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있게 하는 건 경계가 아니라 몸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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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본다. 그리고 목격한다. 여기서 목격이란, 우리가 그것을 보았다는 인식이 제대로 있을 때를 의미한다. 예컨대 스쳐 지나가듯 보아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는 ‘보고도 못 본 것’이 된다. 이 경우는 의도적인 게 아니므로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량은 무척 과대하고, 그렇기에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게 되니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무엇이 꼭 필요한지를 현장에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때는 그에 따른 책임을 모두 져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택과 집중은 중요하다. 이미지를 선택하고 그에 집중하는 능력은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도, 동시에 닥쳐올 위험을 회피하게 해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이미지의 홍수라 불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무엇인가. 이미지라는 것이 액자 틀과 같은 특별한 장소에만 담겨있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우리 시대에 이미지란 어디를 보아도 존재하며 또는 우리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인터넷상에서 우리는 실체를 감추고 이미지가 된다. 여기서 당신을 대변하는 건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을 제외한 모두이다. 말투일 수도 있고, 닉네임일 수도 있다. 허나 인터넷에 우리가 이미지의 형태로 모인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지의 바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지구의 원시 바다에서 생명체가 태어났듯이, 이미지의 바다에서는 무언가가 태어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생명체는 우리와 같은 유기물이 아니라 이미지의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을 테다.



영화라는 매체에는 어느 다른 영상 매체보다 정보가 풍부하고, 그래서 분석하기 어렵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반대로 말하면 만화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매체는 다소 적은 양의 정보를 갖는다. 그런데 위의 말에 따르면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적은 양의 정보가 있으므로 분석하기 쉬워야한다. 물론 그의 맥락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영화보다는 조금 더 수월하게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만, 이 말은 이미지 간의 위계와 서열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좋지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위계서열이라는 단어를 비슷한 무언가로 대체해야 하는데, 아마도 여기에는 우선순위라는 말이 자리할 수 있을 테다. 예컨대 삶에서 그것이 더 중요하다면 그만한 지위로 올라서야 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떠한 서열이 될 수는 없다. 쉽게 말해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이미지라는 매체를 이미지의 바다로 되돌리고는, 자신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새로이 축조한다.



이미지의 바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다 위를 떠다니는 이가 볼 수 있는 건 평평한 지평선과 푸른 빛뿐이다. 예컨대 바다의 어느 부위를 바라보아도 그곳에는 여전한 푸른 빛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바다를 볼 때 중요한 건 우리의 의도이다. 첫 번째, 본다는 게 곧 목격한다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그런 이유로 의도를 갖는 게 목격이라는 행위의 주체이다. 세 번째,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이미지가 망막에 맺히는 것처럼 우리와 이미지의 관계는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네 번째, 이 절차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우리는 이미지와 맺는 것이다. 사람 간에 관계를 맺거나, 식물이 열매를 맺거나 하는 식의 절차가 이루어진다. 차이라면 그곳에 빛이 개입한다는 점인데 이는 망막에 이미지가 맺힐 때 빛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이미지는 빛에 대한 환영이었다. 잊혀진 꿈의 동굴에는 오래된 동굴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중에는 발이 여러 개 달린 소의 형상도 있다. 처음에 우리는 그것을 두고 움직이는 소를 그린 것이라고 말했으나, 태초로 돌아간 동굴 안에서 모닥불을 피웠을 때 그 소가 정말로 움직이는 듯 보인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눈과 동일한 원리로 그려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걸 알고 그렸는지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류는 빛과 자신의 관계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기막힌 우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눈이라는 생체기관의 구조와 유사한 방식으로 최초의 사진은 발생했다. 구멍에 맺혀온 상을 기록하는 행위, 그것은 세계와 우리가 체결한 첫 번째 계약이었다. 본다는 말과 목격한다는 말이 같지 않다는 바로 그것이다.



