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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9. 2024

가져갈 것이 없다면, 받아들일 것도 없다


영화를 도둑질하는 이는, 문화계의 ‘게이트키핑’을 운운하며 “자신은 영화를 자유롭게 풀어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런 영화를 널리 퍼트려서 사람들 사이에 기억되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 정말로 ‘기억’되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기억되는 방법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다.” 어쩌면 영화는 아무도 볼 수 없어야만 비로소 전설로 남을지도 모른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 내용이나 전개를 평가받는 일보다, 소문처럼 떠돌며 와전되는 일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기억’에 더 가깝다. 이를 위해 영화는 유실되어야만 하며, 그 자신의 몸체를 끊임없이 주변부로 대체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끝내 영화는 자기를 초월하게 될 것이다. 마치 몸의 가장자리부터 점차 신체를 대체해가는 ‘기술’처럼, 영화가 우리 기억의 중심에 자리 잡으려면 본격적으로 자기를 주변부로 대체해야 한다. 


한국영화의 유실된 작품 중 하나인 <의리적 구토>는 당대의 신문이나 주변인의 증언을 통해서만 언급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 유실된 필름은 안에 내포한 것(Content)이 아니라 주변부(Context)를 통해 구성되고 있다. 이미 원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논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을 주변부로 구성하는 일은 밈의 전파 사례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고정된 기억은 한순간의 실수로 유실될 수 있지만, 복잡하게 얽힌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기억은, 자신을 구성하는 몇몇 외부가 무너질 때 곧바로 다른 외부를 가져와 채울 것이다. 고정된 기억이 원본을 초과해서 존재할 수 없다면, 형체가 무너진 기억은 반대로 그런 형상 자체를 기억으로 만든다. 그래서 내부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구성되는 기억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삶으로 바꿀 수 있다. 


도둑과 영화의 공통점은 바로 이렇게 가장자리에 선다는 점이다. 영화도둑은 자신들의 행위가 명백한 위법임을 잘 알지만, 어떤 면에서는 영화 보존이라는 당위가 있다고 말하며 이와 같은 행위를 정당화한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주장의 정합성이 아니라, 영화 도둑의 행동은 ‘가장자리’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말해보고 싶다. 도둑은 밀수가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행위가 됨을 염두에 두는데, 그는 영화를 보는 것보다 자신이 영화를 전파한 덕분에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여러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행복을 찾는다. 바꾸어 말하면, 이 밀수란 건 자기를 외부에서 내부로 들여오는 일과도 같아서 ‘밀수’를 멈추면 더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영화 도둑은 그런 점에서 자신이 밀수하는 대상과 닮았다. 영화를 보존하는 일이 주변부를 수입하는 것이듯, 자기를 보존하는 일은 주변부의 반응을 수집하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반대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도둑은 영화의 모습조차 도둑질했다고 말이다. 영화에 자막을 만들거나 밀수를 하는 행위가 전적으로 자기를 위할 뿐이라는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닮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도둑은 영화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고 싶어한다. 즉, 밀수의 주변부는 영화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에 수혜를 받는 입장이 된다. 이를 따라 우리는 주변부를 자기로 들여오려는 시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을 이해하게 된다. ‘자기’는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사랑스러운 주변부를 들여오기에 이를 종합한 ‘자기’ 또한 사랑스럽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기억에 관한 견해는 이 대목에서 갈리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면, 자신을 확신하는 것보다는 주변에 자신을 되묻는 일이 더 유효할 테니 말이다. 


누군가는 원본을 고집하면서 이를 있는 그대로 기억해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본다. 반면 누군가는 이름을 갖고서 의지를 이어가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억이라고 본다. 이 두 가지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후자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데, 왜냐하면 영화가 수집을 위한 게 되어버릴 때 영화는 살아 숨 쉬지 않는 ‘박제’가 되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영화는 정말로 ‘기억’되고 있을까? 이 논점에 밀수된 또 하나의 관점이 바로 ‘보존’이다. 아키비스트는 필름을 보존해야만 비로소 역사가 이어지고, 또한 이를 토대로 다른 작품에 대한 재발굴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근거로 아키비스트는, 영화가 시간의 예술임에도 시간을 빗겨가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박물관이라는 장소가 수집품의 ‘역사’를 지우기 때문에 무색무취에 가깝게 된다고 말했다. 이 경우, 도둑은 아무런 역사도 지니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하나의 원본이 아니라 주변인들에 의해 구성되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한 가지 이미지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존재에 대한 불안 때문에 주위 사람에게 자신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동시에, 죽음으로 향하는 체험은 우리 자신이 지금 여기에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익스트림 스포츠처럼 자기를 삶의 가장자리에 내모는 일은, 주위 환경을 받아들이기에 최적화된 ‘경계’로 나아가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도둑이 밀수를 위해 검은 벽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일은, 범법자를 자처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죽음에 가까워지려는 시도이다. 도둑이 영화를 밀수하는 일은 그 영화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서다. 도둑은 죽음에 자신을 투구함으로써 그와 같은 환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도둑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백지상태로 돌입하기 위해 자기를 ‘박제’하고 싶어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떻게 죽느냐’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름을 만든다고 볼 때 그와 같은 ‘기억’은 되려 자신을 더는 죽을 수 없게끔 바이럴하는 일에 그 목적이 있다. 사실 기억이라는 말부터 애초에 서서히 망각에 가까워짐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와전이야말로 계속해서 소문이 덧대어지고 부풀려진다는 점에서 ‘망각’에 반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퍼트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은 토렌트와 영화 사이를 연결하는 중대한 연결고리다. 가령 아즈마 히로키는 『약한 연결』에서 표면을 허우적대는 것만으로도, 이미지의 사이로 미끄러지는 것만으로도 얻어낼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세상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니 ‘언어’이외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을 반박한다. 도둑이 영화를 찾아다니는 일에도 그와 같은 가치가 있다. 꼭 영화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표면’이 곧 기억을 대변한다. 


