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았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깊숙한 곳의 추억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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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의 9집 앨범에는 <소격동>이라는 곡이 있다. 동화를 컨셉으로 만든 9집 앨범에서 이 곡이 갖는 지위는 다소 특별하다. 서태지는 어렸을 적 자신이 살던 동네가 소격동이라고 말하면서, 새가 지저귀는 와중에 간간이 들려오는 탱크 소리가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이 곡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던 풍경이 사실은 공포스러운 무언가였음에서 오는 괴리를 내포한다. 잔혹 동화의 형태로 표현되는 셈이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그것이 다른 곡보다 현실에 가깝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음악이라면 아티스트가 만들어낸 곡조가 듣는 이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데, 이 곡은 만든 이의 기억이 듣는 이의 곡조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우리는 삶을 노래하게 된다.


인간의 뇌에서 상상을 담당하는 부분과 회상을 담당하는 부분은 거의 겹친다고 한다. 아마도 이게 영화라는 매체를 우리가 선호하는 이유이다. 영화(Image)가 인간의 상상(Imagine)을 탐구하는 매체라는 점이 선두에 있다면, 우리가 영화를 보고 개인의 추억을 떠올리는 건 영화의 회상 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생각도 가능하다. 영화가 우리의 추억을 상상한다고 말이다. 쉽게 말해 영화는 우리의 추억을 만들어낸다. 그게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깊숙한 곳의 추억이다. 이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던 게 존재하게 된다는 점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상상이다.


영화를 만드는 건 이미지를 상상하는 작업이고 우리가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추억을 즉각적으로 만들어낸다. 우리가 추억을 만드는 과정에는 감정을 칠하는 공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 추억은 오래가지 못해 칠이 벗겨진다. 도색이 벗겨진 자동차가 금세 녹슬어버리듯 감정 없는 추억도 그렇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감정 없는 추억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남는다. 추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한결같을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상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추억을 떠올리지만, 영화가 개인적인 추억을 담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만든 이의 감정이 덧붙여진 상태에 우리가 손을 댈 수 있는가. 어쩌면 감정을 훼손하는 게 아닐까. 그런 두려움, 혹은 조심스러움이 우리 앞에 남겨진다.


이토록 아름답지만 배후에 잔혹함이 서린 장소가 몇몇 있다. 그중 하나가 소격동이다. 소격동은 군부 시절에 민간인 사찰로 악명을 떨쳤던 국군기무사령부가 자리했었다. 그런데 그 주변에는 한옥마을이 있다. 근래에 북촌의 한옥마을이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때 나는 북촌의 따스함이 우리의 감정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홍상수의 <북촌방향>에는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게 아니라 공간에 자생해 온 기억이 있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없는 따스함이 그곳에 자리하는데, 영원성을 말하는 작품의 특성상 공간에 갇힌 추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금 떠올려보는 문제는, 감정을 제한 추억이 과연 무엇이 되느냐는 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항상 무언가를 추억하지만 기억은 제대로 하지 않는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감정표현을 하는데 실상 따지고 보면 추억을 토대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물론 과거 이야기의 신빙성도 없을 터이지만 그들이 그런 거짓말을 한다는 게 우리에겐 가식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인물은 늘 가식적이다. 문제는 그런 가식이 영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홍상수에게 추억은 영상보다는 감각의 문제여서 매번 사후적으로 생성되고는 한다. 그렇지만 그런 감각이 만들어짐과 만들어졌음을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이버네틱(cybernetics)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의 감정이 자리하지 않는 장소에는 차가움만이 자리한다. 콘서트가 끝나고 팬들이 빠져나가면 공간의 열기가 금세 식듯 말이다. 단지 추억뿐이라면 우리가 그에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서로의 거리는 멀어진다. 예컨대 <북촌방향>의 북촌은 관객의 반대편에 자리한 장소이고 그래서 이 영화의 북촌은 우리가 가보았던 어느 추억이 담긴 장소가 아니다. 영화가 목격한 장소이고 그들이 상상한 감정을 품은 공간이다. 즉 이 영화가 이상한 건 우리가 아는 북촌을 배반해서가 아니다. 홍상수는 어느 영화와 다르지 않게 여러 인물을 이곳에 투입하고 그들은 여러 번의 추억을 갱신한다. 북촌에 얽힌 그들의 기억은 공간에 담길 때 자유의지로 독립한다. 인물에 파생된 기억이 공간에 떨어질 때 그것은 객체가 되어 감정을 입는다. 말하자면 우리가 추억을 담은 감정의 손상을 걱정할 때 그들은 반대로 행동한다.


