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투어리즘과 꿈의 섬, 그 사이의 아이러니에 관하여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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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은 살아있는 자만이 꿀 수 있다. 은유적으로나 직유적으로나 그렇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뇌는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꿈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꾸게 될 삶의 원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꿈에 관한 흥미로운 공간이 하나 있다. 일본의 도쿄에는 한때 쓰레기 매립지였던 장소가 있는데, 이름은 유메노시마로 직역하면 꿈의 섬이라는 뜻이다. 꿈의 섬이라 불리는 이곳의 이름은, 한때는 쓰레기 매립지였다가 지금은 공원이 된 현 장소에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이름이 붙여진 것은 본래 이곳에 유원지가 들어설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원지로 개발할 것을 쓰레기 매립지로 변경한 것은 아니다. 전후에 잠시 유원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가 취소된 이 섬의 역사를 빌어 언론이 그렇게 이름 붙인 것뿐이다.


유원지가 꿈을 품은 장소라는 점에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유원지 부지에서 쓰레기 매립지가 되었다가 다시금 공원이 된 이 섬의 역사에서 꿈의 섬이라는 칭호는 어떤 역할일까. 지금은 한산하고 아름다운 공원이지만 과거에는 쓰레기 섬이었으니, 이 섬의 본질이 쓰레기라는 점에서 허황되거나 거짓된 꿈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았을 때가 기준이다. 이 섬이 쓰레기 매립지가 되었을 때 언론이 꿈의 섬이라는 호칭을 붙였던 걸 생각해보면, 쓰레기 매립지가 꿈의 섬이라고 말하는 게 된다. 그리고 이때 왜 쓰레기가 꿈으로 지칭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이 온전한 꿈이 아니라 버려진 꿈이나 꿈의 잔존물이기에 그러하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때는 빛나는 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이 꿈의 섬에는 더러움과 추악함이 감지된다. 하지만 이 섬은 제 역할을 다하고 흙으로 덮여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니 이제는 본래 의미에서의 꿈의 섬이 되었다. 그러나 그 중간에 거쳤던 과정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섬의 호칭에 대해 아이러니함을 느끼게 된다. 꿈일 수도 있던 것들이 제 역할을 다하고 버려졌던 곳, 그렇지만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새로운 현재가 된 곳. 여기까지 읽었으면 알겠지만 이 섬을 벤치마킹해 만들어진 게 바로 한국의 난지도다. 그러니 직접적으로는 아니겠지만, 난지도와 꿈의 섬은 탈바꿈한 쓰레기 섬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띤다. 서울과 도쿄라는, 대도시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몸으로 감당한 이 장소가 경제성장이 막 이루어질 때 사용되었다가 그것이 막 종료될 무렵에 비로소 안식을 되찾았다는 점도 그렇다.


꿈을 찾아 대도시로 상경했던 이들이 남긴 잔존물이 쓰레기로 지칭된다는 점에서 쓰레기 매립지를 꿈의 섬으로 부르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꿈의 섬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함의가 일종의 메타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역사에서 슬픔이나 비극이 벌어졌던 장소를 잊지 않기 위해 하는 관광을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나 아우슈비츠와 같은 곳에 방문하는 게 대표적이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비극이라는 단어에 관광이라는 단어를 접붙이기란 도덕적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지만, 다크 투어리즘의 목적은 기쁨이나 유희를 느끼려고 하는 관광만이 아니라 슬픔과 비극을 되새기는 관광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역사적 현장이라는 것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느낄 수 없지만 과거에는 이곳에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점이, 지금은 공원이 된 꿈의 섬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쓰레기라는 게 용도와 수명을 다한 물질이라는 점에서 쓰레기 매립지는 일종의 ‘남겨진 것들’이고, 그렇게 남겨진 것들을 우리 눈에 띄지 않도록 그 위에 흙으로 덮어 공원을 만든 게 꿈의 섬이다. 하지만 꿈의 섬은 이곳이 쓰레기 매립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곳곳에 알림판을 만들어두었다. 한국의 꿈의 섬에 해당하는 난지도 하늘공원에 가보면 그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을 덮어둔 건 남겨진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초빙하기 위해 그 흔적을 지우고 길을 닦아둔 것이다. 즉 이곳은 현재이지만 과거를 무너뜨리고 세운 곳이 아니다. 이곳은, 새로운 과거이다.


2.