명확하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이성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낸 시대에 우리는 위의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때 등장한 카메라는 우리가 포착한 자연을 선택적으로 기록함으로써 그 명확함에 확신을 심어주었지만, 그것은 우리 눈의 모방품이기에 한계 또한 닮았다는 점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카메라는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한다고 여겨졌지만 실은 아니었고, 담기지 않는 무언가는 화면을 비집고 나오면서 우리를 괴롭게 하였다. 예컨대 우리는 사진이 만들어낸 망령을 느끼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이곳에 있다. 우리는 그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이는 심령사진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목격하지 못한 무언가일 뿐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그걸 둘러싼 테두리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무언가를 보는 것보다 지나치는 게 더 많고, 이미지 하나를 습득하면 그의 대부분은 바깥에 흘려보낸다. 그러니까 이 말은 프레임을 가진 이미지 전반에 대한 자아 성찰을 요구한다. 일례로 사진이라는 것에는 테두리가 있는데, 그 안이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이 테두리가 우리 주변의 문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데, 문이라는 것은 테두리가 있으면서도 그 안과 밖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형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진이라는 것에도 안과 밖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여기서 밖은 우리 세계일 것이므로 사진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떠한 세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그 어떠한 세계가 바로 간과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잃어버린 세계를 우리는 발견한 것이다.



그러니까 맺는다는 건 프레임의 창조를 의미한다. 우리 눈에 맺힌 이미지 상은 그것만으로도 선택된, 그래서 관계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됨을 의미한다. 이때 세상이란 건 우리가 있는 곳의 반대편에 자리한, 간과된 무언가이다. 아마도 이 부분이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과 다른 것일 텐데, 그렇기에 더욱이 유의해야만 한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바라본 세계의 일부를 담는 게 프레임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레임의 역할은 우리를 초대하는 것일 뿐 그 자체로는 중립을 지킨다. 프레임은 단지 초대를 위해 설계된 관문에 불과하며, 그것은 선택되거나 지칭된 게 아니다. 빛이 망막에 와 닿는 것처럼 우리는 세계의 저편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 세계를 방어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지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게 아니다.



물론 우리가 먼저 이미지를 공격할 수도 있다. 선수필승(先手必勝)이라는 말이 있듯 먼저 다가가면 우리가 선취점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우리는 늘 무언가를 간과하도록 설계되었다. 세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기에 무언가를 선택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이미지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 무언가 공격을 한다던가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그들이 먼저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곳에 상이 맺히며, 그 상이란 것은 곧 관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지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다만 우리가 이미지라고 파악한 게 그것일 뿐이고, 예술 작품에서의 프레임은 그에 먼저 떠난 사람이 후발주자를 위해 만들어둔 관문일 뿐이다.



예컨대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하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빛이 우리의 망막으로 들어오는 걸 우리는 막을 수 없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무지의 상태는 흔히 어둠으로 표현되고는 한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가 어둠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런 점에 연유한다. 바다의 깊은 곳으로 가면 빛이 닿지 않는 심해가 나오듯,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맺힘의 한계는 빛이 닿을 수 있는 곳 까지다. 즉 우리는 태초에 어둠과 함께했다. 어머니의 자궁 안은 어둠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아직 의식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어둡기도 해서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는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자, 처음으로 빛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기도 한데, 이 경우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세상과의 첫 관계인 셈이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최초의 광학기구도 프레임의 일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눈이다. 다만 우리가 세상을 프레임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체가 프레임이어서다. 예컨대 세상에 태어날 때가 세상과 맺는 첫 관계이듯이, 우리는 우리 몸을 통해 세상에 관계하는 중이다. 다시 말해서 관계라는 것은 일회에 그치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계속됨으로써 유효한 시간을 채득한다. 이때 관계의 다른 표현이 맺다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은 Mate라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세계와 동반자 관계가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Mating, 즉 짝짓기가 된다. 프레임이란 게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듯이, 우리의 세계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건 우리의 신체이다.



어떤 면에서는 낭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삶에 빗댈 수 있다면 그 말은 우리가 몸 담은 세계에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간직한 세계에 적용될 말일 테니 말이다. 프레임이 중간자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게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쓰인 일들의 원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바다를 바라볼 때 수면을 중심으로 세계가 만들어내는 거울상을 떠올려볼 수 있듯이, 이미지의 바다는 외부 세계가 아니라 내부 세계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못다 한 의무는 내부 세계에 빠진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것이다. 흔히 무의식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평소에 소환(Recall)이라는 상기의 과정을 겪지만, 꿈에서는 우리가 직접 바다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게 그와의 첫 번째 만남은 아니다. 이미지의 만남은 첫 번째 접촉에서는 기록되지 않으나 두 번째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보는 모든 이미지는 마음속에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고, 그들에게 이름이 있음을 자각할 때가 이미지가 되는 순간이다. 그런 원리로 최면이라는 용법은 작동한다. 최면을 통해 우리는 미처 다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 간과된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는데 그 과정은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꿈이 우리가 억눌러왔던 창고가 일시적으로 풀려나는 것이라면, 최면은 목적지를 설정하고는 그에 비슷하게 근접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꿈은 방출에 최면은 탐험에 가깝다. 이 중에 무엇이 더 위험한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동안 우리가 꿈에 빗대어 왔던 여러 매체에 대한 분류를 다시 할 필요는 있다.



