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희정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은, 리부트라는 표현이 개인의 측면으로도 손쉽게 변환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리부트라는 것은 어떤 작품을 두고 ‘몇몇 중요한 설정은 유지하면서 세계를 개변하는 일’인데, 이 과정을 요약하자면 연속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라지기는 하되, 그럼에도 이게 전작의 유지를 이어받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리부트라는 개념 자체보다는, 몇몇 중요한 설정을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리부트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리부트라는 것은, 리부트라는 행위보다는 리부트의 결과물로 나온 것을 지칭하는데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리부트를 하는 이유는 리부트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이지 리부트라는 개념 자체를 재현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부트라는 것은, 이론의 증명 보다는 실무적 성격이 더 짙은 개념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지점에서 나는, 내가 썼던 문장의 몇몇 지점을 개인의 내면으로 돌리게 되면 그것이 한 인간의 성장에 대한 흥미로운 단상이 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손희정이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개념을 주창하며 지적한 리부트라는 개념에서의 구성 요인은 단절과 접속의 문제였었다. 물론 손희정은 이 개념에서 리부트라는 것을 이전과 이후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의 봉합, 페미니즘에서 포스트 페미니즘(이라 이름 붙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산개하고 집합하는 개인에 대해서도 적용했지만, 이 대목에서 말하는 절단과 봉합이라는 이미지 자체는 개인이 둥지를 떠나 새 보금자리를 맞이할 때 벌어지는 변화의 과정, 또는 그럴 때 느껴지는 심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하기 전에는 ‘취업준비생’이라는 직장인으로서의 유예기간이 주어지고, 이 시기에는 학생 신분도 아니고 사회인 신분도 아니라는 점에서 모호함을 느낄 가능성이 큰데, 그때 개인이 하는 고민은 자신이 학생 신분에서 해왔던 일들이 사회인 신분에서도 얼마나 유용할지, 혹은 사회인이 되려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고 지금껏 해왔던 것 중에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와 같은 쇄신의 문제이다. 예컨대 이것은 쇄신의 시기에 자신의 이전 모습을 기준으로 포스트 ‘자신’을 찾아 떠나는 모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리부트라는 것은 쇄신의 시기에 달라져야겠다고 마음먹는 행위가 아니라 새로이 달라질 자신의 모습을 구축하는 재건(Reconstruct)의 행위이다.
이쯤에서 리부트라는 단어가 본래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그것이 영화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짚어보면, 우리는 리부트를 진행한 작품 중에서 그렇게 성공한 시리즈가 얼마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최근에 있었던 스타워즈 시리즈의 <라스트 제다이>에서 벌어진 ‘이것은 스타워즈가 아니다.(르네 마그리트?)’ 논란이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다크 페이트>가 원감독인 제임스 카메론이 공식적으로 지칭한 후속작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해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이유야 많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원인은 원작 팬들에게도 외면받고 신규 독자에게도 외면받은, 신구 세대 모두에게 어필하지 못했다는 점일 테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지점이 팬들이 생각하는 중요한 지점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곳에서의 신구 세대를 두고서 절단과 봉합이라는 이미지에 대응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리즈 작품에서 리부트를 하는 이유가 소위 말하는 고인물층, 기존 팬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 신규 팬의 유입을 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두고 일종의 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기존 팬과 새로운 팬이라는 두 가지 갈래를 자기 자신에 대한 반역과 옹호의 행위로 변환해보고 싶다. 위에서 했던 비유를 이곳에 빌리자면, 학생과 직장인이라는 두 개의 신분 사이에는 취업준비생이라는 유예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이 바로 자신을 쇄신하는 용도로 주어지는 ‘리부트’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인데, 우리가 즐기던 콘텐츠들처럼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리부트할 것인지를 숙고해보아야 한다. (삶을 즐기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곳에 기존 팬과 새로운 팬이 있고, 리부트를 하는 이유는 기존 팬에만 그쳐버리면 프렌차이즈 자체가 고여버릴 위험이 있기에 신규 팬을 유입시키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 기존의 ‘나’가 있고 새로운 ‘나’가 있으며, 우리가 리부트를 하는 이유는 기존의 모습에만 그쳐버리면 삶 자체가 고여버릴 위험이 있기에 새로운 나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이 대목에서 새로운 팬과 새로운 나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자체적인 수요 예측에 의해 설계되는 가상의 존재이다. 그리고 리부트라는 행위가 리부트를 통해 나올 결과물을 위해 시도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리부트라는 행위는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 미래를 설계하는 미래지향적 행위라 할 수 있다.
