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Y OF SEEING

by 수차미
KakaoTalk_20180328_001831906.jpg

영화를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을 보기는 쉽지만, 그곳에서 삶을 발견하는 이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영화를 접할 기회는 많아졌지만, 그것이 삶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이것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말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삶의 모든 것을 긍정하지 않듯이, 영화의 모든 것을 긍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니까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다.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나르시시즘에 빠졌거나.


굉장히 단순한 이유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물어올 때, 그 단어의 정의에 곧바로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가 사랑의 증표로 생각하는 연애만 보아도, 그것은 가까운 근대까지 성립하지 않던 개념이었다. 결혼은 무조건 중매결혼이었고, 그들에게 사랑이란 가정을 꾸려야 할 의무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근대까지의 사랑이란 이성과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 종족 보존에 기생하는 생명체였다.


이때 누군가는 엠마누엘 칸트를 떠올릴 테지만, 적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이미 그 답이 제시되어 있다. 사랑이란 곧 대상을 긍정하는 행위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이고, 상대를 사랑한다는 건 못나게 보일 수 있는 걸 긍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라는 말은 거의 사기이거나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 말하자면 사랑은 그 범주가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세계를 긍정한다는 것은 일반 명사인 곳을 테라포밍하는 것과도 같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를 긍정함에서 오는 부담을 떨쳐내면서 덮쳐오는 부정적인 것들을 반박한다.


세상에 대한 낭만이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낭만은 무한자가 아니라 유한자이다. 유한자를 두고 벌어지는 삶의 투쟁을 두고 막연하게 세계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무지이다. 또한 그 세계가 당신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당신에게 무지를 선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을 인식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비판받을 행위이기는 해도 충분히 고려될 수 있는 취향 중 하나이다. 본다는 게 안다는 건 아니고, 긍정한다는 게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의도적인 오독이 아니라 그저 무지에 불과할 때 그곳에는 끝없는 왜곡만이 들어서게 된다. 이 왜곡은 그것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식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이를테면 인류는 중력이 공간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눈으로 관측되지는 않지만 그 공간의 주변에서 빛이 휘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사랑은 과학이 아니기에 그처럼 딱 잘라 규명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지구에서 우주를 바라볼 때 왜곡을 피해가려면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우쳤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Way of seeing). 영화를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감정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곧 객관이 아니라 주관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누군가가 영화를 객관적으로 본다고 말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할 테다. 과연 객관적인 예술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카메라가 사람의 시선에, 쇼트가 세계의 지평선에 걸쳐 있다고 믿지만. 이때 그 세계가 누구의 것인지는 따져 묻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견해에 미루어 본 세계를 반영할 뿐이다. 그래서 세계를 많이 알수록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금 제기되는 반론은, 영화에 대한 이해도라는 게 과연 누구의 세계를 반영해야 하느냐는 문제이다. 세계가 오직 당신뿐이라는 말은, 전 우주에 생명체가 지구에만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영화라는 우주는 굉장히 넓고, 그는 우리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은 채 미개척지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증명해야만 할 이유도 없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와 닮은 이를 찾아내려는 것은, 세계의 무한함에 부딪히려는 게 아니라 세계 안에서 유한한 존재일 뿐이라는 점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사랑이라는 게 대상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무한한 것으로 가정할 때 세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세계는 유한하고, 그 안에서 유한한 존재임을 확인받는 게 곧 존재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만나는 것보다 떠나보낼 때가 더 슬픈 법이다. 영화와 접촉하는 순간의 설렘은 찰나이지만, 결국에는 그가 무한하지 않다는 점에 슬퍼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영화에 필사적이 되는 것은, 그런 관계가 세계를 이루는 원리라는 점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왔다가 떠나는 존재이고, 하지만 그 자체로 긍정된다.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서 존재의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느냐는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동등하기까지 하다. 영화/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즉 그 세계는 인격이자 생명이며,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는 것과도 같다. 이를테면 그 구조는 단순히 기계적이기만 한 게 아니다. 세계와 인간을 구조화하려는 시도가 레비스트로스와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었다면, 그 그물망 안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라깡이 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게 인간과 세계의 관계라면, 그 세계의 그물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을 테고. 각자의 심연으로 여행을 떠나는 게 나이기를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당신의 세계가 영화에서 발견되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발견에 불과하다면 정말로 슬픈 일이다. 심연에는 끝이 없고 그래서 우리를 흥분케 하는데, 그 한계가 처음부터 보인다면 현 상태를 성급하게 긍정해버리는 것일 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우주에 대한 낭만은 별자리를 관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그곳으로의 발견은 천체 관계를 생각해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요컨대 인간은 곧 우주였고 인간은 그렇게 깊은 심연으로 긍정되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는 인간이 어디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코페르니쿠스. 그는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영화가 우리를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 그대로 세계에 뚫린 심연은 우주가 아니라 인간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그들을 궁금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우리를 궁금해한다. 나는 세계를 보며 세계는 나를 본다. 이 공식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주체와 타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궁금해한다. 자신이기에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낯선 그가 바로 타자이다.