여행은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서 자신을 되찾는 행위다. 그러니까 본래의 의미로 보면 관광과 같은 상업적 이미지가 침투할 여력이 없다. 돈에 의해 소비되는 관광이라는 이름의 여행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에서 사용하는 돈과는 다른 가치를 지닌다. 그런 이유로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이들은 그에 거북함을 느낀다. 다크 투어리즘의 목적이 역사와 과거와 되새기기 위함이라 하더라도, 돈에 의해 지배되는 종속의 원리를 위계와 같은 무언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크 투어리즘의 의도는 관광을 운영하는 쪽이 아닌, 여행을 하려는 이들의 수요를 보조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쉽게 말해 다크 투어리즘은, 어두운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들의 어떤 경향인 것이지, 어두운 곳을 상품화하는 상업적 논리가 아니다.


그러니 얼핏 보면 어두운 곳을 찾아 떠나는 다크 투어리즘을 두고서 꿈의 섬과 같은 단어, 구체적으로는 꿈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건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크 투어리즘의 현장 대다수는 붕괴 이전에 꿈을 품은 장소였었다는 점에서 그런 표현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조차 그게 과연 정말로 우리의 꿈이었는지에 대해 논박이 오갈 수도 있지만, 아이러니적 표현으로 사용한다면 그런 것들의 다수는 환상에 가까운 무언가로서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체르노빌의 기억은 인류에게 무수한 에너지를 안겨주는 원자력이라는 것에 대한 이미지의 반전을 불러왔다. 원자력은 적은 자원으로 무수한 에너지를 뽑아내는 기술이었지만, 통제에 실패하면 엄청난 위협을 겪게 된다는 점에서 아직 인류에게는 기술을 포용할 그릇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경고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체르노빌이라는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그것은 부풀어 오른 꿈이 하룻밤 사이에 악몽으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체르노빌의 원자력 4호 동은 석관에 갇힌 채로 폐쇄되었으며, 그 모습은 마치 사방이 가두어진 섬처럼 보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두고 ‘꿈의 섬’의 안티테제로도 볼 수 있을 테다. (이 글에서 꿈의 섬이라는 단어는 부풀어 오른 절망과 꿈의 유연한 전환이 하나의 갇힌 공간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도쿄의 ‘유메노시마’에서 꿈의 안티테제가 쓰레기 매립지였음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체르노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도 그 의미가 유사하게 되풀이된다고도 할 수 있다. 꿈의 섬이 쓰레기 매립지가 되고 다시금 공원이 되는 과정에서는 꿈이 쓰레기로, 쓰레기가 꿈으로 차례로 바뀌게 되는데, 그건 마치 체르노빌이 꿈의 에너지에서 완벽한 대재앙으로, 대재앙에서 역사적 교훈의 장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교훈을 빌려 오자면 영원한 것은 없다거나,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것을 꿈의 섬이라는 단어로 지칭할 때 벌어지는 의미의 ‘변화’이다. 이를테면 사건 현장을 꿈의 섬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단순히 사건 현장에 대한 외부세계와의 격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어떤 맥락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우리가 알더라도 꿈의 섬이라는 단어에서 그릇되거나 배반된 것으로서의 꿈의 성질을 읽어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릇되거나 배반된 것으로서의 꿈의 성질을 단어 하나로 표현하자면 아무래도 배덕감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금단으로 설정된 꿈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니 그 꿈을 두고서 에덴동산의 사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컨대 금지된 것을 취하며 우리가 얻는 것들은 그릇되고 배반된 것들, 선을 넘음에서 오는 부도덕함에 대한 쾌감의 징후이다. 그리고 그 쾌감의 징후에 대해 논하자면, 과거에는 슬픔과 통곡으로 가득했던 꿈의 섬이 지금에야 정말로 꿈의 섬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우회적인 욕망의 표현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에게 다크 투어리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다크 투어리즘이 꿈의 섬을 탐험하려는 이들을 보조하는 성격이라는 점을 위에서 말했다면, 이 단락에서는 그렇게 탐험하는 이들이 단지 속죄와 참회 또는 교훈을 얻으려는 목적으로만 방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한다.


3.


