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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의 방향, 변방의 반향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2025)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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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애리가 하니에게 “너는 왜 달려?”라고 묻자 하니가 답한다. “달리는 게 좋으니까.” 두 사람이 달리기를 하는 장면에서 나온 이 문답은 어딘지 모를 생각 하나를 들게 한다. 달리는 일에는 ‘러너스하이’란 게 있어서 고되거나 힘든 순간을 잠시 잊게 해준다고들 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연스레 감정도 사라지겠지만 적어도 달리는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이 완전히 자기에 속해있다. 영화를 보는 것도 단순히 ‘영화가 좋으니까’이기보다 ‘영화가 잠시 삶을 잊게 해주니까’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우리가 러닝타임이라 부르는 영화의 상영시간은 말 그대로 ‘달린다’는 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 우리는 잠시나마 삶을 잊는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 우리는 현실에 앞서 있을 수 있고, 이는 극장을 방문하는 이유가 된다. 한편으로 달리기가 특정한 지점으로 소실되는 스포츠라는 점도 염두할 만하다. 특정한 지점으로 달려가는 이 모습에서 소실점은 나머지 세계를 자신이 바라보는 곳으로 일치시킨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관객이 바라보아야 할 곳을 지시하는 게 이 소실점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영화란 결국 달리기와 같은 게 아닐까? 영화를 보는 동안에 관객은 후회 없이 달려나가야만 한다. 영화가 인위로 통제된 ‘유사’현실에 불과하다고 보기보다 그런 생각들에 사로잡히는 일에 끝없이 저항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를 탈주라 부른다.


만약 영화가 꿈의 세계라면 그 이유는 생각이 몸에 앞서 달려나가는 형국을 하고 있어서일 테다. 스크린을 내려다보는 시선 아래서 현실의 무게는 샅샅이 흩어진다. ‘러닝(타임)’은 현실의 무게를 흩어놓는 데 주력하는 운동이며, 이는 곧 우리가 무언가에 반하는 힘이 되어준다. 여기서 ‘반’한다는 것은 무언가에 사로잡힘이 아니라 반대방향으로 탈주하는 힘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구소련의 감독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영화를 주로 보았던 건 농민처럼 글을 배우지 못해 교양이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이었다고 말한다. 농민들은 영화의 내용을 면밀히 이해하기보다 다루는 내용에 더 깊이 감명받았다. 말하자면 영화에 사로잡히기보다 영화를 사로잡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나애리가 하니를 보며 느꼈던 건 왜 자신을 달리게 하는 환경이 아니라 자신이 달리고 싶은 이유였다. 언뜻 보면 나애리는 부유한 부모님의 후원을 받아 기대에 미치는 성과를 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도 같다. 그러니 항상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도 당연한 처사다. 하지만 그 안에는 결국 자신이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원작이 단거리 경주를 단순히 소재로만 사용하는 일에 그쳤다면 이 일화는 이들이 왜 극장으로 돌아오게 됐는지를 설명하는 감이 있다.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원작의 리메이크 판본이 아니다. 이 사실을 미리 짚어두는 건 이 세계가 파괴된 적이 없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리메이크라 하면 이전의 설정을 폐기하고 새로 얼개를 짜야 해서 ‘과거’를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과거에 있던 일은 모두 없던 게 되어버리고야 만다. 하지만 겉보기에 서로 비슷해 보인다 한들 과거가 없으면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니>는 그 점에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반하는 일은 과거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탈주하는 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선 원작에서 3년이 지난 시점을 다루는 이 작품은 하니와 애리의 화해를 다룬다. 삐삐 등을 사용하던 과거에서 곧바로 스마트폰 등이 등장하는 시대로 넘어가지만, 이는 과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다. 작중 서사는 과거에서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고 달라진 건 영화 밖의 시간 뿐이다. 그러니까, 관객은 원작인 1988년에서 40여년을 지나왔고 이들 간에는 자연스레 시간차가 자리잡는다. 이 시간차를 영화가 따라잡아야 할까? 영화에서 하니와 애리는 서로 등수를 두고 서로 경쟁하니 마찬가지로 영화도 현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해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불가하거나 다소 어렵다. 하니의 다친 발목은 직선 운동이 아니면 반대 반향으로 방향을 바꾸기 어렵게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경주에서 애리는 하니가 자신에게 알려준 코너링 방법을 써먹는다. 앞서 하니가 다친 발목을 극복하려는 방안으로 전봇대 코너링을 사용했다면, 애리는 벽 위를 달려 감속을 막는다. 여기서 나선형은 직선에 반하는 게 아니라 직선가속을 잘하게 돕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이른바 영화는 과거를 벗어나려 하기보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를 달리기를 택한다. 분명 <하니>가 보여주는 것 중에는 오늘날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점이 몇 개 있다. 개봉한 제목명처럼 ‘계집애’라는 표현이 작품 안에서도 몇 번 등장하는데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이다. 대뜸 부모님의 안부를 묻던 장면도 그렇지만 손을 댈 수 있을 여지는 꽤 많다. 이 외에도 다소 낡은 유머 센스를 보여주거나 하면서 예전과 아주 달라지지는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달리 말해서 과거를 버리기보다 안고 가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는 직진이 아니라 느슨한 코너링을 택한다. 원작에서 흘러온 시간의 차이만큼 동일한 설정을 반복하는 한편, 과거에 다시 다가가 이에 접속하는 일을 고민한다. 하니와 애리는 지나간 3년만큼 성장한 모습을 보이는데 두 사람이 적대적인 관계에서 동반자로 성장하는 일이 대표적이다. 이 안에서 캐릭터의 매력이나 설정은 원작을 승계하면서도 동시에 더 나은 미래인 대안적 관계를 선택한다.


