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혁명의 언어는 천해야 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

by 수차미
G1kOO6mW0AAJ-nx.jpg
rZDdRKbKuYMljH3kZ6oMtbB3sxE3PUaiM2oVmCYPbC2UUO-igcHOtoicHJY9-4c1MetZQIjPW6Q_uMvuz-g64Q.webp

천함과 비천함이라는 두 개 단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자가 상당히 질이 나빠 보인다면 후자는 무언가 슬픈 느낌이 든다. 아마 천박함이나 비루함 같은 단어가 연상되기 때문이겠지만, 술어에서 전자와 후자는 ‘아니다(非)’라는 반대 관계로 짜여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둘은 분명 서로 다른 한자로 쓰인 같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상관관계로서 제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천하다는 말이 ‘천박하다’라는 뜻에서 행동거지나 언행의 저급함을 지시한다면 ‘비천하다’라는 말은 ‘신분’의 낮은 정도를 주로 가리킨다. 즉, 전자가 어느 정도 능동성이 있다면 후자는 수동적이어서 뭔가 주체로서는 달리할 방도가 없다. 이 점에서 두 단어는 동의어임에도 마치 반대어인 듯한 인상을 준다. ‘천하다’와 ‘비천하다’를 용례로서 혼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신분이 고귀한 사람도 천한 말을 할 수 있고, 아름다운 옷매무새를 하더라도 출신이 비천할 수 있다. 거의 같은 뜻이지만 문장으로 만들어 보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문제는 이 두 개 단어가 서로 혼용되는 일이 둘 사이의 ‘아니다’라는 가상의 관계어를 두고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가령 신분이 낮은 사람이 천한 말을 하고 그 반대는 고귀한 말을 할 것처럼 느껴진다는 건 바로 이 ‘아니다’라는 오인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행동거지의 천함이 신분이 높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모순 관계를 담보하게 되는 것이다. 즉 두 단어는 의미적으로는 같지만 화용적으로는 서로 모순 관계에 있다.


이는 우리가 영화나 만화 같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분법을 구분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다. 천함이 비천함을 담보하지 않으므로 행동거지만으로는 상대방의 신분을 짐작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자크 리베트는 「천함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카포>의 트래블링 쇼트가 프레임 안의 대상을 의도적으로 ‘학대’한다고 비판하면서 특정한 시선 재현의 윤리적인 ‘선’을 넘는 순간 영화는 ‘천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 순간 영화는 그 자신의 ‘천박함’을 드러냄으로써 ‘비천한’ 신분으로 강등되는 셈이다. 하지만 앞서 말해두었듯 ‘천함’은 도리어 비천함으로 곧바로 연결되기보다 그러한 담보를 배신함으로써 착오를 불러들일 수 있다. 천한 행동거지를 보이는 인물이 사실은 무엇보다 숭고한 경우가 그러한 사례에 속한다.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의 인물 중 하나인 킴블리는 누구보다 천하지만 동시에 신념을 숭상하는 캐릭터다. 인간을 죽이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는 그는 어떤 종류의 신념이든 간에 상대가 신념이 있다면 무조건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는 천하지만 비천하지는 않으며 이는 곧 캐릭터에 관한 양가적인 감정을 형성한다. 즉 ‘착오’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가 작품에서 묘사되는 ‘천한’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된다. 말투가 상냥하더라도 그 안에는 가시 돋친 감정이 있을 수 있다. 말투가 거칠더라도 그 안에는 상대방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작품이 ‘천한 것’을 묘사하더라도 그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숭고가 있을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우리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실천적 행동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천한 언행을 하게 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이데올로기의 목적이 숨겨져야 하는 향유에 있다면 의도적으로 천함을 선보이는 일은 그와 같은 ‘비천함’이 자신이 숨겨야 할 목적이라는 말에 다름없다. 비천한 이가 천함을 행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천함이 비천함을 위해 희생한다는 건데, 이는 곧 오늘날의 작품들이 내부에 착오를 투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에 관한 지적 중 하나는 영화의 도입부가 남성의 시선으로 짜여있다는 점이고, 그 제시방식도 점잖지 않다는 점이다. 사춘기 소년의 성적 욕망이나 호기심 등을 다룬 이 작품에서 무언가 성숙한 사고방식을 보기란 힘들다. 덴지와 지인 간에는 원초적인 대화가 오가며 주변을 소란스럽게 한다. 그런 와중 덴지가 그리는 이상적인 어머니상으로 등장하는 게 바로 마키마다. 그녀는 고상한 외모와 말투로 덴지를 홀리지만, 실상은 자기보다 더 낮다고 여겨지는 이를 지배한다. 그리고 비천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분간할 때 품행의 천함을 고려하지는 않는 듯 보이는데 이는 그녀가 체인소의 악마를 동경하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정확하게는 덴지가 아니라 체인소의 악마에 대한 동경이므로 덴지의 불성실한 언행을 참아주기만 하는 것뿐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행동은 그녀 자신이 용납가능한 수준에 있는 수준에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덴지는 그 나이의 또래의 아이들이 할 법한 말을 하는 것뿐이다. 막연히 덴지를 두고서 천하다고만 놀리기에는 아직 변화의 여지가 많다. 심지어 덴지는 학교에 가본 적이 없어서, 만약 덴지가 학교에 가는 등 평범한 일상을 보냈더라면 적어도 천한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다. 마찬가지로 행동거지가 불쾌하다고 해서 상대방이 근본적으로 나아질 여지 없이 줄곧 천함의 단계에만 머무르리라고 여기는 건 착각이다. 덴지는 행동거지가 천하지만 그래도 악인은 아니다.천함과 비천함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언행이나 행동거지로 미리 신분을 예단하는 등 ‘착오’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마키마는 이후 결말에 가까운 시점에서 체인소의 악마와 싸우며 천한 말을 하는 그를 ‘덴지’로 오인하지만, 사실 체인소의 악마 본인이었다는 점에 큰 충격을 받는다. 마키마는 덴지와 체인소맨의 ‘간극’을 두고서 ‘체인소의 악마’로 이해했다. 이에 덴지라는 천한 존재를 체인소의 악마와 동일시하면서도 ‘비천한’ 것으로 내려다보지 않을 수 있었다. 이때 체인소의 악마 본인도 천한 언행을 한다는 점을 알고 나면 그 경계가 무너져내리며 체인소맨은 단순히 천하면서 비천한 존재가 되고야 만다. 이렇게 동일시가 깨진 존재는 더는 착오를 끌어내지 못하게 되어 숭고를 상실한다. 이제 그녀는 여지껏 자신이 동력원으로 삼아왔던 ‘없앤다’라는 마음이 그저 이데올로기의 실천이라는 허상에만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그저 비천함을 천함에 동일시했을 뿐이었다.


