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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3. 2024

돌아가지 않기 위해 돌아가기


게임에서 우리가 논해볼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오픈월드다. 슈퍼마리오 같은 플랫포머 게임을 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으면 아무런 것도 진행되지 않아,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기정사실로 되어 있다. 반면 온라인 RPG나 오픈월드 게임 등에서는 캐릭터 육성단계를 자기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게이머는 레벨에 따라 주어지는 메인 퀘스트를 따라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유저와의 상호소통이나 서브 퀘스트 수행에 중점을 둘 수도 있다. 게임이 제안하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노전직 플레이나 노템 플레이 같은 비전형적인 일을 할 수도 있고, 아예 스피드런이나 에디팅 등을 통해 게임의 성격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점은 게임의 정의가 “합의된 규칙을 두고 실력을 겨루는 행위”라는 점에서, 규칙 자체가 하나의 전복 시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규칙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고나 할까. 아니, 규칙은 행위 기준일뿐 한계점이 아니라고 보는 게 좋겠다. 


실제로 게이머의 플레이 유형에 관한 설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질문이 있다. “당신은 게임을 할 때,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는 선에서 모두 성장을 한 후 다음 단계를 진행합니까?” 가령 스토리를 따라가는 게임에서 이야기를 따라 아이템을 파밍하기보다 아예 최고급 스펙을 마련하고서 끝판왕에 도전하는 경우가 있다. 꽤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떤 면에서는 취업을 위해 졸업유예 등을 선택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삶의 동선 안에서, 끝판왕에 해당하는 콘텐츠를 수월하게 플레이하고자 더 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자한다. 맨땅에 헤딩하면서 보스전에 돌입하는 것보다는 공략을 보며 스펙을 올리는 일이 더 낫다고 여긴다. 기본적으로 이는 게임의 불사 속성에 귀인하는 공산이 크다. 게임에서는 얼마든지 다시 도전하며 플레이 노하우를 쌓을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한번 실패하면 뒤로 후퇴해버리며 심지어는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마치 플랫포머 게임인 것 마냥 태초마을로 돌아가 버리는 이 현상은 오늘날 세분된 게임 장르가 현실에서는 단일 속성이거나 혹은 복합적인 양상을 띤다는 점을 보여준다. 플랫포머 게임에서는 추락의 형상, RPG 게임에서는 성장이 주된 목표가 된다면 현실은 복합장르의 게임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원초자아처럼 우리에게 현실은 모든 게임의 원형이다. 


우리가 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추락의 행위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만약 실패의 감정을 미리 경험한다면, 이와 같은 일은 추후 겪을 수 있을 추락에 하나의 예방주사가 되어주지는 않을까. 영화가 실패의 감정을 예비한다고 줄곧 주장해왔던 입장에서 영화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역할이 있다. 첫 번째는 추락에 대한 방지망이다. 스크린은 “거울 속 세계는 없다”는 이념 아래 자신에 내부 공간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 현실의 것이며, 문을 열고 들어가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문은 항상 우리 방향으로 열려있는 셈이다. 두 번째는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위로 올라가며 삶의 다음 단계를 향할 때, 영화는 단계에 따른 층계의 상승부하를 대신 받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추락을 대신하면서 경험만을 갖고 가도록 해준다. 말하자면 영화는 우리를 대신해 죽음을 마주한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순교자다. 영화는 우리가 삶을 사는 과정에서 나락에 떨어지지 않게끔 방지망이 되어준다. 그렇다면 영화를 공부한다는 건 결국 나락을 공부하는 것과도 같다. 심연을 마주하는 사람이 심연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면, 실패를 마주하는 사람은 실패를 삼키며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는 영화가 현실을 하나의 게임처럼 만들고 있어서다. 우선 영화와 게임의 차이는 간명하다. 게임이 항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영화는 항상 처음부터 끝까지를 반복하게 된다는 점이다. 게임은 계속해서 위로 상승하는 일에 중점을 두지만, 영화는 어떠한 성공을 추구하기보다 우리의 현실과 다른 것을 지적하게끔 한다. 즉 영화엔 ‘바깥’이란 게 존재한다. 게임의 세계는 게이머가 이곳을 직접 살아가는 것처럼 여기게끔 하지만 영화는 사람들이 돌아가야 할 세계를 직시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여기서 <존오인>의 야간 투시 장면을 떠올리면 우리는 영화 속 세계가 양분할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내부’고 다른 하나는 ‘바깥’이다. 영화는 울타리를 경계로 안과 밖을 나누는데 아우슈비츠 내부를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등, ‘바깥’은 마치 게임에서 우리가 갈 수 없는 ‘전장의 안개’처럼 묘사된다. 말하자면 <존오인>의 ‘바깥’은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다. 게임 안에서는 얼마든지 반복과 도전이 가능하니 실패가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는 내내 안전함에 머물러 있고 이런 와중에 야간 투시 장면은 한 편의 외도처럼 보인다. 나치의 현실이 지배하는 이곳에서 야간 투시 장면은 [8번 출구] 같은 이상현상이다. 


