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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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말을 사람들과 대화할 때 주고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선호나 취향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예컨대 무언가에 대한 감정이나 경험을 공유할 때 그것은 개인의 주관에 의한다. 좋아하는 것도 주관적인 생각이고, 싫어하는 것도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러니 그런 좋고 나쁨은 우리가 간섭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그 좋고 나쁨의 결론으로 도출된 것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있겠지만, 타인이 그런 판단에 다다르게 된 원인까지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에 같은 변인이더라도 주체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것들은 각각의 주체에 따라 종속된 변수를 드러내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수가 없기에 우리는 서로를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되, 단지 그 판단에 책임을 지울 뿐이다. 선택에 이르게 된 원인을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는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주에서 발화해야 한다. 즉 책임없는 쾌락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발화는 쾌락의 지위를 갖는데, 이는 왜 발화가 책임의 의무를 동반하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허나 이러한 발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것에만 사용되지 않는다.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 만들어낸 언어를 사용하는 도구가 그곳에 있다.


현대에는 언어를 가진 도구가 많다. 대표적으로는 광고 이미지와 같은 게 있다. 이른바 기호라고 불리는, 은폐되고 함축된 것들은 자기만의 언어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메시지는 단박에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문자가 아닌 이미지의 형태로 언어화된다는 점에서 이미지가 텍스트를 내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은, 문자가 이미지를 명료하게 기록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를 체계화하려고 만든 문자가 오히려 이미지에 내포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일반 문자와 이미지라는 문자 사이에 어떠한 위계를 설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지가 언어의 일종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이미지는 자신에게 부족함이 있음을 깨닫고 언어의 형태로 재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것을 ‘돌아온 이미지’로 칭하겠다. 그리고 그 돌아온 이미지의 다른 형태에 대해 말해보겠다. 첫 번째,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보고 나서 그것을 언어로 번안해 기억한다. 두 번째, 우리는 그 언어에서 다른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무언가를 연상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메시지라는 이름의 언어가 기억을 위해 요구되는 반면, 그런 기억을 이미지로 변환하려면 메시지가 필요하다. 즉, 기억한다는 건 언어를 필요로 한다. 결론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부분이 있다. 우리는 좀 전에 ‘메시지라는 이름의 언어’와 ‘언어라는 이름의 이미지’를 구분했다. 그리고 결론이 말해주는 사실은 이러한 두 가지 언어의 앞과 뒤에 자리한 수사가 기억이라는 개념 아래에 하나로 합쳐진다는 점이다.


그것을 하나로 엮으면 다음처럼 된다. 메시지라는 언어는 이름의 이미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에 이름을 붙일 때, 그것의 형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다르게 말하면 메시지가 있기에 이름이 붙은 게 아니라, 이름이 붙었기에 그것 자체가 메시지의 형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돌아온 이미지의 정체이다. 그 이미지에게 부족했던 것은 이름이었다. 그는 이름을 확보하기 위해 언어의 탈을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목적을 완수해 그의 세계로 돌아간 뒤, 확보한 이름을 지니고 다시금 우리 앞에 드러난다. 이때 우리는 그를 여전히 이미지라고 부르지만, 그 자신에게 이름이 부여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달라졌다. 이름에 대한 책임이 생겼기 때문이다.


언어란 개념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등장했다. 만약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추상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테다. 하지만 그 언어, 그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본디 발화란, 인간에게 있어 발성 기관을 이용하는 쾌락을 안겨주는 행위이기에 그러하다. 예컨대 이름을 부른다는 건 상대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이름을 부름으로서 그것을 자신의 내면으로 편입했다는 느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자가 아니라 ‘이미지라는 언어’라 해서 그런 부류의 쾌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라는 언어에서는 훔쳐보는 쾌락이 있다. 그것은 관음증이다. 즉 이미지에서의 응시는 메시지에서의 발화와 같거나 유사한 기능을 한다.


그러니 우리는 응시(Gaze)하는 행위를 두고서 무릇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선에는 원인이 없지만 결론에 대한 책임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름이라는 게 메시지를 기억하기 위해 지정한 일종의 태그 역할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응시하는 행위는 그곳에 메시지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생성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응시를 통해 이름을 책임지고 싶어한다. 결국 응시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권력과 욕망으로서의 위계가 아닌, 기억의 측면에서 주체를 보존하는 행위가 된다. 이에 따르면 응시란 타인을 내려다보거나 훔쳐보는 것으로 타인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을 욕망의 형태로 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에 이미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메시지에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즉 그것은 만연하는 메시지에서 이미지를 발견하고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우리의 욕망이다. 이때 책임을 지는 게 욕망인 이유는, 우리가 주체로서 행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응시당하기를 원했던 세계에 그 발단의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2.