다른 한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는 혁명집단인 프렌치 75가 등장한다. 묘사의 문제겠지만 작품의 주인공인 퍼피디아는 다소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고 동료들도 강한 느낌의 단어를 사용하는 등 교양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다. 위의 분석을 이 영화에도 곧이 곧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논할 수 있는 점은 확실하다. 왜 혁명의 언어는 천함이 돼야 했을까? 우선 이 영화의 주인인 퍼피디아는 영화의 네 가지 파트 중 첫 번째 장이 끝나면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퇴장한다. 증인보호프로그램을 따라 동료들의 현황을 경찰에 고발하고서 자기 혼자 살아남은 그녀는 집단 내부에서 철천지 원수로 여겨지는 중이다. 그녀가 록조를 정말로 사랑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남편을 배신한데다가 록조와의 아이를 떠맡기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이 부부의 은퇴와 서로 맞물리는 건 우연이 아닐 테다. 아내가 증인보호프로그램으로 해외어딘가로 떠나버린 사이, 혁명집단의 동료들은 남편에게 아이는 우리에게 맡긴 채로 도망치라고 권한다. 하지만 남편은 다시금 위험천만한 삶에 뛰어들기보다는 아이와 함께하며 과거의 자신을 버리는 일을 택한다. 남편이 아이를 버리고 다시 활동에 투신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현업에서 은퇴해 무뎌진 일상을 견뎌낸다기보다 자녀에게 비천함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인 듯 보인다. 그는 자식이 더 나은 환경에서 높은 꿈을 꾸기를 바랐다. 최대한 천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록조가 한 집단에 들어가고자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 마음먹음에 따라 이야기는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 집단은 혈통이 백인으로 일관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다른 인종과 몸도 섞지 말아야 하는 등 백인우월주의를 선보인다. 이들은 다른 인종이 비천하다고 여기며 온갖 말을 쏟아내는 데 겉보기에 말은 번지르르하다. 비밀리에 활동하며 그럴싸한 언행과 복장을 한 이들에게 ‘숭고’란 천함과 거리가 먼 단어였으며 그렇기에 자신들의 행동과 달리 점잖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 숭고란 천함과 비천함 간의 착오에서 비롯되는 개념이며, 이를 따른다면 애초에 사상을 대하는 태도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가 자기로서 주어지는 일은 어디까지나 타자 앞에서 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이다. 록조의 흑인여성에 대한 성적애호는 그가 백인남성으로 우뚝 서기 위한 자기반영적인 저주였다. 물론 작품의 도입부에서 퍼피디아가 록조에게 사디즘을 행함으로써 그런 취향이 생겨났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 사실조차 자신이 평소 천대시해왔던 상대를 대함으로써 스스로의 우월감을 충족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렇다면 록조가 이 이야기에서 패한 건 그런 사실을 전할 상대가 없어서였음이 틀림없다. 퍼피디아의 남편은 적어도 이들 부부의 딸이 그들 자신의 천함과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는 걸 알았다. 단어와 단어 간의 연결고리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 같은 건 없다. 부모와 자식은 이분법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자기를 물려주는 관계에 있을 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대체될 수 없는 것을 유지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