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없는 영화라는 말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비평을 포함한 영화글 전반에 관한 문제다. 먼저, 영화와 사촌 관계에 있는 문학의 경우에는 문학 비평의 범주가 꽤 넓다. 문학 비평을 쭉 읽다 보면 정작 문학에 대해 다루지 않는 글도 수두룩하다. 시 평론, 소설 평론이 아닌 사회에 대해 말하는 글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물론 누군가는 텍스트의 바깥에서도 비평은 성립할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보아야 할 작품은 안 보고 밖으로 놀러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는 문학이 사회에 뿌리를 내린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특히나 한국 문학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풍경으로부터 출발했기에 더욱 그렇다. 문학은 지식인의 전유물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를 짊어진다는 점을 시사했다. 이 점이 현대 한국문학에서의 최대 화두이기도 하다. 문학을 한다고 해서 꼭 지식인이 되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지식인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며, 그가 수행해야할 의무란 무엇인가? 일제를 거쳐 독재의 시절을 지나 온 우리에게 남은 지식인의 길은 어디로 향할까. 노란 벽돌길을 지나 오즈의 성으로?
바로 그런 이유로 문학 비평은 텍스트만을 다루지 않는다. 텍스트를 심은 밭으로 나가 토양을 조사하고 기후를 예견하는 것이 문학 비평가의 일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비평가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역할을 묻게 된다. 올바른 문학을 위해서는 동시대의 부름에 답하고 응당한 목소리를 내는 게 문학 비평가의 의무-지식인의 의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문학이 사회로부터 태동한다는 테제 자체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소통하지 않는, 숨 쉬지 않는 문학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고들 하지만.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채 존재하는, 말하자면 절벽 끝에서 ‘자생하는’ 무언가의 여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바톤을 넘겨 영화 비평에 대해 말해보자. 영화는 만인의 예술이다. 회화나 문학, 사진은 작가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지만, 영화는 그게 불가능하다. 영화는 여러 명이 모여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나, 여타 다른 예술의 속성을 지녔다는 점에서나 복합 다중예술이다. 그러니 영화가 자생한다는 물음은 적어도 제작과정에서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보면 이 물음은 존재론적인 면에서 탐구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어떻게 세상에 내쳐지는가. 혹은 어떻게 내쳐지게 되었는가, 라는 완성 이후로부터의 물음.
이 탐구 과정 속에 영화는 고향으로부터 떠나와 완전한 서울 사람이 된다. 그는 출신지를 잃고 서울 천만 시민 중의 한 명에 불과한 무정형의 시민이 된다. 하지만 그는 광화문 광장에 나가 그곳에 있는 여러 집회 중 하나에 참가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금 고개를 드는 의문은 그가 집회에 참가한다고 해서 그곳과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고향으로부터 떠나왔다고 해서 꼭, 향수병에 걸리는 게 아니라는 점과 동일하다. 고향이 고향인 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이 연결되어 있을 때에 한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영화가 문학처럼 동시대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면, 참가요건은 개인으로서일까 단체로서일까? 즉, [경기도 안양의 이준영]은 안양 소속일까 아니면 이준영의 대변인일까?
2.
영화계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진 것은 영화를 어떤 단체로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르자면 영화는 어떤 세상으로부터 떠나온 게 아니라, 어떤 세상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는 마법의 성으로 공주를 구하러 가는 왕자님처럼, 출발지점에서 동시대가 요구하는 담론을 짊어진다. 그렇기에 마왕은 용사를 적대할 수밖에 없다. 용사는 공주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자신을 혐오하는 무리의 의견을 대변하니 말이다. 말하자면 마왕은 용사가 아니라 왕국과 싸운다. 따라서 이때 용사는 왕국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용사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왕국으로부터 떠나온 용사라는 호칭으로만 불리게 된다.
