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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1. 2024

외면하고 싶은 것들의 보따리



<인사이드 아웃 2>의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우리는 너희의 모든 순간을 사랑한단다.” 정도가 아닐까 한다. 영화는 자신에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모든 순간이 바로 자기를 이룬다고 말한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라는 게 아니라, 한 개인을 딱 잘라 구분하는 일은 불가하다는 뜻이다. 가령 우리는 자신을 두고서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구분하려 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일에서는 “자신의 강점이나 단점을 말해보라”는 질문을 듣곤 한다. 보고 들은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점이 좋았거나 나빴는지를 진술하는 과정은 자아를 점점 더 분열시킨다. 좋았던 이유와 싫은 이유는 서로 정확하게 반대되지는 않는다. 무언가에 대한 선호는 반대로 무언가 대한 혐오와 같지 않으며, 이를 따라 ‘취향’을 진술하는 과정에서 ‘자기’는 점점 분열된다. 선호 대상과 혐오 대상은 하나를 두고 갈라서는 둘이 아니라 처음부터 객체로 존재했던 둘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취향을 내세우는 일은 오히려 자신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취향’이란 결국 자기를 등지는 일일 수밖에 없다. 취향은 어떤 것들의 사이에서 드러나는 개념이기보다, 객관적으로 지향되는 대상에 더 가깝다. 취향은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무언가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 갈라서는 힘이다. 그렇다면, 취향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일은 화합이 아니라 질서의 가치에 더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따금 영화를 보면서 생각하는 건, 영화가 마치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것들의 보따리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인사이드 아웃 2>에서 기쁨이는 자신의 주도하에 ‘괴이하다’고 여겨지는 기억을 선별해 잠재영역으로 넘겨버리고는 하는데, 이 잠재의식 영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일종의 ‘자아찾기’로 여겨지는 걸 떠올려보자. 기쁨이는 라일리의 삶을 편집하려 들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편집증이 되고야 만다. 갈라서는 것들에 사로잡힌 라일리는, 자신이 떠나보내야 할 모든 것을 경계하면서 삶의 가장자리에 내몰린다. 이제 라일리는 중심을 되찾아야 한다. 기쁨이가 택한 건 라일리의 자아를 ‘복구’하는 게 아니라 모든 과거와 이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갈라졌던 게 다시 하나가 되는 일이 영화상에 보여진다.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는 이 여정은 끝내 본래의 자신으로 여겨졌던 무엇이 아니라, 외면했던 순간들을 포함한 모두를 접붙인다.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라일리에게 영화는 이 순간이 영원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언젠가 끝나야만 하는 순간에 대한 ‘불안’이었다. 우리의 삶에서 이 감정은 다시금 일상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부서진다’. 마치 기쁨이가 의식의 저편으로 온갖 기억을 편집하듯, 자신이 불안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영화는 우리가 외면했던 것, 외면하고 싶은 것을 담아놓은 소쿠리처럼 우리의 불안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매끄럽게 편집되기만 한, 완벽으로 점철된 표면이 아니다. 흔히 카메라는 포착과 함께 확정된 결론에서 우리를 반향한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와 같은 정립은 영화를 두고서 자신에 대해 묻는 관객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여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적 의미의 사진가는 확정된 과제를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진 촬영을 통해 이 모든 장르를 재정립하는 일은 그 스스로를 아마추어 사진가의 작업 방식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처럼 영화는 우리의 취향을 ‘발견’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자기와 이별하고, 한순간을 끝내야만 하는 장소이다. 영화는 우리의 삶이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한 세계로 회귀하게 될 것임을 말해주는 ‘단서’가 된다. 어떤 면에서 영화가 삶의 균열이나 틈새로 여겨지는 것은, 그 안에 세계의 이면이 담겨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비천한지를 비로소 목격하게 한다는 점에서다. 영화의 기능이 자신의 취향을 찾게 해주는 것이라면, 취향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이 힘은 영화를 보는 일이 무언가와 갈라서는 일임을 말해준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과거와 이별하거나 혹은 자신이 마주해야 할 다른 면을 보기도 한다. 잠깐의 모험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여주면서 그와 동시에 한 명의 관객으로서 ‘신체’의 지위를 강조한다. 들뢰즈의 말마따나 영화를 “믿는다는 것은 오직 그리고 단순하게 신체를 믿는다는 것”이다. 


