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러보면 돌아오는 건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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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과거를 추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대중적인 것은 노래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 사진이나 동영상이 주된 ‘기록’ 매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노래는 기록된 것 자체로 성립하는 매체가 아니라 사용자가 ‘발화’함으로써 의미를 얻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사진이나 영상을 보지 않아도 그들은 여전히 기록으로서 그곳에 남아있는 반면에, 노래는 우리가 발화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어쩌면 이것이 노래의 불완전성, 주체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보조적 수단임을 명시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보면 그런 점이 우리가 왜 노래를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동반자 관계, 노래의 그런 불완전함이 우리를 참여케 하는 동인이 되고, 이는 노래라는 매체의 범주가 단순히 발화 이후만이 아닌 ‘주체를 포함한’ 노래하는 ‘것’으로 재확인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진이나 동영상에 ‘찍는 이’를 포함하여 바라보지는 않지만 ‘노래’에서만큼은 ‘누가’ 이것을 불렀는지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고 있지 않을 때 그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은 지나가 버린 것들, 시간의 저편으로 흘러간 무언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이는 회한일 수도 있고, 목격담일 수도 있다. 떠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진에 의존하는 이유이고, 동영상으로부터 섬뜩한 시선을 돌려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노래라는 것은 사진과 동영상과 비교해볼 때 어떤 것을 우리에게 해줄 수 있을까. ‘노래’를 ‘음악’의 범주로 놓고 본다면 그 용례는 다양해질 테다. 무성 영화 시절에는 가사 없이 음악만이 흘러나왔지만 유성 영화 시절에 와서야 비로소 ‘가사’가 있는 ‘노래’가 삽입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아도 그렇다. 할리우드 숱한 뮤지컬 영화들, 아마도 이러한 점은 유성 영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음악’ 없는 영화가 아닌 ‘가사’ 없는 음악을 생각해볼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말하고 싶었고, 우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건 악기가 아니라 가수였으니 말이다.


악기로 만드는 음악이 클래식이라면 인간이라는 악기로 공연되는 것은 오페라이다. 그리고 오페라는 음악으로 진행되는 연극이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악기로 연극을 한다는 것은 음악이라는 행위이기도 하다. 논리가 다소 부산스럽지만 나는 ‘음악’의 정의를 그렇게 내리려 한다. ‘음악’이라는 것은 그 창조에 인간이 연관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연이 들려주는 음악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연이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는 언어의 기준이 자연이 아닌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자연을 인격화할 때 그는 가수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자연에서 음악,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연상하는 건 자연 자체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주체’의 심상이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자연에 부여하는 대부분의 이미지가 ‘어머니’와 같은 풍요로움일 뿐이다. 여러 사람이 떠올리는 자연이라는 가수의 모습이 비슷한 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2.


순전한 우연에 관해 말해보고 싶다. 음악이 아닌 노래가 부르는 주체에 따라 다른 맥락을 지니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하나의 음악을 두고 릴레이를 벌이는 ‘다시 부르기*’의 향연이 주체에 대한 기억과 연관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주 : 고인이 된 가수를 추모하며 그의 노래를 동료 가수가 번갈아가며 부르는 행위 및 공연. 살아있는 가수를 대상으로 하면 추모가 아닌 경의의 표현이 된다.) 신해철과 김광석, 유재하와 같은 이들의 노래를 다시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우리는 추모 대상의 노래를 부르는 다른 가수들의 영상을 보면서 그들 가수가 아닌 추모 대상을 떠올린다. 예컨대 이는 소위 말하는 커버곡처럼 다른 가수의 곡을 이 가수가 얼마나 잘 소화해낼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무대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고인에게 헌화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다시 (Re) 부르는 (Call) 것으로서 떠올리는 (Recall)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두고 제의적 행위라고도 부를 수 있다. 명계에서 망자를 일시적으로 불러내는 게 무녀나 제사장과 같은 이들의 역할이었다면, 가수를 이곳에 불러내는 방법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으로서의 풍광을 노래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사진이 주는 그리움의 감정은 ‘본다’는 감각과 연계되어 우리에게 어떠한 풍광을 재현하고, 동영상이 담은 시간의 변화는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주었다. 이러한 매체의 상향 속에서 가장 원초적인 매체인 노래가 과연 무슨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는 현대 영화가 음악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받는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감정을 전달하기에는 기막히게 효율적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영화 안에서 음악이 삽입될 때 그것은 해당 상황의 맥락을 대변하는데, 그 상황의 대변인이 곧 노래를 부르는 이로 치환되는 게 영화 음악의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니까 이는 노래라는 게 단순히 들려오기만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쪽, 노래를 부르는 쪽의 역할이 중대한 매체라는 점에 대한 부연설명이 된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누가 찍었든 그것을 관람하는데 별로 상관은 없지만, 노래는 누가 불렀는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가 이 노래를 불렀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가수의 이름일 것이다만, 그보다는 멋진 답변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 ‘부르다’라는 것, ‘Call’이라는 것,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없는데 받는 사람만 있는 상황을 우리가 상상해볼 수 없듯이, 노래를 듣는 사람은 있는데 노래를 하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우리는 상상해볼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추모의 목적으로 다시 부르기를 행할 때는 고인을 대리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육신을 빌려 영혼을 현세에 재림시키는 게 아니라 그 가수 또한 그리움을 발하는 그릇으로서 고인에게 연락을 취하는 화자가 된다. 이때 우리가 갖는 그리움의 감정이 가수 본인으로의 만남을 갈구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그에 한정될 뿐이라면 가수가 고인이 되고 난 후에 태어나 그의 노래를 접한 이들에게 그리움의 감정이 생겨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고인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은 세대를 막론하며, 이는 노래의 역할이 시간을 앞서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르는 쪽’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3.


