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과 기억, 탑골공원으로의 산책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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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한 후로 탑골공원은 장소가 아니라 단어로 그 의미를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의 용례 변화는 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한에서 정치범을 수용하는 장소와 그곳에서 노역을 위해 보내지는 ‘아오지 탄광’이라는 장소가 ‘보내버린다’는 가상의 농담 겸 협박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한국에서는 ‘남산’이라는 장소가 관광지로서의 상부와 ‘관광 당하는’ 하부로 분할되어 지칭되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 각각 단어의 용례는 ‘탄광’이라는 막장으로서의 삶에 대한 강조적인 요인이나, ‘관광’이라는 요인이 꼭 자신이 보고자 하는 풍경이 아니라 그런 풍경으로부터 ‘보임 당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테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런 요인들 자체는 해당하는 공간에 바로 그것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아오지로 가고 싶냐는 말이나 남산에 끌려가고 싶느냐는 말이 일종의 수사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그곳에 현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후이다. 다르게 말하면 현장이 먼저 알려지고 난 후에야 우리는 그 단어를 어떠한 형태로든 사용하거나 변형할 수 있었다. 그러니 간략하게 말하자면 현장 없이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이는 본래의 단어가 발원한 본래의 맥락을 알고 사용하라는 식의 교훈이 아니다. 그렇게 후천적으로 발현한 단어의 변화조차 그들이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 보면 과거와 현재의 맥락 사이에 생겨나는 미묘함을 우리가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단어를 알기 위해서는 탑골공원이라는 장소가 먼저 어떤 맥락으로 이해되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면 탑골공원에 대한 이해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졌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 뜻에 대해 설명하자면 갈 곳 없고 시간 많은 노인들이 동년배를 만나 시간을 때우기 위해 모이는 현대의 탑골공원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조차 독립운동이 벌어졌던 과거의 공간적, 역사적 성격이 지워져 있지만,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문맥에서는 노인들이 모여 과거를 회상하는 장소라는 점만이 강조되어있을 뿐 노인이라는 환경 구성원에 대한 정의는 소외되거나 외면받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니까 그 점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탑골공원이 노인들이 몰려드는 장소인 것은 알면서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말에서는 왜 노인이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대입하는지 말이다.


가장 직설적으로 문맥을 연결해보면 그런 과거를 회상하는 자신의 처지를 탑골공원에 있는 노인에 대응시켰다는 게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온라인 탑골공원’에 몰려든 자신들의 처지를 노인에 빗대어 해석한다는 것인데, 이는 탑골공원으로 가기에 노인이 되는 게 아닌 현실의 노인들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서 그들은 온라인 탑골공원으로 가기에 노인이 되는 게 되므로 그런 곳에 간다는 것은 곧 노인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점이 우리가 아는 그런 노인에 대한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온라인에서 사용되는 노인이라는 단어에는 육체의 추함이나 고단함이 아닌 정신적인 시간의 흐름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다. 예컨대 이를 두고서 노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세월의 무상함’이 육체를 벗어나 관념으로서 젊은이들에게도 깃들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내가 흥미롭게 느낀 바는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고단함에 무관심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식의 비판이 아니라, 디지털이라는 공간에서 탈락되는 육체의 성격이 공간이라는 물질도 그러한 방식으로 탈락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탑골공원과 온라인 탑골공원 사이에는 어떠한 직접적 연관관계가 없지만,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나아가면서 잃어버린 게 육신이라고 가정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육신에 대해 끝없이 고뇌하고 투구한다는 점이 이런 단상의 핵심이다.