이여로는 “정체성이나 존재 자체가 확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번은 자신이 아닌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는 사실, 내가 나 이외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가에 관한 구상과 관계성 속에서만 ‘나’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지속적인 재규정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진술하면서 무언가를 규정하는 일은 곧 이별하는 행위의 반복적인 수행임을 염두에 둔다. 쉽게 말해 취향은 우리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판단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바로 여기에서부터 구축할 방법을 제시하는 개념”으로써 간극에서 바깥을 소유하는 방법론의 일종이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바로 슬픔과 실패이며, 이와 같은 균열의 감각은 시간의 분기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언가 시작된다는 감각을 전한다. 영화가 항상 우리를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그 분해와 조립에서 슬픔과 실패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한 취향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예외적으로 보이는지를 선택하는 일이 동반된다. 그건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일 수도 있지만, 영화라는 타자를 거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관계성은 오늘날 영화가 아마추어리즘의 일종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바꾸어 말해 영화가 삶의 대피소와 같은 역할이라면, 아마추어리즘 또한 산발적으로 등장해서 끝내 프로리그로 귀결되는 거대한 삶의 흐름 안에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영화는 모두에게 같은 꿈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실과의 접속을 끊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우리의 삶이나 현실이 아니라, 그 삶과 현실을 다루는 우리 자신의 방식과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구조에 대해 말한다. 평소라면 현실을 부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영화는 현실에 균열을 내고 사람들 사이에 간극을 두면서 흠결무고한 이미지의 결론에서 우리가 빠져나올 단서를 제공한다. 결국 자신에서 무언가를 끊어내는 일이 힘겨운 것은, 단순한 의지의 문제이기 전에 감각을 어떻게 재분배할 것인지와 같은 맥락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는 것은 불꽃놀이를 하는 것과도 같다. 축제가 끝나고, 파티가 끝나고 나면 모든 감각에서 분리되어 나와 싸늘한 공기와 쓰레기의 푸르스름한 잔해만이 남는다. 뜨거운 열기가 식고, 차가운 밤 공기가 감각을 재정렬하면 우리는 어느샌가 서로 다른 장면에 속해있음을 알게 된다. 불꽃놀이는 매 순간 흩어지는 것과 쏘아 올리는 일을 반복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드러나는 건 모든 것이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뿐이다. 이처럼 영화를 두고서 현실에서 인식되지 않던 것을 수면에 올리는 역할이 있다고 보면, 영화를 보며 호불호를 판가름하는 일은 우리가 외면해왔던 것에 대한 판결일 테다. 삶은 항상 우리를 중심에 두지만 영화 안에서 신체는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이미지의 표면 위에 내쳐진다. 이 안에서 중단되지 않는 사고는 우리 자신을 신체의 바깥으로 내몬다. 즉, 신체는 포착이다. 


영화와 우리의 공통점은 최전선에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하나의 사고가 언어로 정돈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결론에, 표면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우리에게 언어가 되기 위해 어떤 결론으로 사유될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 안에서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이나 과정, 연결고리는 생각에서 배제된다. 마치 처음부터 그게 자신의 취향인 것 마냥 우리는 자신이 외면했던 그것들을 가리키면서 ‘배제’하는 일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배제를 통해서만 우리가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면, 취향은 우리의 외부에서 내부로 경유하는 우회로일 뿐 자신에 직접 연결되는 전원선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는 우리가 무언가를 끌어안거나 담기 위한 소쿠리가 아니라 정반대의 것들을 담는다. 유동하는 액체 성분은 쉽게 투과하지만, 조금이라도 결정화하면 통과하지 못하는 패턴으로 구성된 이 소쿠리는 그야말로 취향의 거름망이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이 화합이라면 영화는 질서에 해당한다. 일상은 자기만이 아는 패턴으로 정돈된 방처럼 남들 눈에는 불규칙하거나 난잡한 구조가 개인의 삶 안에서 하나로 인식되는 일을 가리킨다. 이 점에서 영화가 일상의 ‘바깥’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이상하리만치 ‘질서’정연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른바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다. 그렇기에 취향을 드러내는 일은 단순히 편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더 큰 꿈으로 나아가기 위한 깨어남의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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