2.
리부트는 미래지향적인 행위이다. 그러니 그것을 학생과 직장인 사이에 존재하는 취업준비생이라는 신분을 두고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필연적으로 겪게 될 고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고통을 참아야 하는 이유가 다가올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마치 불교 교리 같지 않은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만약 그렇다면, 현재 삶과 다음 삶의 중간지대에 자리한 것은 환생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된 리부트라는 행위일 테다. 그리고 환생이라는 행위는 단절과 봉합의 이미지로서 자신을 분해하고 몇몇 중요한 것만을 추려내어 재건하는 역할을 담당할 테다. 따라서 환생이라는 행위가 리부트로서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는, 설령 현재 삶과 다음 삶이 연속성을 띠는 게 맞다 하더라도 중간에 자리한 죽음이라는 단절을 우리가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주체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그리고 주체가 없다면 분해 이후의 봉합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으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에만 머무르는 현재 지향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다른 측면으로 바라본다면, 불교의 환생에 빗대어 생각해본 것들은 무의미한 상상으로만 사라져버리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게 그에 대한 주된 이유이다. 삶에 대한 고리타분한 조언이나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리부트하는 것을 염원한다는 점에서 이미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우리가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컨대 우리는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매번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는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정말로 죽고 싶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는 모순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때 왜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지만, 죽음을 희망하는 이 역설적인 마음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해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리부트라는 행위 자체가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담고 있기에 우리가 기획한 그것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살아있어야 하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벤야민의 역사관과도 어느 정도는 닮아있는 듯 보인다.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라는 글에서 과거로 지정된 현재가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희미한 힘, 우리가 메시아라고 부르는 것을 부른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염원하는 미래는 사실 지나쳐온 과거로부터 이미 지정되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조금 뒤에 과거가 되어버릴 현재를 더 잘, 세밀하게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여기서 벤야민이 역사 유물론을 자기만의 언어인 메시아 신학과 결합하여 사용하는 점은 마치, 취업준비생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신에게 비는 모습과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쉽게 말해 취업준비생들이 직장인이라는 미래를 염원하는 이유는 자신이라는 이름의 메시아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 메시아는 누구도 아닌 자신이며, 그는 학생 시절의 자신으로부터 이미 예정되어있던 존재이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우리가 간절하게 염원하는, 어떻게 살 것이고 무엇이 될 것인가의 문제는 과거로 지정된 현재가 바로 과거-미래-현재라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에서 그 당위성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을 두고 리부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기존 팬이 신규 팬과 만나 중간지대를 확보하는 것만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일 테다.
벤야민의 역사관이 신학적 시간과 마르크스 변증법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리부트라는 포스트 ‘자신’을 그에 견주어 논하는 것은,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그렇게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취업준비생들이 직장인으로서의 자신을 미래의 모습으로 설정하며 그에 도전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그것이 간절한 기도와 같은 염원의 형태로 방출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비유도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단절과 접속의 문제에서 이루어지는 재건의 과정이 완전하게 과거를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주체의 연속성이 또렷이 요구되는 벤야민의 역사관은 우리가 말하는 리부트의 개념에 필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환생을 원한다면 그건 중간에 끼인 죽음이라는 것으로 인해 연속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환생이라는 이름의 리부트는 어디까지나 현재를 떠올리는 것에 그치는 죽음에 가로막힌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신구가 만나는 지점에 들어앉은 죽음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원하는 재건의 형태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기만 해서 존재의 근거를 부정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내가 현재를 있게 했고, 그런 현재에서 도전하는 미래는 과거에서 미래로 관통하여 현재의 나에게 다시 찾아온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런 과정에 나라는 존재는 결코 단절되어있지 않다. 