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산되는 것보다 소멸하는 것이 더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생산보다 소멸이 더 빠를 수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인터넷 등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 현상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쉽게 생산되고 그만큼 쉽게 소멸된다. 디지털카메라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편리함을 생각해보라. 디지털카메라는 곧바로 찍고, 뷰파인더로 결과물을 확인해 휴지통으로 보내버릴 수 있다. 영화 편집으로 간다면, 과거에는 필름을 물리적으로 잘라 ‘편집’이라는 걸 했는데, 근래에는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힘은, 우스꽝스럽게도 컴퓨터의 연산능력이다. 영상 편집을 위해 사용하는 장치의 성능이 중요한 이유는, 동영상을 렌더링하면서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요컨대 생산을 위해 소멸을 최대한 배제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를 반대로 말하면 소멸이 생산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기도 하다.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정교한 생산을 위해 행해지는 소멸의 절차들, 조각을 깎을 때 버려지는 나무 톱밥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장면을 위해 무작정 들이대는 카메라의 모습은, 초원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맹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있기도 했다. 나루터에 앉아 낚싯대를 기울이는 낚시꾼의 심정은 물고기가 아니라 “시간을 낚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조각이 아니라 나무 톱밥을 깎기 위해 일한다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어찌 보면 궤변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화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기다림의 미학은 영화를 찍는다는 게 단순히 포착의 순간으로만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것은 포착의 논리이자 잔상이다. 여운 혹은 잔상으로 말해지는, 카메라 환등상이 늘 허구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테다.
1초에 24프레임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24개의 순간을 조합해 1초라는 허구로 동작한다. 이를 두고 1초를 위한 24프레임의 희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봉사라고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봉사라는 말이 사용되는 용례 중 하나처럼, 우리는 1초에서 24개의 순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가 많은 스태프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지만 감독의 이름만을 기억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간과한 순간은 1초를 생성하고 소멸되는 찰나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를 구성하는 포착의 논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헌사’이다. 이 헌사가 직접적으로 지닌 힘은 없지만, 헌사를 보냄으로써 헌사를 받는 이를 영화 안으로 끌어오는 효과가 있다. 이를테면 홍상수의 영화 촬영 현장이 그렇다. 홍상수는 영화를 찍을 때 어떤 날씨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린다. <오! 수정>의 촬영현장을 담은 비하인드 영상에서는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 기적같이 눈이 내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스태프들이 벌벌 떠는 이 영상에서 우리는 영화가 단순히 포착의 능수능란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깨우친다. 그리고 이 깨우침은 우리가 발견한 것이 영화 전부가 아니라는 표면성과 연결되고, <오! 수정>의 주제의식을 구성한다. 내가 본 그녀의 모습이 과연 이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일까? 1초가 24프레임이라면, 그것들을 분해해서 재조립할 때 또 다른 모습의 1초를 구축할 수 있지는 않을까?
분해와 재조립의 과정에서 생산과 소멸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재조립을 위한 분해는 어쩌면 생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이때 우리는, 분해와 재조립은 모든 재료를 활용해도 되므로 버려지는 게 없지 않으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분해와 재조립의 과정에서 소멸되는 시간은 사실상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봉사한다. (사실 이는 <오! 수정>의 또 다른 주제이기도 하다. 시간에 종속된 그녀는 주인공 ‘그’에게 봉사하지만, 이것이 그녀의 시선으로 재조립될 때도 그녀는 ‘그’에게 봉사 되기를 막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이 홍상수 영화에서의 여성 종속에 대한 양날의 면모이기도 하다.)
시간은 결코 다시 생산되는 법이 없다. 우리가 만약 영화를 아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일종의 보존서고이기 때문이리라. 보존서고로서의 영화는 신기하게도 자신을 분류하는 커다란 것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은 철학, 역사, 사회 등의 대분류로부터 저자의 이름순으로 소분류 된다. 그리고는 바코드를 붙여 책 한 권에 주소를 부여한다. 이는 우리가 서고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더라도 책을 잃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런데 서고가 재편되는 과정에서는 책 한 권에 담긴 기억과 추억이 갈라서지 않는다. 서고는 시간을 최대한 느리게 하는 장소이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다. 책들의 뭉치가 거대한 허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도서관이라는 허구는 ‘관(館)’이라는 단어의 다른 사용인 관(棺)처럼 도서를 파묻는 용도일지도 모른다. 시체를 담는 관이 소멸의 시간을 적당히 조절하는 장치라는 점에서도, 도서관이 도서에 대한 소멸과 애도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흥미롭다. 이와 동시에 도서관이 갖는 접속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생기는데, 책 한 권에 능수능란하게 접속할 수 있으면서도 책 한 권에 대한 인상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 그렇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소모되는 시간에 엮인 채로 우리의 인식 밖으로 빠져나간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을 요구하는 일이기에 글자들이 이루어낸 가상의 이미지는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이고, 손아귀에 남은 건 무엇일까. 영화를 보며 쇼트와 쇼트 사이의 미세한 운동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이, 때로는 서고에 모인 책들의 배치 방법을 씨름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디지털 이미지의 무상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날로그가 운동 이미지의 시대라면 디지털은 시간 이미지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본래 맥락(들뢰즈)이 아니라 손실에 관해서다.