후쿠시마 료타는 『나선형 상상력』에서 ‘접속’의 원리를 설명하며 게임이라는 매체에 익숙해진 세대는 과거를 ‘리셋’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지 않는 태도를 보이게 됐다고 말한다. 감각이나 유희 모두가 흔쾌히 리셋될 수 있다는 말은 반대로 과거에 취했던 태도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손쉬운 말 뒤집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과거를 없던 것으로 해버리지 않는다. <하니>를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도 하나의 답은 될 수 있었겠지만 본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관계를 처음부터 새로 쓰기보다, 이미 있던 결과를 인정하고 고쳐 나가는 일은 우리가 같은 길을 가더라도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달리기라는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트랙 위에서 후진은 허용되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려면 느리게 걷든지 아니면 더 빨리 돌아 뒤를 잡든지 둘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뒤로 감을 수는 없다. 중요하거나 재미있는 장면이 있으면 그냥 한번 더 보면 된다. 같은 길을 한번 더 가는 게 시간이 아까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반복 관람에서 매번 같은 감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느 곳에서는 ‘그럼에도’나 ‘하지만’처럼 인상이 달라지는 때가 있다. 이는 우리가 고정적으로 알아왔던 관념을 박차 미래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어준다. 이는 차이나 반복이 아니라 접속의 문제다.


‘순간’은 포착되기 위함이 아니라 미래의 포문을 여는 신호로서만 존재한다. 당겨지는 것은 달리기의 시작을 알리는 총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게 될 특별한 순간이다. 데이터베이스화된 세상에서 과거란 왜곡의 대상이 아니라 라이브러리화되어 쉽게 참조할 수 있게 된 부류의 서사다. 이 점에서 이 관찰자적 태도는 나선형 상상력의 핵심 서사가 된다. 나선형 상상력은 차이에서 반복을 끌어내는 회귀적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붙잡아 끌어안는 감속을 기본전제 삼는다. 얼마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이 안에서 중요한 건 같은 길을 걷는 게 아니라 느슨하게 철학하는 것, 사회에서 ‘신체’를 되찾는 것이다(아즈마 히로키). 나애리의 이전 코치는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지만 하니와 애리가 서로에서 의미를 찾은 건 그런 무승부로 끝난 경주를 통해서였다. 언어에 앞서는 신체는 상대방에 전할 말이 아니라 과거와 편견에 저항하는 태도가 된다. 가속력이 붙는 상황에서 반대 방향으로 내딛는 힘을 붙드는 건 오히려 경주에 방해만 될 뿐이다. 하니가 제시한 대안대로 코너링은 경계를 넘는 순간에는 약간의 감속이 요구되지만 도리어 한 세계가 바닥에 추락하는 일을 막아준다. 그리고 작중 설명대로 도리어 전봇대를 잡고 큰 원을 그리며 반향을 끌어내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본다면, ‘미래’는 표면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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