다큐멘터리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있는 기억을 찾아내는 장르이다. 이때 바르트식으로 번역하면 ‘흘러가는 시간’은 시청자고 ‘살아있는 기억’은 푼크툼이다. 즉 다큐멘터리란 시청자의 내면에서 푼크툼을 찾아내는 장르이다. 바로 이것이 사진이라는 평면적 입구를 통해 사진이 창조되던 시기의 ‘살아있는 시간’으로 건너가는 방법이다.


사진이라는 평면적 입구 안으로 들어가면 입체적인 세상이 펼쳐진다. 2차원에서 3차원을 경유해 다시금 2차원 세상으로 빠져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2차원 세상에 살던 우리가 어떻게 3차원을 묘사할 수 있을까. 이 불가사의한 경험을 우리는 미싱링크라고 부른다. 이런 식의 표현도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있는 기억인 우리에게, 기억은 이곳에 살아 숨 쉰다. 하지만 그 기억이 마음속 어딘가에 저장되는 순간에는 사진과 같은 단편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버린다. 이때 그 기억을 다시금 입체적인 형태로 불러올 수 있는 건 ‘꿈’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초자아의 힘에 의존할 때뿐이다.


우리가 영화를 꿈에 빗대는 게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들뢰즈의 ‘뇌는 스크린이다.’라는 문구처럼 스크린 안에서 펼쳐지는 꿈은 우리의 기억이 그만큼 살아있다는 증거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라는 두 가지 갈래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리얼리즘과 비리얼리즘의 차이가 아니라 ‘그럼에도 뇌는 꿈을 꾼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나열한 인물의 순서를 바로잡으면 바르트가 먼저고 레네가 후에 와야 한다. 기억이 시간을 소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만 ‘기억을 가진 감독’이 필름에 시간을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꿈을 꾸는 감독만이 시간을 다룰 수 있다.


다르게 보면 꿈을 꾼다는 건 시간을 다룬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바르트가 쥐여준 건 컨트롤러고, 레네가 행한 건 꿈 프로그래밍이다. 들뢰즈는 그 프로그래밍을 시각화하여 UI를 만들어냈다. 현대 영화가 디지털 세상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그곳으로 향할 출입구를 세웠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공헌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식으로 영화를 읽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가 아니더라도 현대 영화는 우리와 감독 사이에 있는 미싱링크를 알아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걸 두고 우리라는 제1세계, 감독이라는 제2세계를 넘어 존재하는 ‘제3세계’라고 칭해야 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우리는 살아있는 기억, 그 꿈속으로 들어가는 가장 첫 번째 단계에 들어섰다.


다큐멘터리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있는 기억을 찾아내는 장르’였으므로, ‘기억이 시간을 견인하는 시대’에는 영화가 아닌 우리가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우리가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 영화가 우리를 찍는 시대다. 이때 영화가 우리를 찍는다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내가 당신을 바라본다면, 당신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혹은 “내가 그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나를 욕망하는 겁니다.”라는 주술관계의 역전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이 말이 영화의 고전기에 리얼리즘의 정수를 드러내었다면, 반대로 현대 영화에서는 그 주술관계의 정중앙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를 포착하려는 시도가 주가 된다고 할 수 있을 테다.


