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빛이 있으랴.” 창세기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문구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태초에 어둠이 있었고 하느님의 말 한마디로 세상에 빛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문구는 우리가 보통 죽음을 어둠이라고 여기는 것을 생각할 때, 죽음에서 삶으로 향했다는 ‘생명의 창조’ 개념을 세계 전반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빛이 있으랴’라는 말 한마디에는 단순히 세계의 창조뿐만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의 권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그것을 창조가 아닌 ‘창작의 권리’라고 표현한 이유는 창세기에 반기를 든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신이 세계를 만들었음에 경의를 표하기보다는 신이 우리를 만들 권리가 있었다는 점을 먼저 말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단계, 신은 죽음처럼 어둡던 세상에 광명(光明)을 찾아오게 했다. 2단계, 그 빛 안에서는 개인의 어둠을 빛으로 환향하는 생명들이 태어났다. 예컨대 이러한 구조에 따르면 우리 자신을 태어나게 한 어둠이라는 설계에 대하여 신으로부터의 담습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게 된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어둠이라는 속성에 부여했고, 그런 어둠 안에서 자생한 우리는 신의 존재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은 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만약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자신을 있게 한 것들에 경의를 표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대해 온전한 믿음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왜 우리가 주권의식-작은 세계의 신이라는 생각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질 권리가 있었던 신의 대리격인 존재이다. 세상은 매일 어두워지고 밝아지기를 반복하며, 우리 또한 어둠으로 잠들고 빛으로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왜 세상이 어두워질 때 우리 또한 잠자리에 드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잠자리에 들기에 세상이 어두워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어두워지기에 우리가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세상의 원리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며, 어디까지나 세상의 원리에 종속된 존재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주권의식이 있고, 잠을 자는 시기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2.
몇몇 동물은 겨울잠을 잔다. 그런데 이 겨울잠은 본능에 따른 것이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이런 점에서도 인간에겐 주어진 권리가 돋보인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인간에게 억지로 잠을 자게 하는 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무언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게 신화 속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용례이다. 옛 신화 속에서 잠을 잔다는 건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항해하던 도중에 깜빡 잠이 든 영웅에게는 낯선 항로로의 진입이 기다리고 있다. 영원한 잠에 빠진 배우자를 구하려 저승으로 향한 이도 있고, 신으로부터 잠이라는 형벌을 받고 자신을 구해줄 이를 기다리는 여인도 있다. 신들은 잠을 통해 인간을 현세와 분리했고, 현세에 발 디딘 존재인 인간에게 그것은 시련이었다.
그런데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에게 잠은 필연적인 무언가가 되었다. 우주로 나가는 SF 영화를 보면 잠에 듦으로써 오랜 시간이 걸리는 항해를 ‘극복’하는 사례가 다수 나온다. 여기서 핵심은 잠에 든다고 해서 실제 항해에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주선을 빠르게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마취’시키는 것은 몹시 간단하기 때문이다. SF 영화에 나오는 동면의 사례는 죽음에 가까운 상태로 내내 살아있기만 하는 것, 다르게 말하면 죽어있지만 살아있기도 한 것으로서 시간을 아주 길게 늘려놓은 상태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평균 적인 혈류로 살아가지만 그렇게 잠에 듦으로써 최소한의 혈류를 획득하게 되고, 기형적으로 늘어난 시간 덕분에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우주선 안에서 버틸 수 있게 된다.
SF 영화 장르 전체로 보면 아니겠지만, 우주여행을 테마로 한 작품에서 동면이라는 소재는 인류가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반 시간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늘려놓은 시간을 이용해야만 비로소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러한 이미지, 관처럼 보이는 생명유지장치 안에서 동면하는 우주인들의 모습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그것과 유사해 보인다. 그들이 누워있는 장소, 생명유지장치에 연결된 육체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게 죽음과 삶의 가느다란 연결이라는 점에서다. 입에 물려있는 호흡장치와 팔뚝에 물려있는 혈류장치는 육체에 비하면 몹시 가느다랗지만, 그것을 제거하게 되면 환자는 죽는다. 말하자면 그 가느다란 관들이 환자를 죽음을부터 이승으로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모습이 우주여행 시에 동면하게 되는 이들의 시간 개념, 죽음에 가까워짐으로써 시간을 늘려놓는 형태와 ‘유사하게도’ 보인다. 따라서 중환자와 우주인의 공통점은 시간을 늘려놓음으로써 미래의 시간으로 도착하기를 고대한다는 점이다. 당장의 현실을 유예하고 그것을 버텨내면 성공적으로 미래에 도착할 수 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우주인은 자의로 동면을 선택했지만 중환자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점이다.
3.
