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삶과 죽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을 마주하게 되면, 영화의 임종을 목격한 것만 같아서 마음 한편이 허전하다. 여태까지 우리가 보아온 삶은 어디로 떠나버린 걸까.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곳 어딘가에 남아있다. 요컨대 우리는, 이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진다.
스크린이라는 이름의 강을 건너버린 그들이 어디에 있을지에 대한 물음을 던져보면, 이성적인 부분보다는 감정적인 부분이 먼저 다가오기 마련이다. 남은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물음이 이성적인 추론이라면, 그에 앞서 다가오는 감정은 죽음이다. 말 그대로, 스크린에 어둠이 찾아올 때 그것은 영화의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보지 못하는 상황이 죽음밖에 없다는 점에서 귀인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는 순간은 우리가 눈을 감는 순간에 대응한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종의 임사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그런 임사체험을 욕망하는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희열, 타나토스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타나토스라는 표현이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별 게 아니다. 눈을 감는 게 죽음을 연상시킨다면,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이는 우리는 이미 죽음에 익숙하다는 말이 된다. 요컨대, 우리는 죽음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면서 기쁨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죽음에 쏟는 감정만이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 행위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고, 따라서 ‘본다는 것(Ways of Seeing)’으로서의 죽음은 이미지로 유희하는 인간에게 있어 별 대수로운 게 아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본다는 것 또한 죽음에 대한 유희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죽음을 즐기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것이다. 어둠 속에 빛이 찾아오는 순간의 ‘환희’를 경험하기 위해서 말이다.
영화 한 편을 보는 게 어둠과 빛의 측면에서 눈의 깜빡임 한 번에 대응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눈을 계속해서 깜빡이게 되므로 영화 관람도 줄곧 이어지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일상적으로 영화 보기를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는 한 번에만 그치지 않으므로 거시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영화를 계속해서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눈 한 번이라는 ‘찰나’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영화와 나누는 추억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사진과도 같은 감정은 이 대목에서 생성된다.
재미있는 건 이런 찰나의 감정이 죽음이라는 것, 그런 본능과 연동되어 우리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마치 망막처럼 작동하는 스크린의 구조가 찰나를 만들어낼 때, 우리 현실이 그곳에 겹쳐지면서 기시감을 불러낸다. 삶을 살아가며 영화의 어떤 순간을 소환해내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을 테다. 이런 공감에 대해서는, 삶 속의 영화이거나 영화 속의 삶이거나 그 어떤 표현도 허용된다. 즉 우리는 영화관이라는 세계를 살아가는 영화이다.
영화라는 게 초당 24개의 사진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그 모든 것에 찰나를 떠올리고 대응하는 게 곧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 영화를 본다는 것은 찰나의 어둠을 경험한다는 말과도 같다. 삶의 힘든 순간에 영화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면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인생에는 명과 암이 있고, 삶이 어두워질 때마다 영화의 찰나는 우리 속으로 침투한다. 그러한 침투를 계속해서 경험하다 보면 주객이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우리와 영화의 찰나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우리라고 할 수 있는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던지는 물음은 내가 영화인지 영화가 나인지와 같은 호접몽이 아니다.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곳에 있는 나를 찾아 떠나게 된다. 영화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담론은 그렇게 생성된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삶과 사회에 관한 여러 실천적인 행동은 그곳에서 우러나온다.
영화와 삶의 경계가 사라지다
그런데 현대에 영화를 볼 방법이 많아지면서 영화관이라는 근본은 흔들리게 된다. 갤러리와 같은 세계의 벽에 걸린 영화는, 스크린의 경계를 해체하는 동시에 그에 대응하는 우리의 망막 또한 해체한다. 즉 영화관을 탈출한 영화는 물질적인 의미에서 우리 삶으로 침투하게 된다. 앞서 말했던 지점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세계가 직접적으로 영화관에 대응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스마트폰과 같은 도구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영화관을 손안에 두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영화관조차도 도구가 되었다. (우리가 순수하게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던 시절이 지났다는 점으로 증명된다. 4DX, Dolby Atmos, IMAX. 이것들은 영화가 아닌 ‘영화관’이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영화를 보는 공간이 영화관이라고 할 수 있다면, 스마트폰이라는 개인 영화관에서부터 출발하는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특정한 공간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를테면 온라인상에서 실시간으로 공개되는 영화를 모두와 같이 본다는 것은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해체를 의미한다. 요컨대, 영화란 무엇인가를 묻기 이전에 영화관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다. 이런 물음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영화관이라는 어둠 속에서 찾아냈던 우리 삶의 찰나가 그런 어둠을 벗어났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이제는 죽음이란 더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빛 속에서만 영화는 존재한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꺼지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접속되어있다.)