아날로그 시절에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건 물리적 거리였다. 전화의 발명은 전보를 보낼 수 있는 거리의 확장과도 같았다. 자동차는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는 마차였으며, 서부개척을 비롯한 신대륙으로의 진출은 공간의 확장이었다. 이 시절에는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식는 것과 같은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는지를 최대 화두로 삼는다. OTT서비스는 취향을 점검해주어서가 아니라, 굳이 영화를 찾아다닐 필요를 없게 해주는 시간단축 서비스이다. 인터넷 속도의 증가는 영화 파일을 얼마나 빨리 내려받을 수 있는지와 같은 ‘단축의 지표’를 통해 풀이되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애는 ‘빨리 답장하지 않으면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라는 속성을 획득한다. 시간 단축, 지연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함이 최우선 과제로 올라오고, 이는 곧 손가락 끝을 운용해서 얻는 촉감의 즉각적인 피드백(Feed back)으로 이어진다. 다시금 이는 페이스북의 담벼락(Feed)과 같은 SNS의 즉각성과 연결됨으로써 우리를 끊임없이 생산하게 한다.
이것들이 ‘생산성 없는’ 것처럼 보이기에 생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오히려, 소멸하는 것이 막대하므로 구차한 모습으로 생산에 집착하게 된다. 존재의 소멸, 인터넷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더욱 가속화되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모되는 시간은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현상인 것이다. (SNS가 시간 낭비인 이유는 생산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간이 잘 가기 때문이다. 마찰계수가 0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빠르게 미끄러진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타인과 마찰할 필요가 있다. 마찰은 사포에 갈려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굳은살이라는 대안물을 꺼내 들게 한다.)
요약하자면 물리적 거리로의 시간이 물리적 현상으로의 시간이 되는 과정을 우리는 겪었다. 이것이 디지털 영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단서이다. 디지털 시대의 영화가 이미지의 현상학이 아니라 시간의 현상학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물론 이는 현대에 들어 물리 법칙이 변화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에너지의 순환과정에서는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즉 에너지의 운용 정도가 커진 만큼 손실되는 에너지의 양도 커진 것뿐이다. 다르게 말해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건 그런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손해 볼 수밖에 없다면, 손해를 최대한 줄여야만 우리는 오래도록 살 수 있다.
오히려 시간의 현상학은 소멸에 대항하는 생산의 성격을 지녔다. (물이 빠진다면 물이 빠지는 만큼 물을 채우자… <스틸 라이프>) 우리가 사진에 부여하는 노에마란 것은 그런 의미에서 생산적인 것으로 변모할 수 있다. 이른바 ‘디지털-사진의 노에마’이다. 오래된 사진을 보며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감정은 분명 떠나간 이에 대한 슬픔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떠나갔다’는 말은 이곳과 저곳의 거리감각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근대적 시공간의 형성 과정에서 공감각이 어떻게 시간에 대한 과제를 품게 되었는지를 확인한 바 있고, 디지털 시대의 시공간은 즉각적인 피드백으로 구성된다는 점도 위에서 논한 바 있다. 예컨대 두 발언을 종합하여 우리는 시간을 태워 소멸에 저항하는 행위를 ‘노에시스’라고 부른다.
손 쉽게 생성하고 떠나보낼 수 있는 디지털 이미지들의 범람은 별개의 이미지에 관심을 쏟는 것을 힘들게 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이미지의 깜빡임은 우리 시대를 다시금 모네와 고흐 앞으로 데려간다. 그것들이 점묘법으로 발전했듯이 우리는 이미지의 점조직을 통해 점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모여 그림을 이루어 내고 다시금 분해와 재구축을 거치더라도 기억과 추억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영화의 ‘눈 깜짝할 새’가 힘을 잃는 것을 목격함이다.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네트워크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이루는 주 구성성분인 시간을 태운다. (여기서 네트워크라 함은 정보전달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네트워크의 형성도 포함한다. 즉 오늘날 영화는 과거보다 능수능란하게 구전된다.) 인간의 신체가 고사상태에서 최후의 보루로 근육(단백질)을 태우듯이, 영화를 구성하는 운동기관인 시간을 태우는 일은 아주 절망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현재 미술관 안에서 자신을 펼쳐두었고, 인체의 신비전에 전시된 인간의 외피처럼 점점 시간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소멸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표면적 늘리기를 선택했다. 미술관 벽에 걸려 다층적인 공간을 내부로 끌어당기는 영화는 마치 열 배출을 위해 귀의 크기를 늘리던 사막여우와도 같다. 혹자는 이 모습을 두고 얇고 넓은 지식을 탐독하는 도서관 안의 이용자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거에 예술품은 장인의 손길을 통해 한 개 정도, 많아야 열 개 남짓의 수량으로 제작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양산된다. 역설적으로 그런 양산이 개개인의 가치를 소멸시켰고, 가치가 사라진 곳에 들어선 것은 우리 자신의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을 연료 삼아 그곳에 우리를 기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