[8번 출구]는 리미널 스페이스 괴담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첫 번째로, 게이머는 같은 장소가 반복되는 지하철 역사 통로 안에서 무엇이 처음과 다른지를 관찰한다. 이후 이상현상을 마주하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뒤로 돌아가야만 한다. 숫자는 성공에 이를수록 하나씩 증가해, 0에서 8을 달성하여 출구로 나가는 게 게임의 목표다. <존오인>에서 야간투시 장면은 나에게 그렇게 보인다. 여태까지 보아왔던 세계가 반복 중인 내부임을 알게 된 이상, 우리가 영화의 결말에 도달하는 방식은 반복의 ‘바깥’에서 이상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이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은 담장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되려 뒤로 후퇴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행적은 영화의 결말에 지하실 장면으로 이어진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교차하는 현실의 아우슈비츠는 영화가 보여주지 않던 내부를 시공의 경계를 뛰어넘어 보여준다. 확실히 구분되어야 할 사실은 현실의 아우슈비츠와 영화의 아우슈비츠가 이 장면에서 별다른 경계 없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둘 중 무엇이 현실의 아우슈비츠 포지션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전자는 아우슈비츠라는 사건이 간접적으로 묘사되지만 결국에는 보여주지 않았고, 후자는 어떠한 학살의 징후와 흔적을 보여주지만 그게 아우슈비츠라고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표지는 없다. 결국 이 둘은 오직 관객의 현실 안에서만 존재하는 무언가다. 


<존오인>은 영화 내에서 보여지는 안팎의 구분에서 둘 중 어디에서 아우슈비츠를 소속되지 않게 함으로써 이를 관객의 현실로 사출한다. 그쪽에서 보면 탈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현상을 발견하면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는 간명한 법칙은 게임을 두고서 상승을 목표에 두면서도 동시에 현실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게끔 한다. 꽤 영리한 발상이고, 그런 점에서는 게임과 영화의 교집합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존오인>은 아우슈비츠를 영화 안에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우슈비츠를 이해 불가능하거나 파악 불가능한 영역으로만 남겨둔다는 한계를 여전히 간직한다. 마치 비밀유지각서를 쓴 것처럼, 관객이 영화 안에서 본 것들은 영화 안에만 남겨두면서 다시금 현실로 귀환해야만 한다. 물론 한 회사에서 퇴직할 때만큼이나 회사에서 지급 받은 물건을 반납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만 한 편의 영화가 무언가를 끝내지도 못하고, 끝날 수도 없다고 말하는 일은 영화를 너무 투명하게 만들어버린다. 아마도 사람들의 반응은 여기서 둘로 갈릴 듯하다. 영화의 투명함이 표면에 반사되어 오는 우리의 얼굴을 성찰하게 한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영화가 의미작용 없이 관객을 뱉어낸다면 애초에 그건 스크린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이니 영화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게임의 속성이 졸업이라면 영화의 속성은 탈출이다. 


게임이 무언가가 끝난다는 의식이라면 영화는 무언가를 끝낸다는 의식이 강해서 영화를 보는 일은 하나의 과업을 ‘끝마치는’ 일과도 같다. 가령 과거에 소위 이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장르의 매체에서는 최종 보스를 물리치고서 현실에 돌아오는 일이 메인 플롯이었다. <오즈의 마법사>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영웅의 플롯에서는 과업을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신화의 주류 사항이었다. 하지만 게임 매체에 대한 이해가 본격화된 오늘날 이세계로 떠난 이들은 집으로 돌아오기보다 성공을 추구하는 일이 더 잦다. 현실로 돌아가 봐야 연인이나 친구도 없고, 부모와의 관계도 소원하니 그냥 이세계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일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현실을 져버렸다고 비판받기 십상이지만 애초에 게임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에게 현실은 ‘전 단계’에 불과하다.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은 한 세계의 끝에서 다른 세계의 시작점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게임에서 추락은 바닥과 동의어가 아니며, 오히려 추락은 운동성과 행위 자체로만 평가된다는 점에서 현실의 불순물에서 자유롭다.  마찬가지로 <존오인>은 운동성과 행위 자체로만 평가된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자유롭지만, 반대로 모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영화와 관객 간에 상관관계를 세울 수가 없다는 한계점이 자리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존오인>에서 물어야 할 것은 게임의 규칙이다. 


여태까지 나는 큰 그림을 그리며 살아왔다. 삶의 단계 안에서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두지는 않았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이상주의자는 자신이 원하는 목표가 있지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수단이나 방법 등은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일의 경과나 진행을 상세하게 정해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이상주의자는 비현실을 두고서 언젠가는 현실이 될 것이라고 여기기에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건을 일으킨다. 비현실이란 아직 현실이 아닐 뿐이라고 여기기에, 그게 현실이 될 날을 앞당기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긴다. 어떤 면에서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딘가에 올라서는 일보다는 다시 올라가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 이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혁명가의 주된 역할은 천장을 깨부수는 게 아니라 천장을 모두가 닿을 수 있는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렇게 보면 한 아이디어가 다른 이에게서 생각의 변형을 일으키게끔 목표하는 내 글쓰기 방식은 혁명가의 모습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특정한 방식이나 생각을 지지하기보다는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한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 형태는 달라도 본질은 같은 의견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최근에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삶의 이력이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글을 연재했던 이력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특정한 방향성을 따라 글을 썼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정한 주제의식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주면서 이와 같은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관철하는 일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 같다. 가령 작은 행동에서 큰마음을 돌려받듯, 우리에게 중요한 건 누군가를 바꾸는 힘이 아니라 운동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계기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빼어난 성능이나 기준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방향을 바꾸기에 충분한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한데 모으면 마치 핀볼처럼 재미있는 한 판 게임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행적을 스스로 부인하거나, 포기해버리고 싶지는 않다. 단지 여태까지 해온 게 아깝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삶을 요약해 제안하는 일이 그 사람의 살아온 시간 전부를 대변하지 않음을 나는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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