영화는 스크린을 경계로 영화관과 영화라는 두 개의 세계로 기능하는데, 이것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우리를 모방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몸을 매개로 세계에 접촉하고 그 안에는 별개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니 이에 따르면 우리는 영화라는 것에, 세계는 영화관에 빗대어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기 힘든 것만큼이나 인간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도 힘든데, 이는 영화와 영화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영화가 인간의 모방물이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영화에 접촉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영화 또한 우리를 보는 것이며 그 양쪽 사이에는 보고도 못 본, 목격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빛이 암실에 들어와 감광판에 맺히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와 접촉하는지를 알 수 없다. 다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인지하게 되는 게 우리의 육체라는 점이 이곳에 남겨져 있다. 그러니까 영화로 치면 스크린, 그 프레임을 우리는 항상 인지하는 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가 영화를 볼 때 프레임은 인식되지 않는다. 프레임 보다는 그 안의 내용물이 훨씬 생동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육신이란 게 세계를 바라봄에 있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는 우리의 소망을 담은 모방물일 수도 있다. 물론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 때 어떤 염원을 담아 만들겠지만, 영화라는 인간의 모방물은 우리가 어째서 신체에 관심을 두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점을 제공한다.



포스트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인간 이후를 뜻한다.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에는 디지털이라는 게 네트워크와 함께 제공된다. 여기서 네트워크는 우리가 꿈을 모방해 만든 세계로서, 어디로 들어가든 같은 세계를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예컨대 사진이 제공하던 순간의 세계는 이제 없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온라인 세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지만, 정작 그런 활동 중에는 자신에게 현실의 육체가 있다는 점을 잊어버린다. 인터넷이라는 세계에 다이브 할 때, 이미지의 바다에서 우리가 간과하게 되는 게 그곳으로 접속하게 해줄 접속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꿈이라는 게 우리에게도 육신이 있다는 점을 잊게 해주는 매질이라 할 수 있다면, 이미지는 곧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네트워크라는 건 세계의 배면에 담긴, 현실과 공존하는 이중 차원으로 보아도 될 지경인데, 어쩌면 이는 이미지라는 게 하늘로 쏘아 올려진 인공위성처럼 인간 주위를 도는 무언가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에 담긴 세계가 순간이라면 인간은 순간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에 담긴 세계가 영원이라면 인간은 영원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네트워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네트워크 안에서 인간은 순간이자 영원으로, 무한한 확장을 품에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네트워크를 바라보면서 그곳에 무수한 이미지가 있음을 목격하지만, 그런 이미지가 모여 만들어 낸 하나의 이미지만을 보게 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어느 다른 영상 매체보다 정보가 풍부하고, 그래서 분석하기 어렵다는 말에 작은 균열을 낸다. 이미지가 풍부해서 분석하기 어렵다면, 우리는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숨기기 위해 이미지를 몸에 두르게 된다. 예컨대 이미지로 둘러싸인 것은 우리의 육체, 프레임이다.



요즘의 우리에게 프레임이라는 단어는 자신을 규정하고 제약하는 게 아니라, 보호하려는 용도로 사용되는 듯하다. 사람들은 인터넷 상에서 자신을 타인에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불특정다수가 보는 것은 원치 않아 한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근래의 우리는 자신이 보는 세계를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에 있는 세계는 외면한다. 어쩌면 내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만나려 하는 건 영화관이 아니라 영화이다. 분명 영화관이 없다면 영화는 성립되지 않지만, 영화를 보러 가서 영화관에만 머무른다는 건 세계의 끝을 아직 다 보지 못한 것이다. 물론 세계는 끝이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을 제약하는 것들을 풀어헤치지 않는다면 경계는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있게 하는 건 경계가 아니라 몸이다. 그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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