추억이라는 상상에 감정을 입힌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추억과 상상과 감정의 경계를 추리하지만, 날카로운 분해가 자칫하면 상처가 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둔다. 기억은 그렇게 혼잡해진다. 밤의 유흥가처럼 시끄럽게 얽힌 인물의 사연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덧입히려 하고 가끔은 그게 진실로 여겨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즐거웠던 추억에는 즐거운 감정이 자리해야 한다. 하지만 즐거웠던 추억은 우리가 상상해낸 것이기에 근본적으로는 후천적이다. 말하자면 추억에 담긴 감정 또한 우리가 만들어냈다. 우리가 감정을 믿을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영화가 상상이라는 점에서는 우리가 그에 느끼는 감정 또한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를 볼 때 반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추억이 감정을 담은 게 아니라 감정이 추억을 담았다고 말이다. 예컨대 그것은 퐁듀처럼 감정이라는 소스에 추억이라는 알맹이를 찍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은 스크린의 전반에 걸쳐있다. 이는 영화가 세계의 재현이라고 말하는 목격담과 반대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영화가 물질세계만을 목격한다고 여기는 게 잘못되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허구를 다루는 매체이고 스크린 위의 그것 또한 허구이다. 영화가 진실을 담았다고 말하는 건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이지 스크린의 본질은 아니다. 예컨대 영화와 현실의 관계가 일종의 조립 공정이라면 태초의 영화는 우리가 상상해낸 감정이며 그것은 추상의 시각화이다. 그 점에서 영화가 여전히 회화에 적을 두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최후의 회화가 시각의 모호함을 표현했던 것과는 달리 태초의 영화는 시각의 명료함을 응용했다. 즉, 너무 명료하기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명료하지 않은 것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것은 바로 명료함에 깃든 추상성이었고 이게 바로 소격동의 현재와 과거이다.


개인의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소격동의 현재와 과거에서 비롯된 괴리는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추억이 한 편의 영화에 깃든다면 그곳에는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추억만이 있다. 영화를 감싼 건 감정이며 영화라는 추억은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는데 아마 그게 영화가 꿈처럼 다가오는 이유일 테다. 말하자면 우리가 한 편의 영화를 두고서 진위를 따지는 건 거의 무의미한 일이다. 영화가 목격한 것을 두고 진실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진실이라 믿지만 사실은 그저 상상일 뿐이다. 모든 것이 허구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걸 떠올릴 때부터 이미 진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홍상수의 인물이 걷던 북촌이 같은 모습이지만 다르게 재현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예전의 북촌이 현재의 북촌을 정확하게 계승하지 않는 이유이다.


서태지의 <소격동>이 개인의 기억을 음악에 담은 것이라면 이때의 음악은 일종의 공간을 재현하는 물질화의 특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먼저 전제로 둔다. 영화가 이미지를 통해 공간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물질화를 특성을 띠고 있으며 기억은 그곳에 담긴다. 그렇지만 분명하게도 <소격동>의 공간은 과거의 그것도 아니고 현재의 이곳도 아니다. 따라서 <소격동>의 공간이 직시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 어느 곳으로도 향하지 않는 부르는 쪽 본인이다. 마찬가지로 기억을 담은 영화 또한 과거나 현재에 얽매이지 않고 특정한 무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이곳에는 일정한 판단이 개입하지 아니하고 기억 안에 추억이 자리함으로써 우리는 기억의 동료가 될 것인지 아니면 추억 그 자체가 될 것인지를 택해야만 한다. 이게 <북촌방향>의 논지이다.


영화에는 기억을 계승하는 부류가 있는데 그게 조금은 더 명확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만약 우리가 기억이라면 우리는 관객의 동료가 될 것인지 아니면 추억을 직시하라고 명할 것인지를 택해야 한다. 알랭 레네가 인간을 살아있는 기억으로 지칭한 후에 영화는 인간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영화 또한 살아있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말이지만 살아있기에 모호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기억이 될 수 있었다. 또는 기억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게 영화라는 매체가 일종의 유령처럼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 연옥이란 게 있듯,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이는 현세에 남아 유령의 형태가 된다고들 한다. 그건 우리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이기도 하지만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온 천사의 모습이기도 하다.