기억이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방법으로 시간을 선택하다


때때로 우리의 모습은 영화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우리를 묘사하려는 의도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흘러가는 시간이 만들어낸 살아있는 기억이고, ‘살아있는 생명은 살아있는 기억’이라는 말에 따라 그 시간이 만들어낸 건 하나의 생명이 된다. 바로 그렇게 영화는 스크린에 흘러들어온 기억들의 모음집이 된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영화란 뇌에 흘러들어온 기억, 시각적이면서도 청각적인 ‘이미지’의 운동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운동 이미지를 찾아내는 작업이 ‘살아있는 생명을 보듬는 것’이 될 수 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이 생명체는 감독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기억이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방법으로서 시간을 둘러싼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무언가를 기록하는 매체’이거나 혹은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여기고는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기억하기 위해 몇 번이고 극장에 간다. 이때 사람들은 영화의 장점이 시간을 기록했다는 점, 그래서 몇 번이고 돌려볼 수 있고 그것만이 이 시간을 기억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가 자신을 기록한다거나 기억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인간이 ‘시간 속에 담긴 기억’이기에, 영화가 시간을 달리는 매체라는 점에서 그 기억은 시간에 종속될 것으로 믿게 된다. 하지만 이 말에 따르면 영화에는 시간이 흐르므로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는 기억이 끝나버리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 영화를 반복해서 관람하는 행위는, 죽은 이를 살려내고 다시금 죽는 모습을 목격하는 슬픈 광경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끝나버릴 시간임을 알면서도 그를 다시 마주한다는 점에서 이 모습은 이미 죽어버린 시체를 붙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때 불현듯 떠오르는 추리 중에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제1세계와 제2세계의 구분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이곳의 시간이 저곳을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 만큼이나 그들도 그곳의 시간이 이곳을 기억해야 한다고 믿을 테다. 이 역할 교환을 통해서 우리는 기억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리고 보통 이런 일은, 우리에게 그만큼 전하려는 이야기가 있을 경우에 해당한다. 시간순으로 따져보면 영화를 만들고 난 후에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이므로,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과거로부터 온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 메시지는 중간에 놓인 미싱링크, 우리가 알 수 없는 제3세계를 건너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셈이다.


우리가 이 메시지를 관찰하면서 얻어낸 결론은 그곳과 이곳 사이를 전제로 한 출입구가 그곳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게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얻어낸 최근의 유효한 결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영화라는 게 그동안의 매체처럼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만 여겨졌지만, 사실은 관객과 감독이 스크린을 두고서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담론적인 측면, 철학적인 측면으로의 접근이라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게임과 같은 형식으로 실시간으로 오가는 것만이 상호소통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이전까지와 다른 형식을 취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영화를 생각하는 방식을 달리하는 게 디지털 시대에 더 맞는 방식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죽은 어떤 감독의 영화를 볼 때, 그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 궁금한 게 있다면, 감독이 살아생전에 행했던 여러 기록을 찾아보게 될 테다. 왜냐하면 그 영화는 감독이 살아있던 시대, 그 시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기억을 품고 있기에, 영화라는 기억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가 기록된 시간으로 떠날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과거에서 보내온 메시지가 영화에 담겨 있음을 깨우쳐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이곳에 건너왔는지는 모르지만, 반대로 보면 그가 영화로 향하는 출입구를 열어주었기에 그곳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이곳에 사는 우리가 기억의 문을 열고 속으로 향할 때, 그 속에는 죽어버린 그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정확하게는 살아있기보다 남아있다고 보는 게 맞다. 첫 번째, 시간이 낳은 산물인 기억으로서의 영화에는 그런 시간의 자투리가 남아있다. 두 번째, 살아있는 기억인 그가 만들어낸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기억을 맛본다. 마침내 세 번째, 시간 안에 살아있는 기억인 그가 만들어낸 이 시간 속에는 ‘시간이 이끄는 기억’의 자투리가 남아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시간이 이끄는 방식으로 기록된 레코드판을 거꾸로 돌리는 것, 기억이 시간을 끌어내면서 들려오는 백마스킹을 즐겁게 감상하는 일이다.


디지털 시대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풍경은 우리가 죽은 이의 모습을 신기루처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독들은 말이 아니라 이미지로 말하고, 그런 이미지에 담긴 운동력이 시간을 견인할 때, 비로소 기억은 자신의 등에 달린 태엽을 감게 된다. 이 되돌아가는 기억을 바라보면서, 단순히 바라보지만 않고 그 위에 올라타 시간을 함께 보낼 때, 영화를 감상하는 일은 하염없이 그리운 누군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된다. 살아있는 생명이 살아있는 기억이라고 해서 죽은 생명이 죽은 기억인 게 아니라는 뜻이다. 감독의 손을 떠난 후부터 필름의 시간은 생명에 종속되지 아니하고, 기억의 잔존물에 약간의 시간을 넣는 것만이 그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 살아있는 기억이 이끄는 흘러가는 시간에 대하여 우리가 물음을 묻고자 한다면 그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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