우리는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말을 사람들과 대화할 때 주고받는다. 이때 우리는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손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이유는 막상 생각해보면 자세히 떠올리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언가를 싫어할 이유는 잘 찾지만, 무언가를 좋아할 이유는 잘 찾지 못한다. 어쩌면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텐데, 좋아하는 이유보다 싫어하는 이유가 세계에 더 잘 밀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무언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보다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응시당하기를 원해서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그건 선호나 취향의 영역이다. 그러나 싫어함은 이미지로 돌아오기 위해 자신에게 이름을 붙이려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핍된 부위에 이름을 채워넣음으로써 판판한 평면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평면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지나가게 된다. 결국 우리는 싫어함에 대해 우리가 그걸 발견하기를 원했다고 착각해버린다. 즉 그 책임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린다. 허나 우리는 세계에 이용당했을 뿐이다. 예컨대 우리는 세계를 응시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이미지의 시대에 그들은 이름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를테면 CCTV라는 장치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목격담의 주체가 되는지를 잘 알려준다. 그곳 안에서 자신은 더는 주체가 아닐뿐더러, 심지어는 세계에 종속된 꼭두각시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의 이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그에 대한 사례 중 하나는, 이전 시대에 노예가 죄를 지으면 주인이 처벌받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노예의 이름은 노예가 아닌 주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이름은 책임이었다. 그래서 이름 없이 쾌락은 존재하지 않았다. 책임이 없다면 쾌락은 있을 수가 없어서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쾌락 없이 책임이 존재하는 시대가 왔다. CCTV와 같은 세계로부터의 목격담은 인간 주체의 이름에 잔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그 소유권을 빼앗아간다. 기술복제 시대에 들어서 이름의 원본에 장소가 지정되지 않게 되었고, 허공을 떠도는 이름들은 세계의 구석들이에 유착되어버렸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주체의 책임은 인체가 아닌 세계의 곳곳에서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이미지의 시대에 분절된 것은 이미지라는 언어가 아니라 그에 붙은 이름이다. 우리가 세계를 응시하고 발화하는 방식으로 접촉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이름들은 이제 그곳에 없다. 그러나 그곳에 없으면서도 여러 곳에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에는 실체가 없지만 실체가 있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 복잡함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에게 형상을 부여한다. 즉 메시지가 있기에 이름이 있고 그래서 그것이 형상화되는 게 아니라, 형상을 포착하려고 이름을 부여한다.


허나 문제는, 우리가 싫어하는 무언가에도 그런 절차를 적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의 매체가 역사 이래로 가장 고도화된 형태를 띤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들 모두에 우리가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산업이 고도화되고 나면 인간이 행복해질 줄 알았으나 사실은 여전한 불행을 담보하고 있었던 것처럼, 메시지가 고도화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메시지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은 시선의 주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며 사고의 주체가 될 기회를 박탈했다. 지금 시대에 인간의 기억능력이 외부장소로 무한히 확장되었지만, 그 기억들을 하나로 응집할 때 그것들은 뇌 안에 잔류하지 않는다. 즉 우리의 신체는 이도 저도 아닌 경유지에 불과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허나 그것들은 유독물을 잔류물로 남긴다. 바다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에게 중금속이 쌓이듯이, 이미지 생태계에서 최상위 소비자인 우리에게는 그런 유독물이 쌓이고 있다.


3.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싫어하는 것에는 이유가 많다. 이 말들을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다. 사랑의 감정은 원인이 없다. 단지 전개와 결론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 혐오의 감정에는 원인이 많다. 그래서 단지 발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혐오는 메아리와 의미적으로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전개와 결론을 생략한 채로 발단만이 존재하는 혐오라는 감정은, 소음의 진원지만이 지목되고는 파급력까지는 계산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메아리와 닮았다. 층간 소음으로 싸움이 벌어지면 소음이 어디에서 들려오는지는 명확하지만, 그 소음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고 어디까지 피해를 입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아름다운 음악이었다면, 누가 들려주었든지 간에 지금 자신의 귀에 들려온다는 점만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예컨대 혐오는 세계로 눈을 돌리게 하고 사랑은 자신에게 눈을 돌리게 한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이들은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불만에 빠진 이들이 자신의 외부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러하다.


사랑의 대상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광고류의 언어라면, 우리는 그런 사랑에 이유를 부여할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콘텐츠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어떻게 향유하고 창출할 것인지를 학습한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시대가 타의적 향유의 시대에서 자발적 향유의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콘텐츠를 우리가 누렸지만, 지금 시대에 우리는 화면을 터치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선택에 책임을 진다. 예컨대 우리가 무언가에 끌린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책임을 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콘텐츠를 소비할 때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다르게 보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자발적 향유는 이름에 대한 향유이고, 그 이름은 주체에 달라붙어 주체의 이름을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유가 없다. 그 이름은 이유 없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혐오에는 항상 이름이 있다. 이 세계는 당연한 게 아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원인을 찾아내었다고 생각하지만, 혐오와 같은 결핍의 행위에 대한 원인은 주체가 아닌 세계에 그 근거가 있다. 그래서 이때 근거를 받아들이는 신체에는 일정한 형체 없이 모종의 형상만이 있다. 개인은 자신이 근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읽어들이려고 하지만, 메시지가 있기에 형상을 한 게 아니라 형상을 부여하기 위해 메시지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름의 이미지가 되어 주체 없이 존재하는 그림자, 즉 세계로부터 이탈하는 그림자에게 전권을 심어준다. 바로 그렇게 혐오와 같은 결핍의 행위는 매체 너머에 있는 그림자 세계, 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Die Welt als Phantom und Matrize)로 넘어간다. 예컨대 우리는 그림자가 우리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둠은 이미 세상에 만연해있다. 그러니 우리가 혐오에 대해 이유를 찾으려 하거나, 이유를 합리화하려 하는 것은 세상이 이미 그렇게 잠식되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밖에 없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묻게 된다.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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