노래를 부르거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입안에서 언어를 내뱉는다는 것이며, 언어가 아닌 괴성이라면 ‘부른다’라고 할 수 없다. 이를테면 우리가 타인을 부르는 방법 중 다음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낯선 타인에게 말을 걸 때 ‘저기요’라는 표현을 사용하고는 하는데, 이 말에서 ‘저기’라는 게 나에게서 떨어진 건너편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저기요’는 나에게서 그로 도달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용례가 음악에 적용될 때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왜냐하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나’에게서 그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이고, 다시 말해서 이는 노래를 통해 어떠한 메시지를 얻는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노래를 부름으로써’ 그에게로 다가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마도 이는, 늘 응시의 환상에 시달리는 영상 시대의 우리가 노래하는 행위에 천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본다는 말이 응시의 환상으로 무너진 상황에서 부름으로써 부름을 받는 노래의 매력이 우리에게 주도권을 쥐여준다는 점이 심리적 안정감을 안겨주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나간 가수들의 노래를 다시 부르는 모습에 열광하는 것은, 그 시절을 보냈다는 자신의 추억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그 시절 자체로 다가서려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한다. 환상을 품는 것과 그게 정말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 이들은 많지만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은 ‘기다림’으로 완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노래를 들으면서 어떤 것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사진과 동영상에서의 그리움이란 이미 흘러가버렸고 돌아올 수 없고 그렇기에 기다린다는 마음으로 작동하는 감정인데, 노래에서의 그리움이란 음악에 씌인 문장을 읊음으로써 화자가 감정에 직접 구조대를 투입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어쩌면 그게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 같다고 생각했다.


시체를 다시 살려내는 듯 보인다고 해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게 아니다. 우리가 파헤치는 무덤은 시체를 꺼내어 그것을 애호하려는 시체성애가 아니라 그 자리에 우리가 누우려는 유사 죽음의 논리로 작동한다. 그리움의 정서가 유사 죽음으로 변환되는 과정에는 시체로부터 죽음을 빼앗으려는 강탈의 면모가 자리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망자에게는 죽을 수 없다는 불멸의 특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에게는 그렇게 미화된 죽음을 ‘안락함’으로서 취득시킨다. 이렇게 취득된 죽음의 메아리는 가상의 매체이지만 물질 매체이기도 한 반복재생의 형태로 실현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곳에서 헤어날 수 없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다시 부르기의 어떤 노래를 반복하는 게 추억에 젖어서인지 아니면 삶에서의 도피 행위인지를 구분하기란 어렵다. 추억에 젖는다고 해서 현실 도피라고만 할 수는 없고, 현실 도피 후에 도착하는 곳이 추억이라는 이름의 과거인 것도 아니니 말이다.


4.


자문자답인 것 같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소극적으로 시작된 다시 부르기의 형태가 그런 식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한도전의 [토토가]나 JTBC의 <슈가맨>과 같은 회고록 형태의 프로그램이 의도하는 게 현실로부터의 도피이거나 단순한 추억 팔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 적절한 타협안으로 무엇을 꺼낼 수 있을까. 먼저 가수 자체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지적해야 한다. ‘추억의 가수’라는 이명에는 ‘그때 그 사람’이라는 재회의 면모가 담겨있고 이는 곧 우리가 그를 만나야만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단순히 예전에 알던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이라면 어떤 것이든 특정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이때 그 이유라는 것은 적어도 안정된 상태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필요로 한다.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와 같은 인생의 비루한 평가가 아니라 자신이 이 삶을 얼마나 긍정하고 있는지 혹은 버텨내고 있는지와 같은 요인이 그러한 재회를 가능케 한다는 소리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회환에 젖어든 과거로 회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현상이겠지만, 그런 회환과 노래의 상관관계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 다만 그러한 감정으로의 접속이 가장 용이한 매체가 노래이기에 그것을 자주 응용하게 될 뿐이다. 어떠한 노래를 들으며 과거로 돌아간다고 주장하려면 그런 노래와 동시대를 살아가지 않은 이들이 동시대를 느끼게 되는 이유를 먼저 설명해야만 한다. 사진이나 동영상이 하나의 세계로 작동하며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목격자에게 목격담을 부여하는 환영의 논리를 따르는 반면에, 노래는 청자와 화자라는 동반자적 관계가 없다면 세상과 동반하지 못하므로 원래대로라면 그는 우리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왔어야만 했다. 허나 노래가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노래가 세상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주체가 아니라 이곳에서 검지를 들어 올리는 화자이다.


검지를 들어 노래 하나를 반복하기에는 손쉬운 시대가 되었지만 사실 이는 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콘텐츠다.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에 사용하는 지명의 행위가 허공으로 날아가 소리로 분해되고 나면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 비유하자면 공기 중에 소리를 녹여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이는 물이 흘러 바다로 가고 그게 다시 구름이 되어 비가 되어 내리듯이 노래가 요동하는 화자라는 점을 보여준다. 눈앞의 일렁임, 신기루 혹은 리듬, 노래 하나에 새긴 기록이 언어가 아닌 리듬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손쉽게 변형되고 이는 우리가 뮤지션을 테크니션이라 부를 만한 단서를 제공한다. 소위 말하는 기교는 물론이고 커버, 믹싱, 디제잉과 같은 요소는 음악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아닌, 우리가 그곳에 맡겨둔 감정의 흐름을 자유로이 방면하는 역할을 한다. 음악에서 느끼는 기구함이 우리 삶의 공백에 기가 막히게 들어맞지 않아도 우리는 그걸 모양대로 깎아내어 적용해버린다. 감정이 그리 쉽게 변형될 수 있다는 게 탐탁지 않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런 유동성이야말로 삶의 어떤 면모에도 되풀이(Reprise)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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