슬픔과 비극의 거리를 꼭 침울한 마음으로만 걸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현장에 방문해 직접 공기의 떨림을 느껴보았다는 점이다. 현장으로 이끈 계기가 속죄와 참회여야만 한다면 현장에 방문하는 이들은 그 수가 적거나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속죄와 참회의 감정은 자신이 그 현장의 일원이었고 그곳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공동체 의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때 위험했던 현장에 방문함으로써 얻는, 자신이 아는 상식에 대한 금단의 영역을 넘어감에 대한 배덕감이 꿈의 섬에 대한 단적인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도착한 공간이 주는 현장감이 방문자의 몸을 아우를 때 그곳에는 현장이 아니라면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정보가 체험의 기표로 다시 태어난다. 말하자면, 디지털 시대가 여러 형태의 시뮬라크르를 만들어내고 있는 와중에 그 어떤 것에 현혹되었든 현장에 방문해 얻는 단 하나의 체험은 방문의 행위만으로도 추체험에서 원체험으로 넘어가게 된다.


흔히 사람들이 추체험을 선호하는 이유는, 사라져버린 역사적 현장에서 겪은 일이 원체험인 것에 반해, 그게 있었던 시공간은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뒤로 사라지므로 그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방법은 오직 추체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의 섬의 경우에는 그런 체험의 경로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꿈의 섬은 만연했던 꿈이 쓰레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지정된 규모가 특정한 공간의 좌표를 지정하게 되는데, 이는 쓰레기가 다시금 꿈으로 변화하더라도 그대로 유지된다. 쉽게 말해 최초에 꿈의 섬이 모두의 기대를 세상으로부터 다방향으로 끌어당겼다면, 그것을 한 자리에 응축해 고도로 농축된 에너지가 쓰레기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그곳은 필히 감금해야 할 장소가 되고, 이 대목에서 해당하는 공간에는 고도로 밀집된 에너지가 자리한다. 그런 이유로 꿈의 섬은, 그곳이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무언가의 정취가 늘 있게 되고, 그것은 시간이 어떻게 되더라도 에너지를 붙잡아둔 공간의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있으면 여전한 체험의 정취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만연하는 긍정에서 협소한 부정으로, 협소한 부정에서 배반하는 긍정으로,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우리가 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강력한 자장을 형성한 꿈의 섬 안에서 우리가 배반적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는 점이 인터넷 시대의 몇몇 이야기와 닮은 지점이 있다고 생각되어서다. 이를테면 지금 시대에 강력한 자장을 지녔던 몇몇 것들이 유희의 형태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는 꿈-쓰레기-꿈이라는 협소화의 절차가 있다. 물론 그것이 사건이 벌어진 공간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졌던 사물이거나 사람의 주변 자장이라는 점에서는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꼭 반성해야만 할 무언가이거나 교훈을 주는 특정한 사건에만 그 다크 투어리즘의 범주가 한정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유메노시마의 모습에 비추어볼 때, 다크 투어리즘이 진행되기 이전에 그곳에는 만연하는 꿈을 국지화하기 위해 그곳을 쓰레기장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 여기에서 노력이란 일부러 쓰레기를 버린다는 게 아니라 쓰레기는 그곳에만 갇혀 있어야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방어막의 형성이라는 점을 가정하면, 만연하는 꿈과 협소화하는 쓰레기의 두 가지 갈래가 금단의 열매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과정에는 갱생이거나 회개이거나 하는 불로의 면모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시대에 주목받는 뉴트로(New-tro)가 본래의 맥락은 잃어버린 채로 낯선 것이라는 이질적인 표지만을 드러내듯이, 설사 다크 투어리즘으로 향하는 장소가 본래의 맥락은 잃어버린 채라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공간이라는 이질적인 표지만을 지닐 뿐이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참사로서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과거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는 어떻게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다가올 수 있는가, 혹은 우리 새로운 과거라는 말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 자체는, 어떤 면에서 아직 우리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진보 없음에 대한 자책적인 발언일 수도 있지만, 과거를 현재에 불러올 필요가 있다면 그것이 단순히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체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거라고 말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런 본체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광의의 것을 받아들이다가 종국에는 광의로 흩어져버리는 꿈의 섬이 아닌, 쓰레기 매립지라는 부정적인 것으로라도 협소한 장소에 격리되었기에 끝내는 그런 분리가 오히려 사건의 보존이 더 잘 되는 계기가 된 덕분이다. 아마도 이게 다크 투어리즘의 저편에 있는 꿈의 섬에 대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한다. 꿈의 섬의 어둠은 결코 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환대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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