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 푸티지 지형도 그리기 : 반(反)물질적 혐오

by 수차미


이 글은 이전에 썼던 의 보론이다.


이전부터 영상이나 음원을 추출해 합성하는 문화는 많았다. 작게는 합성 사진부터 길게는 합성 영상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향유되는 건 다름 아닌 음원이다. 합성 사진은 UFO 같은 음모론, 합성 영상도 귀신 영상 같은 곳에 사용되긴 했지만, 이들을 문화라고 하기엔 너무 편협하고 저속한 게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낄낄(giggle)대는 수준에 그쳤었다. 그러나 인터넷 문화 2세대인 2000년대 초를 필두로 하여 본격적인 음원 문화가 대두되었다. 이는 인터넷 통신 속도와 관련 인프라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고작 사진 하나만으로도 수분을 소모하던 시대에서, 음악 한 개 정도는 여유 있게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UCC라는 동영상 문화에 음원 문화가 예견되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영상만 올리기는 심심하니 간단한 음악이라도 넣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로 이는, 음원을 먼저 만들고 그에 맞는 영상을 제작하는 쪽으로도 발전했다. 그러니까 음원을 합성하는 문화가 영상 문화가 되기도 했다는 점이 이 분야의 포인트가 아닐까 한다. 물론 그와는 반대로 영상에 덧입힐 음원을 고안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영상 자체를 변형해 음원으로 만들어버리는 방법론이 인기가 더 많았다.


국내에서 이 분야의 선두주자로는 디시인사이드의 합성필수요소 갤러리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인터넷 문화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사이트의 특성이기도 했지만, 합성이라는 분야에서 선이 없어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초상권, 저작권, 윤리 및 도덕적으로 문제시될 만한 부분이 아주 많은데, 그중에서 제일 심한 건 정치인 희화화였다. 고인을 모욕한다는 근본적인 비판점 말고도, 정치의 영역에서 패러디는 민감한 소재라는 점이 문제였다.


다행히도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정치적 담론으로 분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성향적 한계일 뿐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다. 그 이전 단계에서 낄낄대는 수준의 술집 유머와도 같았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개방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고려하면, 술집에서 할만한 사담을 공개적으로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정치 영역을 제하고 본다면 반다크홈이나 빌리 헤링턴과 같은 성적인 영역도 문제가 있었다. 동성애 혐오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음담패설에 가까운 것이기에 싫어할 만한 사람도 많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당시 인터넷 합성 문화는 성역 없는 혐오가 아닌 성역 없는 ‘선호’에 가까웠다. 이게 예전과 지금의 차이이다. 같은 소재라도 과거와 현재에 사용되는 용례가 다르다. 이는 과거 미화일 수도 있지만, 과거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분리해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2010년대 초 인터넷 문화의 2세대가 끝나갈 무렵 일간베스트가 등장했고, 인터넷 세상의 판세는 혐오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인터넷 합성 문화는 정치적 요소를 배격하기 시작했다. 정치를 혐오로 이용하는 이들이 많아짐으로써 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후로 합성 문화는 혐오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성역이 없어야 한다는 구호가 ‘비판’을 위한 것으로 오인되었다. 그게 혐오로 변질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결국 선 없고 철없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선 없고 철없는 아이들이 혐오 없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바라볼 때, 이게 단지 주류 문화와 다르기에 그런 낙인을 찍는 게 아닌지 생각해볼 여지가 새로이 생겨났다. 혐오를 지향하지 않는 이들이 만들어낸 게시물에 혐오를 주입하는 것은 푸티징 작업의 틈새로 보내는 주류 사회의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사용할 혐오의 정의는 정치적 층위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치적 층위에서 사용되는 혐오의 정의는 특정 의견에 대한 지지자를 하나로 응집하는 효과가 있다. 이때 푸티징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는 느슨한 빈틈이 아니라 자신을 밀어 넣을 구멍이 된다. 이들은 내면의 결여를 채울 공산이 아니라, 자신이 그곳의 결여를 채울 양분이 되고자 합일을 한다. 이 합일은 개인이 자의식을 갖고 세상과 연대한다기보다 군체의식이 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 군체는 우두머리에 의해 굴러가는 신정정치를 교리로 채택한다.