대부분 사람에게 나 자신은 낯설기 마련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기로 녹음해 들어보거나, 눈높이에 맞춰 사진을 찍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개인은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 채 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명제의 다른 표현은, 인간은 자신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모른다는 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곧 행위이고,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의식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업적은 우리를 굴절하게 하는 그곳의 존재를 입증한 것이고, 라깡의 업적은 우리가 그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점을 규명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는, 인간이 우주로 나갈 수 있게 된 아폴로의 시기와도 일치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심연을 발견했을 때 벌어진 변화는, 그곳이 대상에만 불과하지 않다는 인식의 변화이다. 즉 우리와 세계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곳은 이제 우리가 탐사함으로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 그러나 일방적인 탐색이 아니라 그 또한 우리에게로 도전해오는 대등한 관계가 되었다. 즉 그곳은 위험하지만 그럼에도 도전할 수밖에 없는 매력을 지녔고, 그곳에 향한다는 건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때 그곳으로 향하는 순간 전방위적으로 압박해오는 것들이 있는데, 바다라면 수압이고 우주라면 무중력이며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내가 보는 나의 모습이다. 바로 그렇게 주체와 타자는 싸우게 된다.


다이버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거대한 매료의 공간인 그레이트 블루 홀은, 그곳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기에 다이버에게 필요한 공간이다. 무료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는 도전의 공간이 필요하고 그곳이 바로 심연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나를 비추어보는 거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하지만 그럼에도 큰 틀에서는 같은 동상이질이다. 마침내 그 두 가지를 잇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대적하고 있다는 관계의식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영화가 현실에 뚫린 공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첫 번째로, 영화가 현실을 모사(Representation)가 아닌 복사(Copy)하는 것이라고 여겼을 때의 사람들에게 영화는 그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들에게 열차는 바깥에서 안쪽으로 뚫고 오는 것이었고, 말하자면 그들의 영화는 영화관을 경계로 현실을 나누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사실주의 관점에서 사진의 역할을 물려받은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들에게 회화란 노을 지는 풍경을 화가의 시선에 따라 묘사해놓은 것, 재현에 불과했고 그것은 영화가 현실의 연장선이어야 한다는 점에 방해되었다. 그들에게 영화란 창틀과도 같았는데, 그것은 투명한 유리를 경계로 안과 밖이 명확히 나누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두 공간은 같은 세계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요컨대 영화의 시작은 이곳과 저곳이 단지 칸막이로만 구분되어있을 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열차의 도착에 놀랐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열차가 일종의 투입이라고 가정해 볼 때. 그들의 감정은 현실 세계에서 발견되고 이곳으로 도착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앞에서 발견될 때 비로소 놀라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가 할리우드라는 이름으로 달려왔을 때, 그건 우리 세계의 복사본에 불과했다. 영화가 창작물이라고 다들 말했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투영하는 관객들에게 있어 그곳은 현실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연극무대처럼, 이곳과 저곳은 같은 공간이지만 단지 암묵적으로 그 칸막이를 가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르게 말해보면, 여전히 그곳에 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그것을 답답해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그들의 이름은 누벨바그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세상이 단편적으로 조각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세계의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편집기법은, 현실을 다르게 보는 법(Way of seeing)을 가르쳐준 것에 불과했다. 요컨대 새로운 물결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다의 표면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 것뿐이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표면 위의 것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다르게 보고는, 그걸 그대로 보여주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 지구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티브이라는 2차 미디어의 시대에, 인간의 시각은 공유되었지만 타자와의 관계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68년도의 광장에 나왔는데, 육체의 한계는 여전했기에 그저 몽상가가 될 뿐이었다. 그들은 인류라는 타자와 나라는 타자 둘 모두에게 도전했고, 그럼에도 전쟁은 일어났으며 라깡은 그를 배신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의 관계라는 게 결과적으로 구조라는 점에 굉장한 회의를 느꼈다. 이 구조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일정한 체계가 모두 포함되어있으며 심지어는 인간 심리의 구조 또한 깊은 심연, 주이상스(Jouissance)의 투입에 불과하다는 점을 그들은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리 걸러도 걸러지지 않는 불쾌한 세계의 파편. 그 안에서 주체와 타자는 나눌 수 없는 잔여물이 된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제대로 이어지기 전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티브이는 하나의 시점 쇼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쇼트는 정치적이 되었으며, 누군가는 그가 우리를 현혹하고 있노라 소리쳤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은 2000년대가 도래하기 바로 직전인 시대의 사이버 스페이스, 인터넷이었다. 그곳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여전히 존재하는 장소이면서도,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장소였고 그만큼 인간의 내면이 솔직해지는 동시에, 주체가 끝없이 분열되면서도 동시에 타자로서 기능하는 잔여물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우리의 가면은 유동적이고 관계는 실시간으로 형상화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사이버 인간의 디지털 뉴런이다. 디지털 뉴런이 신체를 넘어 세계에 직접 접속하자 구조가 해체되었고, 트램펄린이 사라지자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었다. 전제는 동일하지만 뼈대는 같은,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이야기의 첫 번째 장은 토끼를 따라 굴 안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곳은 말 그대로의 바보상자가 아니라, 세상이 바보였다. 그렇다면 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바보라고 이상한 나라의 투명 고양이가 말했다. 그는 이 세계의 대전제가 당신이 지금까지 알던 규칙이 이질적으로 바뀌면서 역으로 당신을 압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달린다고 생각했지만 세계가 당신을 달리게 하는 붉은 여왕의 나라였다.