유령은 인간의 몸을 탐한다. <엑소시스트>라는 영화가 그렇게 말한다. 여기서 중핵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우리만이 대입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인간에게 육신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인간을 탐할 이유가 없었을 테다. 그리고 이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는 논리와 어귀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논리인지 아니면 물질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약 인간이 하나의 논리라면 유령은 인간적인 것을 시기하는 게 된다.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나 행동. 허나 인간이라는 물질에서는 그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진다. 인간이라는 물질은 이미지에 대한 상상을 내포하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의 소격동을 돌아보면 과거의 소격동을 떠올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체르노빌도 마찬가지다. HBO의 드라마 시리즈 <체르노빌>이 우크라이나의 공간을 재현하는 방식은 거의 영화적이다. 이때 영화적이라는 표현은 영화의 기법을 빌려왔다는 것으로 이해하자. 다르게 말하면 영화의 공간, 그 기억과 추억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기술이다. 이는 기술(Technique)이자 기술(Description)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기술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방법을 뜻한다. 우리는 같은 일을 설명하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보곤 하는데 사건에 대한 각자의 인상이 다르다. 누군가가 그렇게 설명하면 다른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기억은 분명 주관이지만 그게 공간에 깃들 때는 단순한 주관이 아니게 된다는 점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인상을 기록할 때부터 이미 변형은 시작되었다. 변형을 막으려고 기록해두는 것임에도 기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걸 믿어야 하는 때가 있다.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지향성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장률의 <이리>가 한국의 익산에 해당하는 장소라는 사실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 건 그들이 진실 여부를 따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영화라는 공간에 대입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영화가 무언가 보았다고 말하는 건 우리의 착각에 가깝다. 분명 영화를 찍는 건 카메라의 역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메라가 객관적인 무언가는 아니다. 보았다는 말에는 무엇을 어떻게라는 점이 제외되어있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카메라가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비단 영화에만 적용되는 사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영화를 유효하게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영화가 우리를 대신해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하는 목격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건 대리물이 아니라 대리자라는 점이다. 영화가 단순히 대리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일종의 인형으로서, 타자기를 여성의 전유물로 만들고 그들을 남성의 대리물로 만들었던 것과 같은 오판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대리자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대리자란 동격에 적용하는 단어다. 예컨대 우리가 영화를 대리자로 여길 때 그곳은 우리에 준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영화를 우리로’ ‘우리를 영화로’ 여기는 일이 잦았던 게 사실이다. 분명 영화는 대리자이지만 누군가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서태지의 <소격동>은 과거의 소격동을 대신하지 않는다. 소격동이라는 공간에 담긴 기억이 우리의 기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추억을 축조한다고 가정할 때,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 추억으로 변화하는 것을 막연한 거짓으로 볼 수는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추억 삼는 게 우리 시대의 복고 열풍이니 말이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 시대의 기류와 풍조에 매력을 느끼고는 한다. 이것을 기억으로 접근하면 기억하지 못하는 걸 기억으로 받아들이는 이상한 일, 그러므로 그런 기억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갱신되는 현상을 우리가 설명하지 못한다.


기억이 추억으로 갱신되는 과정에서 기억 자체로도 진실 여부를 따져 물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에 진실된 기억 자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진실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진실이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혼선이 올 수도 있다. <소격동>의 이전 모습처럼 우리의 과거가 공간에 자리한 당사자에게만 진실로 다가온다면, 현재의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의 공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진실이란 곧 진실이 된다. 아마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우리의 상상, 감정이 품은 기억일 테다. 허나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깊숙한 곳의 추억이다. 이른바 ‘기억이 추억을 어떻게 생산해내는지’에 관한 물음이다. 영화가 본디 무언가를 회고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그것은 가짜 기억이 아니던가? 가짜라도 괜찮다는 긍정사가 아닌, 우리가 유령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말이 더 필요한 때다.


https://www.youtube.com/watch?v=WH0iiU0cv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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