반면 우리의 맥락에서 혐오란 홉스적 의미를 기반으로 둔다. 이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하나의 화면에 조밀히 들어찬 푸티징은 군체의식이 아니라 에덴동산에 가깝다. 그곳에는 종과 출신이 다른 여러 동물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모두의 취향을 만족시킨다. 이곳에서 종 사이의 틈새란 서로를 밀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버무려짐을 위해 예비된 지대이다. 그러나 사자와 호랑이의 조합인 라이거(Riger)는 사자팬에게도 호랑이팬에게도 외면당할 수 있다. 둘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선택권을 상대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배격을 통해 작동하는 반(反)물질적 혐오로 부르고자 한다. 만인을 밀어냄으로써 만인에 가까워지는 푸티징 작업이다.


파운드 푸티징 작업에서 요구되는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프레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넣을 푸티징이다. 푸티징을 담은 프레임 또한 외화면으로부터 푸티징으로 지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파운드 푸티징의 범주는 매우 넓다. 이 점을 두고서 미장아빔(mise en abyme) 구조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반(反)인용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일반적으로 인용이 프레임 안에 다른 레퍼런스를 참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반(反)인용은 레퍼런스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사용하는 역전된 구조를 지닌다. 말하자면 언급된 것으로부터 나(I)는 탄생한다. 그렇기에 그는 언급을 필요로 하며, 나(I)는 언어의 주석으로만 성립한다.


파운드 푸티징은 세계로부터 지칭되는 이들이다. 이는 카메라가 포착한 중요한 것들, 순간의 함의와는 다른 것이며 또한 지칭을 통해 태어나는 문자의 마법이 아니다. 파운드 푸티징은 언칭이 아니라 언어의 주석이고, 원본 없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는 스펙타클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스펙타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용을 통해 레퍼런스를 탐색하고 그곳에서 다른 틈새를 발견한다는 점이다. 언급 없이 나(I)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나(I)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언급에 대한 탐사로 이어진다. 이것이 정치적 혐오와 다른 운동 양상이고 자신을 밀어내는 혐오의 에너지이다. 즉, 그곳의 스펙타클은 시야를 가리는 음침함이 아니라 오직 모자이크 상태에서만 관측되는 점묘화를 이룬다.


예시 하나를 들어보자. 한국의 1세대 인터넷 파운드 푸티징 문화라 할 수 있는 합성필수요소 갤러리의 작업은 인터넷 유머로 사용되던 짤방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주조하는 것이었다. 이 프레임 안에서 여러 짤방들은 처음부터 그러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이 합성 짤방을 볼 때, 각각의 푸티징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는 이것을 관측하지 못한다. 그에게 이 파운드 푸티징은 난도질 된 종이조각이나 다름없이 보인다. 하지만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푸티징 중 하나라도 아는 이에게, 이것은 모자이크 처리된 소묘처럼 보인다.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기에 자체적으로 파악되는 의미가 없지만, 오히려 이것이 푸티징들이 서로를 밀어냄으로써 발생하는 반(反)물질적 혐오의 연기로 파악되는 것이다.


반물질적이지 않다면 이 합성 짤방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합성 짤방의 유머 포인트는 서로 어우러질 수 없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짐에서 오는 미묘한 이질감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강아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 생겨나는 미소가 바로 반물질적 혐오이다. <무한도전>에서 어울릴 수 없는 사내들의 미묘한 화합을 보며 생겨나는 감정이 바로 반물질적 혐오이다. 이들은 별개의 푸티징으로 구성되면서도 멀리서 볼 때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렌차이즈로 파악된다. 그러나 <무한도전>이라는 이름만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확연히 느낄 수는 없다. 이는 오직 서로를 밀어내는 푸티징들의 반물질적 혐오를 통해서만 구성된다.