온라인 탑골공원에 가서 젊은이들은 삶의 고단함을 잊는다고 한다. 물론 그런 망각의 용례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 정확한 지적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일할 때 노동요로서 온라인 탑골공원의 노래를 듣는다는 점은 육체의 고단함을 정신적 감응으로 극복하려 드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여기서 핵심은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세월의 무상함이 육체와 정신의 괴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정신은 여전히 그곳에 있는데 육신은 이곳에 있다는 점에 대한 생각, 그렇지만 더 구체적으로 보면 육체의 노동이 정신을 견인하는 과정 속에서 과거로부터 현재로 전해오는 멜로디가 여전한 젊음을 좌시하고 있을 때 우리는 피리 부는 사나이 앞의 아이들처럼 그들에게로 끌려간다는 것이다.


멜로디에 대한 가장 큰 추상은 귀를 통해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정신 감응이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문득 듣게 되는 유령의 목소리는 삶의 어느 순간에 불현듯 발견하는 어느 음악의 성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용법을 크게 전환해서 바라보면 홀 안에 모인 신자들 앞에서 신의 말씀을 전하는 집회자가 신도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는 방식 또한 그것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무언가를 들음으로서 일시적으로 육신을 버리고 공간 자체의 울림에 동화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탑골공원이라는 게 그러한 현상을 지칭하는 일종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탑골공원에 노인들이 모여있다는 현상에 대한 관찰이 시간이 흐르고 그렇게 흐르는 시간보다 뒤처진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단상으로 용법을 전화할 때,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단어는 성립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겪어본 공간이 아니라 겪어보지 못한 공간에 우리가 진입할 때 우리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쉽게 말해 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는 직접 현장에 가서 공간에 감화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면 현실의 탑골공원에 한 번쯤은 가볼 필요가 있다. 현실의 탑골공원은 어느 공원과 별반 다르지 않게 한적하기만 할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어떠한 장소, 공간에 품고 있는 이미지는 현장의 감각과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는 때가 많다. 솔직히 말해서 역사적 공간과 같은 어딘가를 직접 방문한다고 해서 당시의 분위기나 정취가 마음에 와 닿는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것에도 현장이라는 실체가 존재함을 몸소 깨닫는 건 다소 다른 부분의 이야기이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목소리는 모습이 아닌 대답만을 돌려준다. 이때 만약 우리가 목소리에 겁을 먹는다면 목소리에 실체가 없기 때문일 테다. 그렇지만 반대로 목소리에 겁을 먹지 않는다면 그 이유 또한 목소리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방향의 판단이 도출되든 간에 목소리는 자신을 소모할 육체가 필요하다.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영향력을 우리에게 끼친다. 명민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육체와 목소리의 관계를 공식으로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든 간에 그는 자신을 대리할 육신을 필요로 한다. 볼드모트의 속삭임이 마법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해리의 피를 통해 신체를 연성해야 하고,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응집할 어떠한 현상이나 인물을 모체로 내세워야 한다. 그래서 스폰지밥은 마법의 소라고동에게 미래를 물었고, 소라고동은 실체 없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대개, 미디어나 매체에서 말하는 어둠 속의 목소리는 등장인물을 파멸로 이끄는 악한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다소 감상적인 평가가 될 것이다. 탑골공원이라는 공간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그들이 모두 어디로 떠나갔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탑골공원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던 공원이고 그렇기에 그 역사적 상징성으로라도 변한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곳에는 단지 사람들만이 변화하고 있을 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사라져가는 건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다. 목소리에 홀린 개개인이 아니라 그저 산책할 뿐인 개인이 공간에 다녀갈수록 그러한 공간이 갖는 함의는 점진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인간 개인의 세계가 확장될수록 공간 하나에 부여하는 함의가 줄어들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특정한 공간에 특별한 감정을 갖는다는 건 점점 희미한 일이 되고, 그런 이유로 변화하는 사람들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은 공간이다. 과거의 서울이 몇 달을 걸어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던 장소였다면 근래의 서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단 네 시간이면 도착하는 통행로에 불과하다. 탑골공원도 공원이 흔해진 근래에는 평범한 공원 중 하나에만 불과하게 되었고, 그런 평범한 공간에는 삶의 마지막에 자리한 이들이 평범한 자신을 대입하며 과거의 특별했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특별하게 여겨지는 과거의 탑골공원이자 그런 자신이다.