반대로 묻자면 이렇게 용사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처럼 묘사하는 몇몇 이야기의 모습은 마치, 영화를 어느 한 순간 극장에 떨어져 나온 현실의 일부분으로 여기는 것을 연상케 한다. “옛날 옛적에”라는 말 한마디가 그들의 기원을 쉽게 대체해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를 남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발단이 어떠하든 간에 문학 비평에서의 리얼리즘 문제가 동시대로부터 담론을 수혈받는 것은 분명하나, 영화 비평에서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동시대라는 시공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동시대는 사진이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때부터 이미 어긋나 있었다. 동화의 시작 부분이 늘 한 편의 삽화로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떠나온 세상은 없고, 이곳의 현실만이 있다는 단호한 선언.
그러니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거나,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을 두고서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출발지점을 보여준 후, 여정을 거쳐 다시금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무대에서 출발장소는 곧 결론장소이기도 하다. 즉, 이곳에서 변화하는 것은 시공간이 아니라 등장인물이다. 그동안 보고 듣고 겪은 일이 바로 리얼리즘, 살아있음의 증표이자 동시대를 흡수하는 스펀지 같은 육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서사, 주로 ‘신화’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반면 출발지점에서 영원한 결론 지점으로 항해해 가는 이들에게서는 변화하는 시공간이 곧 리얼리즘이다. 이는 영화가 필연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책을 열고 닫을 때 독자의 시공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의 서처럼 수천년을 관통해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아주 잘 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러닝타임이 얼마나 되는지 대략 확인해보곤 한다. 이를 인간의 조건으로 옮겨본다면 우리는 영화의 수명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사신 류크의 눈처럼, 우리가 쳐다보는 모든 영화에 그들의 남은 수명이 기재되어 있다. 서사로 본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무언가를 절실히 해내야만 한다는 중압감이 올 수도 있겠다. 서사라는 것은 곧,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 문학의 증표이며, 그가 리얼리즘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영화의 서사는 무언가를 절실히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는 것에 있다. 문학의 리얼리즘이 동시대의 현실세계를 얼마나 잘 글로 옮겨내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영화의 리얼리즘은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활용하는지에 달렸다. 그래서 영화에 주로 비유되는 속성은 주마등인 것이다. 결말을 맞이해 엔딩 크레딧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영화의 시작 지점으로 다-카포(Dar Capo)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영화가 얼마나 비현실적(Non-Realistic)인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현실참여 능력에 대한 비판점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문학 비평에서 문학은 언제나 지금-여기의 문제를 말한다. 그러므로 문학이 과거를 논할 때, 그는 과거로 향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이곳에 소환하는 것이다. 사실상 문학에 ‘현재’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가 성립하려면 그를 구분해줄 과거나 미래가 있어야 하는데, 문학은 언제나 동시대에 물음을 던진다. 그러니 문학의 관심은 현재를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가는지가 아니라, 지금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을 꼭 지금해야만 하겠다는 행동의 충실함에 있다.
반면 영화 비평에서 영화는 지금 하지 않아도 될 것은 지금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단호한 자세를 취한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마등을 늘어뜨려 보이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지나온 길의 문제를 다시금 지금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내보인다. 이는 ‘지금’의 ‘이곳’ 소환이라는 점에서 문학 비평과 유사한 듯 보이지만, 영화는 스크린과 러닝타임을 통해 이중으로 자신을 가둠으로써 시간의 흘림을 철저히 방지한다. 이를 문학식으로 보자면 과거도 미래도 없는 타임 패러독스의 부랑자일 테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돌아갈 자리가 없는 옛날 옛적 서부의 총잡이인 것이다.
3.