문득. <어벤져스 : 엔드게임>의 마지막 장면인, 아이언맨이 죽고 나서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앨런 실베스트리가 작곡한 ‘진짜 영웅(The Real Hero)’인데, 이는 영화 <드라이브>에서 콜리지 앤 일렉트릭 유스가 부른 곡과 이름이 같다. 물론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영화이다. 나는 단지 음악 제목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두 영화를 이곳에 모아두었다. 그렇지만 하려는 이야기는 비슷하다.
먼저, <엔드게임>의 도입부에서 아이언맨은 연료가 떨어져 가는 우주선 안에 갇힌 채로 있다. 이때 아이언맨은 식량도 물도 다 떨어졌으니 죽을 일만 남았다고 말하며 자신의 헬멧에 유언을 남긴다. 이 장면에서 그는 죽어가고 있고, 물론 구출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는 다른 이유로 죽는다. <엔드게임>에서, 이 두 장면이 아이언맨의 죽음에 대한 예고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거시적으로는 프렌차이즈 전반의 발단이 된 <아이언맨> 1편에 대한 수미상관으로 끝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어떠한 가느다란 인과가 그곳에 작용하고 있음을 가정해볼 수 있다. <엔드게임>이 시간여행을 통해 인과를 뒤집는 플롯을 지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다. 요약하건대, <엔드게임>의 아이언맨은 <아이언맨> 1편으로부터 죽음을 유예해왔던 존재라는 것이다.
SF 영화에서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이 냉동 수면, 혹은 동면이라는 말로도 이행되어 왔다는 점이 <엔드게임>의 시간여행에 대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엔드게임>에서의 시간여행은 양자영역이라는 가상의 과학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작중의 언급에 따르면 지구보다 과학기술과 마법이 몇 배는 더 발달한 종족들도 개발해내지 못한 기술이다.* 그러니까 시간여행은 지구인의 특혜이다. 인간의 범위를 지구인으로 한정한다면 이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혜라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 클리셰 중 하나인 ‘주인공 보정’이거나 ‘인간찬가’일수도 있겠지만, 오직 인간만이 죽음/시간을 성숙하게 다룰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따라서 직역하면 ‘철남’에 해당하는 아이언맨이 사라진 우주의 절반을 되돌리는 것은 그러한 인간적인 면에 대한 수복, 반인반철의 분류에서 인간이 마침내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각주 : 타노스가 핌 입자를 복제하기는 했다. 그러나 먼저 개발해내지는 않았다. <앤트맨>의 빌런도 핌 입자를 모방하기는 했지만 시간여행까지 가능한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처음에는 그랬지만 뒤로 가면서 어벤져스 멤버가 딱히 지구인에만 한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지구인-인간이라는 정의를 헤치는 것 같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타노스와 어벤져스의 대립 구도를 세우는 이 작품에서 지구인이라는 건 사실상 그들 팀 전부-아군을 뜻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논의를 다음으로 넘겨보자면, 어느 다른 SF 영화처럼 동면에 들지 않고 ‘살아있는’ 채로 탐사에 나섰다가 위기에 빠진 도입부에서의 아이언맨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인간 진영의 대표로 아이언맨이 선택된 게 <아이언맨> 1편이 없었다면 이 프렌차이즈가 완성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아이언맨> 1편이 프렌차이즈 전반을 구축하는 방식에는 ‘나는 아이언맨입니다.’라는 중대 선언이 들어있다. 이 선언은 그동안 음지에서 활약하던 히어로들을 대외적으로 ‘표방’함으로써 그들을 비인간적인 것,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능력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던 이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왔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절차는 그들 히어로가 어떤 능력과 출신을 지녔든 간에 우리 인간, 관객의 기준으로 그들을 이해되게 만든다는 점에서 프렌차이즈 구축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프렌차이즈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 속에서 여전히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형의 영웅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활동하는 DC코믹스의 영웅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코믹스에서는 아니더라도 그동안 만들어진 <배트맨>과 <슈퍼맨>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그가 인간이 아닌 ‘~맨’이라는 이름이라는 점인데, 마블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되는 걸 고려하면 마블과 DC의 차이는 확연하다고 할 수 있다. <엔드게임>의 메인 빌런인 타노스를 고려해보아도, 그는 영화 역사상 가장 인간적인 악당 중 하나이기도 하고 말이다.
4.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과도 같은 것과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이 ‘에덴동산 이전과 이후의 인류’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류는 시간이라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선악의 저편으로부터 추방되어 선악을 깨우치게 된 인류에게는 육체의 노화라는 형벌이 내려졌다. 말하자면 에덴동산의 바깥에는 시간이 흐르고 있고 그것은 곧 인류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닥쳐옴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이 늘 낮이었던 것에 반해 에덴동산의 바깥에는 밤이라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밤이 되면 찾아오는 맹수들에 대항해 손아귀에 쥐게 된 것이 바로 불이다. 인간은 불을 거머쥠으로써 자신에게 닥쳐오는 죽음을 어느정도 유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유예하고 있는 환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나는 지금 죽음이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죽음이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주로 나아가는 우주선의 모습, 어두컴컴한 우주 안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우주선의 모습이 마치 밤중에 켜둔 불, 늘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인간의 모습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었다.