탑골공원에 모이는 이들이 대체로 노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삶의 마지막 부근에 자리해있다고도 볼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삶의 마지막이라는 게 굉장한 무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평균 수명으로 생각해보면 분명하게도 삶의 마지막에 자리해있다. 다시 말해서 탑골공원에 모이는 이들은 실패자라던가 도피자라던가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나이 먹은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두고서 지난 세월의 삶에 대한 회한이라고 공통적으로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고는 하지만, 자신의 지난 삶이 액체처럼 무화되면서 그 모든 것을 현재의 육신으로 수렴하는 이들에게 회한이라는 감정은 그리움 그 이상의 무언가다. 이 현장에서 자신이 그저 시간의 마지막 구석을 내몰린 나이 든 육신에 불과하다는 점은 육체가 목소리를 견인한다고 믿었던 시절의 미련이 아직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육체는 분명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발성기관을 제공하지만, 그런 육신이 시간이라는 구절 안에서 보잘것없는 하나에 불과함을 깨달았을 때 우리의 목소리는 안식 없이 허공을 떠돈다. 말하자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우리는 흘러가 버린 지난 자신을 볼드모트처럼 어둠 속의 목소리로 목격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육체와 목소리 간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어느 순간 육체가 목소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지점이 온다. 나이를 먹으면 그만한 나이에 맞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보게 되지만 당장에 느껴지는 건 노쇠해가는 육신과 그에 부응하지 않는 젊은 목소리이다. 실제로 목소리는 온전한 육체의 구성 중에서는 가장 늙지 않는다. 배우들의 얼굴은 쉽게 늙지만 성우들의 목소리는 쉽게 늙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목소리는 불멸의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얼굴처럼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얼굴과 비교되곤 한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물론 자신이 말하는 바를 귀를 통해 일차적으로 들을 수는 있지만 녹음을 해서 타인이 듣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저 이질적으로 들리기만 할 뿐이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자기 얼굴을 거울로 보아도 그렇게 이질적이지는 않은 반면에 자기 목소리를 녹음기로 들으면 굉장히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사진이나 동영상, 거울과 같은 것으로 자신의 얼굴을 돌아보기는 쉽지만 목소리에 대해서는 그런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거나 아예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신체에서 얼굴은 영상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있다. 애초에 우리는 목소리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얼굴 없이는 살 수 없기도 하다는 점이 그런 점에 대한 은유적 결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탑골공원에 모인 노인들을 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지는 못했다. 이야기를 듣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목소리란 게 그런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두되는 게 음악이라는 매체이다. 음악은 얼굴 없이 목소리만을 지녔고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얼굴과는 반대의 속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수들의 얼굴을 사람들이 궁금해할 때 얼굴에 대한 호기심은 영상에 대한 탐미로 변해갔고, 영상에 대한 추구는 목소리에 얼굴을 부여함으로써 볼 수 있기에 우리가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술의 점진적인 발달에서 사진이라는 매체가 먼저 등장했지 녹음기라는 매체가 먼저 등장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흥미로운 발달 순서는 우리의 이해가 얼굴에서 목소리로 나아가는 이유이기도 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음에 대한 시간의 무상함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죽은 자, 주류로부터 추방당한 이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쩌면 밝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낯선 이의 희망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리고 디지털이라는 게 우리에게 육체에 구애받지 않게 해준다면 그들이 들려주는 목소리는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신체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가운데 들려오는 목소리의 존재는 상시로 확인 가능한 자기 육체의 피로와 늙음에 관한 관찰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목소리는 항상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해 보이는 것과는 다른 우리의 시간을 자기 품 안에 지니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온라인 탑골공원이란 노쇠함에 대한 마음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육신을 떨쳐내는 이들의 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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