합성필수요소 갤러리가 분열을 겪고 쇠락한 후 유튜브가 신성으로 떠오른 것은 공교로운 일이다. 이전까지 푸티징 음원의 파생형으로 존재하던 푸티징 영상은 전자를 흡수하게 되었다. 이 모습은 무성영화에서 시작해 소리를 획득했던 영화와 다른 전철(前轍)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1세대 인터넷 파운드 푸티징 문화가 잘 만든 음원에 영상을 부여하는 후시녹화를 강조했다면, 한국의 2세대 인터넷 파운드 푸티징 문화는 영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음원이 내포된 동시녹화를 강조한다. 이것 또한 영화와는 다른 전철인데, 영화는 녹음기술의 열악함으로 인해 후시녹음으로 노선을 선회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파운드 푸티징 문화는 본격적으로 영화의 영역에 편입되기 시작한다. 유튜브 등지에서 활동하는 푸티징 제작자들이 제작하는 작품에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등장인물과 내러티브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여러 다른 영상 매체로부터 빌려온 클립들을 짜집은 것이기에 촬영된 영화와는 다르다. 예컨대 이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재연(Reenactment)의 영역에 든다. 재연이라는 점에서 리믹스와 콜라보와 같은 음악 작업과도, 콜라주와 브리콜라주라는 회화 작업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이들은 그 자신이 언칭되지 아니하고 언어의 주석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파생형이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다가 원본을 접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모자이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단순한 클립 하나만으로는 다양한 형태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늘 동료를 동반한다. 하나의 프렌차이즈 안에서 여러 다른 소스를 발굴해내는 작업은 프레임 안에서 푸티징을 끄집어 내오는 반물질적 혐오를 사용한다. 완강히 결합된 분자를 으깨어 반물질의 형태로 가져오는 게 이들의 작업이다. 이는 모자이크를 끝없이 헤집는 것과도 같아서 원자단위까지 응용이 가능하다. 가령 <야인시대>라는 프렌차이즈-프레임 안에서 최초로 발굴된 심영이라는 소스는, 심영을 연기한 배우 김영인을 필두로 김두한 역의 김영철의 다른 작품인 <궁예>를 끄집어왔다. 이는 단지 인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무대사의 군중이나 라디오 나레이션 등으로 확장되었다.


이들이 한데 어울려 어떤 구성을 이루어 낸다는 게 혼합(Mix)으로 관찰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핵에 물질이 달라붙는 응결(Condensation)로 보아야 옳다. 이 응결은 요소를 모아 구성하는 게 아니라, 구성물에서 요소를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기존의 합성과는 다르다. 기존의 합성이 프레임 안에 요인들을 들여놓게(Footaging)하는 것이라면, 이들은 반물질적 혐오를 통해 하나의 형태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응결의 논리를 따른다. 따라서 이는 종의 기원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보다 적극적인 프레이밍을 통해서만 파악된다. 이 합성을 사진이 아니라 유전자 가위로 보아도 좋다. 맥락을 잘라내어 전혀 다른 곳에서 생명을 얻는 인용이란 것은 세피로트의 나무가 아닌 리좀(rhizome)의 형태를 띤다.


그렇다면 인터넷 합성 문화가 흡수한 음원은 어디로 간 것일까? 영화로 본다면, 유성영화로 들어서며 사라진 영화의 사진적 가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인터넷 합성문화가 흡수한 음원에서 정치적 층위에 반대한 것들은 리믹스와 콜라보라는 순수한 형태로 재등장한다. 파운드 푸티지 실험 영화가 벽 위에 붙여 놓은 사진 더미와 흐릿해진 암실의 인화를 묘사했다면, 인터넷 합성 음원은 인용과 슬라이더의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 합성 음원은 기본적으로 분해와 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영화에서의 편집에 대응하는 요인을 갖는데, 리듬의 교합을 중시하기에 때때로 분절을 요하는 영화와는 차이를 갖는다. 예컨대 합성 음원은 낯설게 하기(Verfremdungseffekt)나 익숙한 낯섦(Uncanny)와는 달리, 낯설고도 익숙한 무언가를 목표로 한다.