언젠가 세상이 영화가 된다면, 영화의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뜻에서 영화를 밀수하는 일은 보존이 아니라 기억에 의거해야만 한다. 기본적으로 영화와 인간 사이에는 ‘점점 더 사라지고야 마는’ 일에 대한 경계가 공통 심리로 자리한다. 사람은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자신이 사라지는 것만 같다고 여겨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탐험하려 하고, 배우려 하고, 만지려 하고, 감정을 투사하려 든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기’란 어떠한 존재가 아니라 맹점이 되고야 만다. 주변을 탐사해서도 결코 파악되지 않는 사각지대가 바로 자기를 가리키는 곳이 된다. 다시 말해서 결코 파악되지 않는 ‘영화’를 찾아가는 여정은, 바로 그곳이 ‘자기’를 가리키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 도둑에게 밀수는 그런 의미이다. 그게 정말로 있든 없든 간에, 검은 벽을 마주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스스로에 준다. 


아키비스트는 영화가 시간에서 빗겨나야만 비로소 ‘기억하기’를 멈출 수 있다고 믿는다. 아키비스트는 우리가 기억을 멈출 때 비로소 보존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인간의 기억이 ‘서서히 사라진다’고 보기 때문으로, 과거에서든 미래에서든 우리가 보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면 영화가 항상 우리를 앞서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영화를 보는 동안은, 우리가 가장자리에 내몰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우리는 스크린 너머로 나아갈 수 없지만, 그러니까 영화에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시선이 닿는 표면, 이 주변부가 우리의 기억을 대신한다. 따라서 영화가 어떠한 죽음에 빗대어진다면, 영화는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면서 또한 밈이기도 하다. 어떤 이가 자신을 두고서 여러 영화에 빗댈 때, 그렇게 파생된 인생영화가 자신을 대변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닌 셈이다.  


밈은 기억의 영역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영화가 밈의 일종이라고 믿는다. 영화가 몇몇 강렬한 순간만으로 구성된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보존’에서 멀어지는데,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래전에 보았던 몇몇 영화 장면을 ‘틀리게’ 인용하듯이 ‘기억’은 주변부로 퍼질 때 점점 형체를 잃는다. 하지만 하스미가 이에 덧붙이듯, 세부적인 인용이 틀렸다 한들 대화의 요지는 별반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에게는 ‘던진다’라는 삶의 투구행위가 더 중점이 된다. 하스미는 ‘선다’와 마찬가지로 ‘던진다’라는 행위 자체가 분열하는 여러 이미지와 숏이 영화의 의미와 감상을 더 풍부하게 한다고 믿었다. 이런 의미에서 토렌트의 피어교환은, 영화가 그 자체로 여러 이미지와 숏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아마 사람도 그렇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보여줄 만한 여러 이미지와 숏이 있으니 말이다.  


움베르또 R.마뚜라나는 『살아있음의 실현』에서 “기능의 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개개의 연결성이 아니라 부류를 정의하는 조직”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점은 영화의 기능을 두고서 ‘기억’의 외피를 빌려올 때는 사람 사이의 연결보다 무엇이 ‘자기’인지를 정의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미학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없애고자 ‘추함’을 행하려 들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가 되려면 먼저 자기를 없애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거기에 있다고 믿으려면 먼저 영화가 없어야만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기보다 자신이 기억되는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한다고, 차라리 영화는 99퍼센트 언저리에서 피어교환이 끊겨서 재생될 수 없는 조각난 토렌트 파일이 되어야만 한다. 늘어질 대로 늘어져 귀신소리를 자아내는 비디오테이프처럼, 차라리 영화는 유령이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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