여기서 비유를 조금 더 내세우자면, 아이언맨에게 슈트의 존재가 바로 그렇게 보인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어딘가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아이언맨의 슈트는 콜롬버스에게 배와도 같은 역할, SF 영화에서의 우주선과도 같다. 다르게 말하면 아이언맨의 슈트는 마치 관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렌차이즈 안에서 아이언맨은 <어벤져스> 1편에서 우주에 다녀온 이후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그가 핵미사일을 안아 우주로 날아가는 장면이 슈트 안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우주로 향하는 우주선처럼 보이고, 그것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죽음의 위협에 가장 직접적으로 시달리면서 여행을 수행하는 상태였음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토니의 장례식과도 같았다. 그러므로 토니가 핵미사일을 떠나 보내고 뉴욕 한복판으로 불시착했을 때, 그리고 다시금 회생에 성공했을 때 그것은 정말로 죽음에서 돌아온 게 되는 것이다.
5.
<어벤져스> 1편에서 뉴욕 시민에게 미래를 찾아준 아이언맨은 그 후로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게 된다. 동시에 그는 슈트가 없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고민해보게 된다. 다르게 바라보면 우주선이라는 게 없으면 인간이 우주로 나갈 수 없음을, 그렇게 시간을 유예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인간은 미래의 한끝으로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슈트 안에서는 전투의 긴박함으로 시간이 현재의 저편으로 끝없이 유예되지만, 전투가 끝나고 슈트의 밖으로 나오면,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아이언맨은 시간 아래에서 무기력한 상태로의 인간이 된다. 말하자면 아이언맨 슈트는 그에게 있어 에덴동산과도 같은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는 에덴동산이라는 신의 구원, 그것 없이 인간 존재는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선으로 프렌차이즈 전체를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담론으로 해석해버린다면 무리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노스의 사상이 굶주림에 시달릴 바에 차라리 미리 절반을 없애는 것으로 공동의 자원을 확보하자는 것이었음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SF 영화에서 인류가 동면할 정도로 멀리 나가는 이유는 지구에 자원이 부족해서, 혹은 지구 이외의 행성을 찾아 떠나기 위해서다. 생존의 문제라는 소리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올 죽음을 유예하기 위해 당장의 죽음, 동면이라는 형태로 시간을 늘려놓는다. 이렇게 하면 어쨌거나 미래라는 곳에 도착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시간으로서의 미래와 무언가를 갈망함으로서의 미래는 다른 용례로 사용된다. 단순히 미래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는 닥쳐올 죽음에 대한 회피에 불과하고, 제대로 된 미래를 획득하려면 언젠가는 죽음이 닥쳐올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아마도 <엔드게임>에서의 토니가 보여준 행보가 그것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엔드게임>에서 지구인들은 사라진 절반의 인구를 추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부각되는 건 살아남은 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시간보다 ‘사라져버린 이들이 살아왔던’ 시간이다. 말하자면 미래보다 과거에 집중하고 있고, 어벤져스가 시간여행을 택하는 이유도 그렇게 사라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과거라 함은, 시간적인 요인보다 죽음이라는 관념적 요인이 더 부각된다. 어벤져스의 구성원들이 과거로 돌아가면서 목격한 것들은 아이언맨의 돌아가신 아버지, 캡틴 아메리카에게는 자신이 묻혀있던 동안의 여자친구, 헐크에게는 다른 차원의 에이션트 원이다. 여기에 그들이 시간여행을 위해 택했던 양자 세계는 전편인 <엔트맨과 와스프>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던 이가 오랜 시간을 뚫고 살아 돌아온 공간이기도 하다. 그가 양자 세계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그곳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었고, 그러니 이 양자 세계는 미래는 아니더라도 죽음을 유예하는 성격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게다가 그곳 양자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일종의 나침반을 쥐여주는데, 계기판 위에 점의 형태로 묘사되는 상대의 흔적은 빛을 따라가는 나방, ‘빛이 있으랴’고 말하는 창조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돌아오는 것에 성공했다는 점이 기존에 우리가 알던 비극적 설화, 저승에서 배우자의 영혼을 구하지 못한 오르페우스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양자 세계에서 돌아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된 이들이 시도하는 건 양자 세계를 통한 시간여행이었고, 타노스에 의해 사라진 절반이 정말로 죽어버린 게 아니라 단지 유예된 죽음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점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유예는 이 프렌차이즈의 다음 구역인 <스파이더맨 : 홈 커밍>에서 5년의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에덴동산이라는 창세기 이후로 진입한 이 프렌차이즈의 차후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이자 우려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블은 마블러스(marvelous)가 될 수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7BXFda6yc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