낯설고도 익숙한 것은 푸티징이 목표하는 바이다. 익숙한 것들을 잘라내어 클립의 형태로 만든 후, 그것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응집하는 것이 바로 응결이다. 이들은 한데 모이지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배제되는 것이 목표이다. 청과물 상점의 청과들처럼 독자들에게 선택되어 괴리되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은 낯선 응결체에서 자신이 익숙하게 알던 것을 찾아내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 처음 볼 땐 낯설지만 보면 볼수록 이것이 인용의 역사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인용문은 본질이 인용인 것이 아니다. 인용을 제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세우스의 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곳의 핵심은 응결의 핵에 있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의지가 그곳에 작용한다.


처음으로 들었을 때 낯설게 들리는 것들은 이윽고 익숙함으로 손을 뻗친다. 리믹스와 콜라보된 음원을 들으며 우리는 어떤 것이 인용되었는지 알아본다. 그곳에서 레퍼런스를 발견하고 어떤 틈새가 있었는지를 직접 확인하게 된다. 이 틈새는 단청의 무나사 조립처럼 결합 없이도 들어맞는다. 마치, 응결처럼 말이다. 어떤 면에서 이는, 인위적으로 직조한다기보다 음원의 틈새가 잘 부합하는지를 확인하는 접목처럼 보이기도 한다. 접목은 낯설게 보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기술이다. 라이거와 같은 혼성동물이 자연교배를 통해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이종교배이며, 인용을 배격시켜 서로를 잘 부각하도록 돕는 반물질적 혐오인 것이다.


사진에서 음원으로 갈 때 사진은 목소리를 얻는다. 음원에서 영상으로 갈 때 그는 자신의 육체를 조립한다. 이 영상에서 합성 음원이 도출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론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목소리와 육체의 관계는 영화가 이미 던져보았던 고민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목소리를 채득함으로써 얻은 고민은, 찰리 채플린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사진적 가치(indexicality)가 상실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를 반대로 본다면 사진적 가치에 대한 상실은 인용의 접점에 대한 배격 행위와 궤를 같이 한다. 우리가 발견한 틈새는 닻을 걸 만한 안정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미끄러짐이 화면에 대한 음성의 반물질적 혐오를 끌어낸다.


오시이 마모루는 <공각기동대>(1995)에서 미끄러지는 음원을 통해 말했다. “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것은… (…) 나라는 존재를 규약하는 것…” 이 목소리는 앞뒤 맥락 없이, 지표성 없이 떠도는 음원으로 프레임 안으로 흘러온다. 여기서 사진적 가치의 상실은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의 신체에 대한 근본적인 지적이기도 하지만, 존재가 인용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음에 대한 제시인 것이다. 음원이 영상으로 향하며 조립하고자 하는 육체는 혼합이 아니라 응결의 원리를 따른다. 이는 네트워크에서 자아를 얻었다는 인형사가 단순한 인간의 모방이거나 재현이 아닌, 재연하는 존재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모자이크 처리된 네트워크상에서 거시적으로만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점묘화이다. 그래서 그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공안들은 이 아름다운 프레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체는 프레임이다. <공각기동대>의 오프닝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은 사이버 바디에 피부가 달라붙는 응결의 이미지이다. 이곳의 액체는 지표성의 상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반물질적 혐오를 상징한다. 자신이 원치 않음에도 들러붙지만 바로 그렇기에 삶의 필연성을 의미하는 것. 영화가 잃어버린 시간성. 핀 없는 사진더미. 김병규의 용어를 빌려 우회하자면 ‘액체적’ 신체의 종말은 시네마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꽉 들어찬 액체가 지표성이 없다는 점에서: 흐르는 음원의 정착되지 않는, 낯설고도 익숙한 푸티징 작업을 목표로 할 수 있다면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는 신체=프레임이라는 공식에 대해 목소리=음원이라는 공식을 더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다음에는 필시 영상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신체는 사진이며, 사진에 음원을 덧입힌 게 영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곳에는 정치적 층위로 도망간 사진과 그에 반대했던 음원이 호명된다. 정치적 층위로 도망간 사진은 음원을 멈추고 멍하니 응시함으로써 세상에 다가서려 했던 다이렉트 시네마가 되었다. 이들의 최대 실책은 닿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정치성을 획득하려 했다는 점이다. 관객과 현장의 분리,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혹시 무책임은 아닐까? 그들은 현실을 최대한 들여다보려 했다고 항변하지만,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2000)에서 반다가 하는 기침만큼이나 덧없는 틈새이다.