이 무기력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실을 깨우쳤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세계를 가르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차원 문을 여는 방법은, 현실에 비판을 가해 틈새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영화를 찍는 것이었다. 영화를 찍으면 시간에 틈새가 열렸고, 그 격차는 곧 우리가 시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시간은, 영화가 복사(Copy)해낸 현실의 시간이 아니라 그들이 모사(Representation)해낸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곳은, 우리가 아는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에 미루어 본 세계를 반영할 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생각 속에 잠겨 자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세계를 긍정함에서 오는 부담을 떨쳐내면서 덮쳐오는 부정적인 것들에 몸을 내던진다는 것이다. 그 심연이 당신을 덮쳐올 때, 논리의 구조는 설파되고 감정은 이미지로 남는다. 그런데 그 이미지란 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여서 쇼트의 편집과 이야기의 줄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다. 그렇지만 바르트식으로 우리 마음을 찔러오는 사진적인 순간도 아니다. 내 방식대로 살아가던 세상이 당신의 의도와 어긋나기 시작함을 인식하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주체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것은 그가 나와는 뭔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이다.



당신이 나와 무언가 다를 때, 그 다름을 공유하기를 원하는 게 바로 사랑이다. 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당신의 세계에서 적용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질성이나 반발감보다는 호기심을 먼저 갖게 된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질문을 유도하는 접근을 우리에게 유도한다. 말하자면, 영화가 나라는 사람의 태도와 다른 모습을 보일 때, 그렇게 예측을 벗어나면서 어느 순간 다른 세상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호기심은 우리가 알던 기준으로 세계를 해석할 때 우리가 알던 퍼즐을 빈자리를 채우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것은 심해로의 여행, 나눌 수 없는 잔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휘어잡는 무언가를 갈구함에서 오는 위험한 호기심이다.


결국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영화에 푹 빠져 있기만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영화를 사랑한다는 게 성애의 영역으로 발전되는 순간, 그가 퍼즐의 달인이 될 수는 있어도 탐험가가 되지는 못한다. 적어도 지금 시대에는 퍼즐을 만드는 이들, 퍼즐을 푸는 이들, 퍼즐을 푸는 이를 추종하는 이들은 많지만. 세계를 탐험하는 이는 몹시도 적다. 분명 이는 슬픈 일이다. 무언가에 뛰어나다 하여도 이미 주어진 세계에서 뛰어나면 무엇을 할 텐가. 그곳에서 우리는 천장에 머리가 닿을 뿐 그 이상의 다른 무언가는 넘볼 수 없다.


이때 우두머리는 여전히 내면의 부족함을 갈구하면서 갈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해석의 구조에서 벗어나 나라는 이름의 타자로 다이브를 해보는 게 더 나을 테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도 당신이 알던 법칙이 그대로 통할 수 있는지.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그 외국인과 친해질 수 있고 또한 실수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 세계로 가져올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고, 어떤 현상을 방지하려면 무슨 도구가 필요한지. 이 호기심은 당신을 영화의 세계로 여행하게 할 것이고, 삶으로 가져와 재편성할 것이며, 그렇게 세상은 영화가 된다.

이전 16화점은 공간을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