그렇다면 기존에 영화가 갖던 어둠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둠이 찾아올 영화관이 사라진 지금, 불이 꺼지지 않는 문명은 영화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현대 도시 문명은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꺼지지 않는 밤을 선사했던 것의 연장선에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영화는 뤼미에르가 현실의 대립으로 영화관을 선물했던 것의 연장선에 있다. 요컨대 우리는 뤼미에르가 발명해낸 게 단지 영화뿐만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뤼미에르가 에디슨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영화를 다 같이 한 공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뤼미에르의 발명은 열차가 아니라 열차역이다.
카메라에 포착되었다는 점에서 죽음을 초월한 것들이, 기술의 발달을 통해 영화 자체로도 죽음을 초월하게 되었다. 한번 인터넷에 올라간 영화는 사실상의 불멸을 획득한다. 일종의 아카이빙(Archiving)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죽음을 갈망하게 되었다. 디지털 세상이 우리에게 쥐여준 게 기억의 기능을 신체 외부로 확장하여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었지만, 반대로 보면 기억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억된다는 말이 이전과는 다른 면으로 슬프게 들려온다는 점이 정말로 슬픈 일이 되어버렸다. 잊고 싶은 기억이라는 말은 더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의 공간은 이제 그저 빛으로만 존재한다.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말이 이토록 슬프게 들려오던 때가 없었다. 터널의 끝에 빛이 있다고 믿으며 희망을 바라던 우리가, 오히려 그런 빛을 혐오하게 되었다는 대목이 그렇다. 그리고 이 말은 여러 번 반복된다. 삶의 끝자락에 죽음이 있다고 믿으며 주어진 삶에 충실하겠다는 마음이 오직 삶으로만 향하게 되었다. 죽음, 그 어둠이 우리의 인지 밖으로 사라져버리게 된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켜진 불 속에 앉아 사라져버린 영화의 흔적을 쫓던 우리는 이제, 오로지 영화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영화를 언제든지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해체해버렸다.
영화를 자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영화와 삶의 경계가 사라졌다는 점에 있다. 눈을 깜빡이는 게 영화의 시작과 끝, 그 열차의 도착이 반복되는 회귀의 순간에 대응한다는 맥락에서, 우리에게 찾아온 광명은 찰나가 사라졌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요즘의 우리에겐, 단순히 영화를 본다는 것 이외의 의미는 남지 않은 듯 보인다. 요컨대 근래의 영화는 영화보다 게임에 더 가깝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이미지를 조합하는 게임을 시작한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 받은 인상이 인간의 한계로 인해 불완전하게 남는 탓이다. 즉 이 이미지의 불완전함만을 충족하려 드는 게 최근 우리 모습이다.