정치에 반대했던 음원은 리믹스와 콜라보라는 맥락으로 콜라주와 브리콜라주의 형태로 영화에 등장한다. 둘 사이에는 반물질적 혐오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숱한 인용의 모음이 아니라 그런 인용에 대한 투쟁이라고. 버무려짐을 위해 예비된 지대에서 그들은 하나둘씩 사진을 판넬에 꽂는다.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2019)이 의도하는 바는 그런 것이다. 온갖 인용화(畵)를 영화 안으로 끌고 오는 이유는 그 자신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없다는 점에 자신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여기서 물음 하나,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서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에서 말했듯이, 프레임 안으로 들이닥치는 액체들에 부여해야 할 성질은 파괴의 화신도 생명의 정수도 아닌 들러붙음의 정수이다.


응결은 (Condensation) 포화 (Concentration)와 그 의미적 맥락이 같다. 들러붙는 것이 곧 탄탄한 밀도이다. 그렇기에 <지구 최후의 밤>은 공허하고 엉성한 무인지대를 건너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무엇보다 빽빽한 액체적 신체의 세계이다. 아마도 뤄홍우는 이 무인지대를 걸으며 끊임없이 물어야만 했을 것이다. 영화가 영화이게 하는 것은 단순한 재현의 성질에만 불과하지 않는다. 따라서 뤄홍우의 아내는 재연되었다. 뤄홍우가 자신의 아내와 동일한 형상을 한 여인을 보며 낯선 익숙함을 느낀 건 그 때문이다. 뤄홍우가 찾아낸 아내의 모습은 자신이 알던 것으로부터 인용한 것이 아닌, 반물질적 혐오에 의해 미끄러져 온 것들의 응결체이다.


그는 아내의 형상을 두고 어떤 요소의 응결체인지를 확인하려 든다. 이 확인 작업은 뤄홍우의 삶이 아니라 영화 프레임 안에서 추출된 요인들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 영화에 1부가 있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2부가 영화 안으로 진입한다는 점에서 미장아빔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비간은 뤄홍우를 파운드 푸티징 작가로 만들고자 했다고 보아야 한다. 예컨대 그는 합성 짤방이나 합성 음원을 만들어내는 이에 해당한다. 이 부분은 비간이 존경해 마지않는 이들에 대한 인용을 통해 우리에게 암시된다. 이 암시는 멀리서 모자이크 상태로 보았을 때 비간의 것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뤄홍우라는 작가를 예비하고 있다. 반대로 보자면, 뤄홍우는 모자이크 된 존재이며 결코 완성될 수 없다. 그것은 점묘화라는 거짓상의 기법이기 때문이다.


지구 최후의 밤6.png <지구 최후의 밤>의 마지막 장면은 이것이 브리콜라주임을 자체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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