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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될 수 없는 것을 유지하려면

<어쩔수가없다>(2025)_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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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를 보며 봉준호의 <기생충>을 떠올릴 것 같다. 동시대의 작가라는 점 말고도 신자유주의와 중년 가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뭔가 일차원적인 비유 같지만 이 두 연상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우선 개연성에 관해서다. 영화의 제목처럼 <어쩔수가>는 이병헌의 선택이 과연 별다른 대안이 없었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어쩔 수가 없다고 되뇌며 작업을 실행하는 그의 모습은 사실 그동안 누려왔던 것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의미의 ‘생존’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삶의 필수재가 아닌 것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는 구직에 대한 의사와 함께, 앞으로의 삶에 현상유지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이가 나이인 만큼 업종을 바꾸거나 회사를 바꾸기도 애매한 처지의 그가 그런 선택을 한다는 건 꽤 특이하다. 50대를 전후로 한 나이에 회사를 떠나게 되면 적어도 같은 등급의 자리에 재취업하는 건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즉, 이병헌이 금세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는 점을 뜻하는데 결론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회사의 재정상황 등이 아니라, 업계 전체의 파이값이 줄어드는 상황이라 애초에 사람이 일할 자리가 충분치 못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왜 이병헌이 자신의 동업자를 죽이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인간 하나를 해고하고 남은 인간 하나를 고용하는 등가교환의 장이 아닌 상황에서 ‘생존’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거대한 종말을 향해가는 와중에서 누가 더 이 세상에 머물러있는지의 문제일 뿐이다. 이를 따르자면, 이병헌은 자신이 살아남으려 한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먼저 애도하며 추도하는 입장에 올랐다고 보는 편이 옳다. 고도화하는 산업 아래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줄어든다면, 이 세계는 애초에 종말이거나 재난을 맞는 중이다. 그러니 재난의 손길이 닿은 이 세계는 끝까지 살아남아 이들을 추모하고 기릴 존재를 필요로 한다.


<어쩔수가>와 <기생충>이 같은 자리에서 떠오른 건 한국의 동시대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마크 피셔가 말했던 종말론에 관한 일화를 되새기게 한다. 그는 사람들이 종말 이후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이미 종말을 살아가고 있어서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제지 공장의 인사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재난이 아니며 어떠한 큰 운명 안에 속해있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죽음에 속해있다는 결론인 셈이다. 이 안에서 이병헌은 조금이라도 세상에 남아보려 하지만, 그것도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도리어 세 명을 죽여서야 비로소 자리가 하나 남는 저열한 교환비를 선보이며 그 자신을 잉여로만 남길 뿐이다. 자본주의가 결국 잉여자산의 생성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멸종에 바로 서는 입장이 된 그는 안락사를 집행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 일화에서 중요한 건 팔리는 잉여가 아니게 된 이들이 과연 무엇과 교환되고 있는지다. 자본주의를 따른다면 이들은 경제적인 효용 등과 교환되겠지만, 각자의 욕망 안에서 저열한 교환비로 소비되는 점을 고려하면 도리어 이병헌이야말로 팔리지 않고 남은 상품인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여명이 꺼져갈 때 다시금 어둠에 휩쓸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벌거벗은 생명’인 듯하다. 조르주 아감벤의 대표적인 철학적 제언인 호모 사케르는 희생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를 죽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모순된 존재다. 다른 누군가를 대체할 수 없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죽음을 마주하더라도 아무런 이득도 남기지 않는다. 경제적인 이득도 그렇지만 법적이거나 윤리적인 산출도 남기지 않는다. <어쩔수가>에서도 이병헌의 처지가 그렇다. 제지 공장의 관리자 직책에는 누가 오르든 간에 큰 상관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공장이 멈출 일도 없다. 불이 꺼진 공장에는 단지 바라보며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기만 할 뿐이다.


존재론적으로 그냥 부품처럼 끼워 맞춰져만 있을 뿐 기능적으로는 아무런 역할이 없다. 위에서 말해두었듯 이 세계에 조금이라도 머물러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비루한 처지를 대변한다는 뜻에서, 그는 이들 생명의 죽음을 서서 지켜보는 ‘전지적 독자’다. 사실 불이 꺼진 극장에서도 관객은 그리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기술적인 의미에서 영화는 관객 없이도 어둠 속에 혼자 불을 밝힐 수 있다. 관객의 필요는 영화를 상영하는 제반시설의 운영자와 기업에 의해 요구되기만 할 뿐이다. 관객의 죽음을 목격하더라도 이를 위해 애도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관객은 결국 누군가 영화를 보아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고 듣고 느끼는 개별자라는 점에서 대체불가능한 존재이지만 반대로 극장 집계 시스템의 숫자 하나로만 표기될 뿐인 존재이기도 하다. 관객이 없어도 영화가 어떠한 처벌을 받는 것도 아니며 무언가 미학적으로 불성실한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관객이 없으면 돈을 벌 수 없다. 돈을 못 벌면 극장을 운영할 수 없고 이는 오늘날 매점 운영과 관객 입장, 상영 후의 좌석 청소를 병행하는 극장의 고용구조와도 연결된다. 인건비를 최대한 줄여서라도 이 구조를 연명하고 싶으니까 한 사람에 여러 역할을 맡긴다. 정확하게는 한 사람이 하나의 일만 맡을 정도로 상황이 바쁘지 않으니 이것저것 다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오해하면 차승원처럼 제지를 다룰 수도 있으면서 기계까지 정통하는 등 다양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영화를 바라보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이 산업이 그만큼 여분의 시간을 남긴 만큼 이를 다른 쪽으로 환산한 결과에 가깝다. 그리고 그 잉여분이 개인에게 가기보다는 기업의 이윤이 될 수 있게끔 인물을 구조조정하고 나면, 이들 구조가 쇠락한 현장에 책임을 지울 인물이 필요해진다. 멸망해가는 이 세계의 끝을 묵묵히 지켜보는 사람, 이미 퇴화했음에도 흔적으로 남아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는 기관.