어둠 속에서 별자리를 헤아리는 게임
영화의 스크린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IMAX를 필두로 점점 커져만 가는 스크린과 그곳에 걸리는 영화의 예매 쟁탈전은 이미지에 몰두하는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마 그 끝은 이미지 속에 우리가 뛰어드는 것일 테다. VR과 같은 사이버 스페이스로의 직접적인 투입, 현전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이 불러오는 반작용이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죽음을 그리워하면서 이미지를 찾는데, 그 능력이 바로 긍정적인 면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흩어진 이미지를 조합해 새로이 형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있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이미지와 그림자 중에 한쪽만이 남은 현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한쪽을 이용하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 하나를 나누어 조각내고, 그것을 다른 것과 조합해 다시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이 말을 이렇게 쓸 수도 있다. 우리는 영화 하나를 분석하고, 그런 분석을 다른 것과 조합한다고 말이다. 과거의 영화 관람이 삶과 영화를 공명하는 방식으로 담론을 생성해내었다면, 근래에는 그것들을 블록 형태로 보관하여 모듈을 조립하게 된다. 말하자면 근래의 우리에게는 영화를 기억하는 것보다 영화를 검색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망각이 사라진 시대에 영화를 기억하는 행위는 이제 큰 의미가 없게 되었고, 공존하는 숱한 기억 중에 필요한 몇 가지를 특정하는 능력이 필요해졌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우주다. 유리 로트만은 이를 두고 기호계(semiosphere)라는 표현을 썼다. 로트만은 기호들의 우주가 일종의 생태계로 작동한다고 말하면서 영화도 그 범주에 포함시킨다. 이 맥락에 따르면, 영화라는 것은 내적으로 이미지를 주고받으며 새로이 이미지를 생성해낸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가 이미지를 잡아먹고 교배하고 그런 식의 우주가 성립하게 된다. 즉 단절이 사라진 영화는 끝없이 타오르는 용광로와도 같다. 이 용광로는 밝게 빛나는 등대처럼 절대로 꺼지지 않고, 항상 우리에게 어딘가로 향할 길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죽음이 사라진 영화라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미지가 넘쳐나서 혼란스러울 듯하지만, 그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우리라는 주체가 등대처럼 방향을 제시해준다.
우주의 광활함이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지만, 죽음을 극복한다는 게 우주 밖으로 나간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영화라는 우주에 속해있다. 그 우주에 박혀있는 게 이미지라는 이름의 별들이다. 이때, 이미지의 불확실함에 몰두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별빛만이 남는다. 말 그대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며 별자리 찾기에만 관심을 보이곤 한다. 이미지를 이어 해석을 조합하는 행위가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그려내는 것과도 같다는 소리다. 물론 이게 나쁘기만 한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별자리를 찾는 행위에는 우주에서 오는 별빛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요컨대 디지털 시대의 우리가 이미지(은유와 상징)만으로 영화를 해석한다는 것은 그런 수동성만으로 낭만에 푹 젖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일어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영화라는 우주는 아직인 듯 보인다. 우리는 아직 영화에 있어 진정한 의미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이것은 단순히 어딘가를 바라봄에 있어 서 있을 자리를 확보하는 것에 그친다. 망원경을 세우는 그 자리 말이다. 이러한 한계는 지구에 천문대를 세우던 시대에서 우주에 망원경을 띄우는 시대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지구라는 주체에 머물기만 해서는 더 넓은 곳을 볼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대안으로 선택된 게 우주에 직접 눈을 두는 행위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다시 말해서, 우리가 더 넓은 지평을 보려면 영화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영화라는 게 하나의 공간이라고 가정할 때, 죽음이란 게 사라졌기에 영화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위험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도 여전히 과거의 관측방법을 고수하는 우리는, 죽음이 사라졌다는 점을 까맣게 잊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미지의 조합을 게임처럼 즐기는 근래의 풍토는 어떤 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죽음이 사라지고 삶만이 존재하는 시대에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디지털 시대가 영화관의 자리를 빼앗아간 듯 보였지만, 사실 우리는 여전히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무지를 어둠에 빗댈 수 있다면, 영화가 끝난 후의 영화관은 무지가 돌아오는 공간이다. 빛의 형태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오던 이미지가 주입되기를 그칠 때가, 영화의 마지막 순간인 셈이다. 그렇다면 영화관이 사라지고 빛만이 존재하던 시대는 무지가 없는 시대가 되었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영화에 대한 말이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소통이 편리해졌다고 해서 상대를 이해하기가 쉬워진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게 편리해졌다고 해서 작품을 이해하기가 쉬워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안개와도 같은 어둠이 이미지의 우주를 채우고 있다. 우리가 조합이라는 게임에 몰두하게 된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등대가 아무리 멀리까지 볼 수 있다 해도 자신이 서 있는 장소만큼은 밝히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비추어주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