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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08. 2024

자리에서 그리고 한 사건으로


정서적 민감도에 관해 말하자면, 상처받기 쉬운 타입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타인에 공감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정서가 낳는 풍경들에 익숙하다고는 볼 수 있다. 이미 나이를 먹어버려서 고치기 어려워졌지만 도리어 글을 쓰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이를 유지하는 편이 더 낫다고 본다. 한강의 작품이 외롭고 고독한 건 한강 작가가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가 있고, 자신의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정서적인 감염이라고나 할까. 사적으로 생각하는 나는 정서적으로 오염되기 쉽지만, 반대로 타인을 오염시키기도 쉬운 사람이다. 항상 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했고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만큼이나 나 자신을 상대하고 싶었다. 그 점에서, 나에게 글쓰기는 오염되지 않은 곳이다. 세상이 더럽다고 느낄 때 정서를 도피시킬 수 있는 곳, 나를 대신해 줄곧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 이는 메시지보다 정서에 집중하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이 감정을 소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가령 <룩백>에 관해 쓴 글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하면 그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정서를 잘 이해해서다. 세상 어딜 가나 창작자는 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하는 점을 알고 나면 더는 도망칠 곳 없이 지금의 삶이 소중해진다. 게임을 중간에 관두거나 마약을 끊거나 하는 것처럼, 영화를 볼 때 중요한 건 자리를 나서며 영화를 끊어내는 일이다. 


오늘날 비평의 역할은 사람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끌어내는 게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자기를 끊어내도록 돕는 일이다. 많은 이들이 현대 서브 컬처가 아즈마 히로키에 휘둘리고 있고, 오염된 상태로 날뛰고도 있다고 말하지만 아즈마가 남긴 것은 [고립]이다. 자기에 대해 말하는 일은 쉽지만 오히려 어디까지가 자기인지를 분간하는 일이 더 어렵다. 그래서 자기를 끊어내어 고립하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전이라면 앞서 가는 한 사람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지만, 금세기 영상문화는 [사일런트 힐] 쪽에 더 가깝다. 가상이 실제를 초과하는 상황에서 ‘바깥’은 거진 환상이 되어버리고야 만다. 단적으로 빗대자면 사람들이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을 두고서도 어떤 감정을 느끼는 일이 마냥 좋은 쪽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감정적인 공감수치가 높아지는 일은, 물론 타인의 고통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큰 틀에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원치 않은 감정으로 고통받는 일은 집단과 ‘나’의 경계를 바로 세움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일을 두고서는 그 누구도 도피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행선지 같은 건 알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디까지든.” 이시다 아키라는 『도주론』에서 도주를 들뢰즈의 리좀에 빗대고, 자기에도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자기 폐쇄하려는 성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구조에는 항상 바깥이 있기 때문에 차라리 이를 해체하자고, 그게 ‘나’라고 할지언정. 차이가 생성을 만든다는 들뢰즈론은 여기서 “상대화하는 자기”로 발전한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순간이 더 중요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테면,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할 수 없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들한테 ‘자기’를 묻고, 다시 대답받는 식으로 환류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아는 것과 다른 사람이 보는 모습에 차이가 발생하고, 이는 그만큼 멀어진 자기에 다가서려는 ‘노력’으로 바뀐다. 이 자기에 빠져드는 것을 두고서 ‘도피’보다 ‘도주’로 바라보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어쨌거나 우리는 이 도주를 ‘배팅’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뒤로 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말하자면 영화를 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바깥]에 나서기를 포기한 셈이 된다. 영화가 끝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한 편의 영화 안으로 줄곧 도주하고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영화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나vs스크린’이라는 도식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서 이 세상을 영화가 되고 남은 여분으로 여기지 않는 게 아닐까. 영화는 흥미롭고 즐거운 대목을 압축해 놓은 게 아니라 우리를 일상에 재접속시키는 순간이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자기가 그곳에 없음을 느낄 때 우리의 몸은 정서를 토대로 분단된다. 그곳에 내가 없다, 는 이름의 ‘풍경’ 말이다. 가령 가라타니 고진은 자신의 풍경론을 설명하면서 ‘그곳에 없다’는 점에서의 에포케를 응용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발견은 판단되어진 현 상태 바깥으로 자기를 밀어내는데, 이게 곧 자기에의 재접속이라는 점에서다. 


<조커: 폴리 아 되>나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같은 작품을 보면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고만 하고 넘길 수 없는 대목이 분명 있다. 두 작품은 장르를 묘사하면서 이를 충실히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가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조커>의 아서 플렉은 자신이 조커이기보다 아서 플렉으로 남기를 택하고, <나히아>의 데쿠는 능력이 없으면 결국 영웅도 될 수 없다는 자기예언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스토리텔링 작법에는 이런 게 있다. 독자는 현실의 대안, 또는 도주로서 작품을 보는 것이므로 현실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조언을 따르면 두 작품이 ‘망했다’거나 ‘좋지 않다’고 평할 만한 요인은 확실하다. 사람들이 <조커>에서 기대했던 건 이제 막 조커로 각성한 아서 플렉이 고담시에 풀려나 난동을 부리는 것이었고, <나히아>에서 기대했던 건 개성이 없더라도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영웅이 되기를 바랐던 초심과 좌절을 극복하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이게 현실적인 생각은 맞지만, “어디로든 좋다”며 바깥에 나섰던 도주극이 하루아침에 가로막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작품이 보여주는 이상이 독자의 자기를 분단했다면 이런 이야기는 정해진 행선지를 돌아갔을 뿐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을 다시 바깥에 돌려보낼 뿐이다. 도리어 그곳에는 내가 있는 게 아니라, 없어야만 한다. 정서의 감염과 전파는 우리가 이 세계에 속해있음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영역으로 자신의 미래가 빨려들어가는 경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있음에 망치는 게 아니라, 없음에 맞서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주로 음악에 많이 의존한다. 음악의 정서에 의존하면서 글을 쓰는 감정도 흔하게 휘둘리곤 한다. 글을 쓰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벽을 마주한다면 음악을 듣는 일은 그런 정서들에 고립된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한 정서를 글로 풀어내는 일이 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책을 읽을 때는 그림 그리는 방송 등을 앞에 켜두거나, 그림 강연을 하는 사람의 사연을 듣거나 하는 식이다. 그림은 특히, 모든 게 하얀 화면에서 시작된다는 게 창작자에 주는 묘한 감정이 있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두고서 정해져 있거나 무엇이든 될 수 있거나 둘 중 하나로 설명하고는 하는데 이들 모두에서 우리는 분명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관찰 가능하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으면 미래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과거든 미래든, 기억하기로서 ‘자기’는 항상 모든 판단의 준거점이 된다. 그리고 그런 판단을 중지하는 일은 우리가 바라보는 목적의 반대방향으로 우리를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 미래에 대해 말하면서 과거로서의 자기를 짚거나, 과거를 떠올리면서 그에 대한 미래로서의 자기를 설명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들은 구조가 아니기에 파악되지 않는 영역을 잉여나 여분, 바깥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한 외부에 맞선다는 점에서 자기를 분단해서 몸의 영역을 만드는 효과가 있다. 내가 말하는 끌어안음은 이런 영역들에 관한다. 오늘날 비평의 역할에는 그와 같은 게 있다. 영화가 끝나면 다시 눈앞에 드러나는 건 하얀 스크린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두 개의 일어남, 자리에서 그리고 한 사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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