꼭 인식의 측면이 아니더라도 단절이라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단절과 접속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컴퓨터와 같은 전자기기에서 전원이 한번 끊기면 사용 중이던 작업이 말끔히 사라지듯이 한 번의 단절을 겪은 우리는 이전의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이름의 책을 보았을 때는 이런 제목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용이 어땠는지는 보지 않아서 모른다. 그렇지만 해당 도서와 비슷한 주제로 전시된 곰돌이 푸의 명언 모음집과 같은 것들을 보니 사람들이 많이 지쳐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본래 자기계발서와 같은 게 정말로 자기계발을 위해 구매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와 같은 명령에 지목당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할일을 외부로부터 개입시키는 방식으로 주체적 활동에 대한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함이라는 점을 떠올려 볼 때, 그 책도 다른 자기계발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해당 책의 제목에서 주목할 점은 ‘죽고 싶지만’이라는 만약을 가정한 거부의 수사이다. 죽고 싶지만이라는 문장은 죽고 싶지만 그러지 않거나 못한다는 죽음에 대한 거부를 표명하는 것인데, 죽지 못한다는 점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들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이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죽음에 대한 고통의 강도를 대결하려 할 테고, 죽음을 생각해본 적 없는 이들은 죽음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추론을 하려 할 테다. 즉 이 제목을 통해 독자에게 죽음이라는 화두가 던져진다. 그러나 해당 제목은, 화자가 어차피 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기에, 그것은 예정된 미래(죽지 않거나 않을)를 말하는 현재(죽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가 과거를 들려주는 게 된다. 쉽게 말해, 이 제목은 리부트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죽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이라는 건 떡볶이를 먹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이다. 원제목의 논지에 따르면 죽음의 무게는 막중하지만 그런 막중함은 사소한 희망으로도 이겨낼 수 있다는쯤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는 이렇게 읽힌다. 죽어서는 떡볶이를 먹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 존재한다면 그것만으로 리부트라는 행위는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본래 리부트라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행위, 미래가 현재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메시아적인 구원의 성격을 염원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발굴해낸 메시아는 학생 시절의 자신이 쌓은 능력이 직장의 수준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스펙 위주의 취업 경쟁으로부터 취업준비생 신분으로 존재하는 현재의 우리를 구원해주리라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까 차례로 보면 과거의 내가 미래를 거쳐 다시금 현재의 나를 구원한다는 소리인데, 결국에는 우리는 자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것이 의미가 없는 행위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적하게 되는 부분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를 먹어야 한다는 점에서 죽음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즉 떡볶이를 먹는 미래가 예정되어있기에 그것은 미래로 나아가는 미래지향적인 태도이고, 미래지향적인 태도에서만 리부트라는 행위가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이 책의 제목이 현재에서 쓰인 과거를 미래에 대한 메시지로 ‘리부트(Reconstruct)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휴학 한번 없이 학교생활을 했다.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입장에서, 주변에는 여러 형태의 곡소리가 들려오고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짙은 안개처럼 깔려있다고 느낀다. 겉으로는 밝아보여도 다들 암묵적으로 취업에 대한 부담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품에 안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기한 것은 나 또한 또래에 속해있으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지만, 그들의 고민을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분과가 달라서일까. 아니면 인간은 본디 자기밖에 모르는 생물이라는 것일까. 그것 모두가 맞는 말이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인간에게 지정된 현재라는 게 자신에게로만 성찰하도록 허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는 현재라는 시간의 벼랑 끝에서 늘 아슬아슬하게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이라는 것을 앞당기기를 암묵적으로 거부한다. 이성이 죽음이라는 단절, 그 망각을 염원하지만 동물의 본성이 그걸 거부한다. 이때 이성이 죽음이라는 단절과 망각을 염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환생이라는 이름의 리부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환생이라는 것은 죽음 그 자체로서 이미 단절되어 현재라는 벼랑으로만 우리를 밀어 넣는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죽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런 벼랑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먼 미래가 아닌 근미래에 가져다 두려는 점 때문일 테다. 그렇게 죽음이 근미래에 놓임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감에서 오는 에너지로 죽음을 격파, 분해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상처를 봉합함으로써 얻는 재건의 과정을 겪으며,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이었는가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얻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죽고 싶다는 허투른 말은 생명을 내지르는 바보 같은 말이 아니라 리부트를 위한 리부트, 번데기가 되려는 이들의 반역 행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