그렇게 본다면 영화의 본질은 로드무비라는 장르에 있다고 생각된다. 로드무비는 떠나온 곳도 있고 향해가는 곳도 있지만 그 인과가 영화 내에서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뤼미에르의 초기 단편을 보면 더욱 그렇다만.) 이 점이 잘린 ‘지금-여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그게 꼭 동시대를 암시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주마등 안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지금을 설정할 수 있다. 예컨대 이는 타임라인이며, 그는 자체적으로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회고록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시간-기계(타임머신)에 빗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과거나 미래로 향할 타임머신이 자리할 현재를 전혀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 어떻게 탑승할 수 있는가? 영화로 향하는 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도로시의 소원처럼 인과를 알 수 없는 일만이 오즈랜드로의 관문을 제공해줄 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노란 벽돌길을 따라 오즈의 성으로 향하는 일은 특별한 누구만이 할 수 있거나, 누군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다. 도로시는 오즈랜드를 구해야겠다면서 소원을 빌지 않았다. 도로시는 그저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만 했다. 그렇게 도로시가 도착한 오즈랜드는 그가 떠나온 캘리포니아와 시차가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마치 영웅의 연대기처럼 뚜렷한 시간 없는 공간만이 제공된다. 그렇다면 시간 없이 시간-기계가 성립할 수 있는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 놓인 공간에 눈길을 보내곤 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공간은 우리가 사는 현실과 동일한 걸까?
우리가 흔히 문학영화라고 부르는 영화의 실체는 문학작품 원작이라는 것보다 ‘문학적’이라는 뉘앙스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이는 '문학이 동시대에 물음을 던지는 모습'을 모방하려는 영화를 관찰한 결과이다. 영화가 문학을 시기했다는 말도 옳겠고, 영화를 통해 문학을 재현해보고자 했다는 말도 옳겠다. 그 어떤 판단도 가능하지만, 그런데 가급적이면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영화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아쉬워한 누군가의 바램은 영화 안으로 문학의 정수를 끌어왔다. 물론 그 절차와 방식은 제대로 규명된 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때 문학은 ‘불현듯’ 오즈랜드에 도착한 도로시처럼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도로시가 오즈랜드로 향했던 건, 그녀가 살던 캘리포니아의 현실이 싫어서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사는 이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파하기 위함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다시 논점을 제자리로 돌려보자. 영화가 동시대에 물음을 던질 수 있을까. 영화가 동시대에 물음을 던질 수 있다는 말은 영화-기계가 아닌 영화-기관을 통해 성립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영화란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어딘가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공간에 종속된 기관에 가깝다. <에반게리온>에서 초호기의 기관이 무한한 동력원을 제공하듯이 동시대 안에 기관으로 자리한 영화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제공한다. 초호기의 폭주가 이윽고 세계를 액체로 환원해버리듯이 영화가 제시하는 공간의 문제는 그 밀도가 높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영화의 리얼리즘을 현실에 겹쳐진 지대로 보게 만들었다. 얼굴 위에 놓인 안경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현실 위에 놓인 스크린-프레임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블랙홀의 강력한 힘은 빛을 빨아들여 자신을 공간으로부터 숨긴다. 그렇게 본다면 불 꺼진 영화관을 검은 회관(Black Hall)으로 볼 이유는 충분하다. 영화는 정해진 시간 동안 많은 공간을 욱여넣음으로써 고밀도의 중량을 획득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 현실로부터 가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가 자체적으로 현실의 문제에 참여한다고 여기고는 한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게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영화가 동시대에 참여하는 과정, 혹은 과업의 완수라고 부를 만한 사유인 걸까. 다르게 보면, 그렇지 못하기에 문학은 늘 세상으로 참여하려 드는 걸까.
오히려 현실을 분절하고 복사하는 기계의 역할은 문학이 가장 잘하는 일일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들은 생각이 되고 생각은 손을 거쳐 종이로 필사된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을 기록을 위한 기계로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필사하며, 말하자면 인간은 이때 영화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기관이 된다. 같은 원리로 영화는 세상에 무언가를 제공하고 복사해 넣는 기계가 아니라, 세상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희망이나 절망과 같은 감정을 불어넣는 기관이 된다. 그러니 영화가 현실에 참여한다는 말은, 그가 전면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후방에서 전투원을 지원하는 행정보급관의 역할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글에는 늘 영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학의 리얼리즘이 세상의 모사라면 영화의 리얼리즘은 세상에 대한 모성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