그래서 이병헌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배우기에 나선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가 죽음을 맞고 있음을 시각화하는 장치가 필요하고 그게 단지 이병헌의 몫이 되었을 뿐이다. 작중에서 그는 자신이 제거해야 할 요인을 구분하고자 구인공고를 내는데 이때 떠오르는 문장 하나가 있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종이를 사용하겠습니까”라는 말이다. 원작이 다룬 시대에서 지금 시점으로 각본을 옮겨오며 취한 선택이라고만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니면 누가 영화를 극장에서 보겠습니까”라고 묻는 시네필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극장에서 보아야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영화를 물리적인 방식으로 배워서일 뿐이다. 마치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네트워크나 기계 같은 다른 몸으로 이식되더라도 팔과 다리가 달린 형상만큼은 자아의 유지보수를 위해 요구되듯, ‘극장’은 오늘날의 영화에 남은 흔적기관이다. 이제 영화의 결말이 남긴 공장 장면으로 돌아가자. 불이 하나둘 꺼지며 어둠으로 돌아가는 공장의 모습은 사실 영사기와 영사기사 한 명만으로도 어둠 전체를 통솔할 수 있던 최초의 시점을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수미상관이라고 보아야 할까?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아무런 것도 보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니 우리 일상의 아무런 것도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포석인 게 아닐까. 이병헌은 결과적으로 재취업에 성공해 관리직으로 복귀하는 일에 성공한다. 이야기 가운데를 잘라도 시퀀스는 무리 없이 이어진다. 결국 큰 흐름에서 보면 이병헌이 사람을 죽이고 다닌 건 어차피 죽을 사람을 죽이거나 망할 산업을 조금이나마 이어가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해석이 영화 안에서 개연성 있게 다뤄지는 건 등가교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를 해명해야 할 자원이 영화 안에서 자체적으로 소실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쩔수가>를 신자유주의 시대의 흐름에 놓는 일은 그리 정교한 선택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더 기본적인 의미에서 연금술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연금술은 이 세계의 엔트로피에 속해 있다. 본래 갖고 있던 걸 대신해 다른 하나를 들이려면 등가교환이 필수이며, 이 과정에서는 약간의 손실도 일어난다. 물을 끓이거나 얼려도 총량은 유지되지만 그 과정에서 가하는 에너지가 손실되어버리는 걸 떠올리면 된다. 영화가 무언가 부조리하게 끝나버렸다는 생각이 든다면 아마도 그에 대한 생각일 공산이 크다. 영화의 처음과 시작이 동일하다면, 이 안에서 손실되어버린 것은 분명 있다. 개연성의 손실을 ‘어쩔 수가 없다’는 대사로 연결하는 건 영화가 지닌 하이 콘셉트 그 이상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가령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그것 이외의 대안이 없다는 뜻에서 대체불가능함을 가리키는데 이는 영화를 끊임없이 비평하거나 지적하는 관객의 존재를 어찌할 바가 없다는 것처럼도 보인다. 좋은 싫든 간에 산업적으로 만들어져야 할 영화가 있다면 관객 집단의 반응을 하나로 통제하는 건 어렵다. 세계의 크기를 축소하던가 관객의 취향을 좁혀야 하는데, 영화의 생각을 빌린다면 문제는 그 둘 모두가 속한 세계 자체가 빛을 잃어간다는 점이다. 영화가 빛이 없는 곳에서 탄생했다고 해서 다시 이 세계를 어둠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영화는 다시금 추방자의 시절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어쩔수가>는 한 남자가 자신이 갖고 있던 욕망을 운영하기 위해 연료를 구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가 실행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이에 관한 길고 긴 변명이다. 남자는 이미 살인을 저지른 시점에서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걸었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을 유지하려면 결국 대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인 자기를 소모해야만 한다. 극장의 어둠, 그리고 지켜보는 일을 통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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