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의 요리를 따라 만들자! ] 조지 실버의 12월의 어느날 편
우정의 샌드위치에서 불륜의 맛이…
지극히 뻔한 스토리다. 한눈에 빠진 두 남녀의 본격 치정 러브스토리.
여기서 안방 드라마의 단골손님이 하나 더 첨가되었다.
바로…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는 것.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시대를 막론하고 독자나 관객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그 때문인지, 대체 몇억 가지의 치정극이 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요즘에 한창 인기를 폭주하는 드라마인, <부부의 세계>도 같은 맥락이지만,
오늘 필자가 소개할 책은 조금 더 코믹하고 사랑스럽다.
책의 표지도 몽글몽글 첫사랑의 추억 같은 파스텔 색조의 분홍색이다. 필자 또한 (안정감 있는 핑크빛 톤의 커버 이미지 때문에) 20장 정도 읽기 전까지는 그저 여자 주인공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약간의 통통 튀며 발칙한 캐릭터에, 남자주인공은 전문직의 약간은 냉정한, 사랑이라는 것에 위대함을 모르는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의 할리퀸식 로맨틱 코미디 장르인 줄만 알았다. 역시, [남이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법칙은 위대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남의 일처럼 불끈했다가, 책의 중간쯤이 되어보니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폭풍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는 필자만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아...낯설다. 이런 내 모습. 거울을 깨부수고 싶었다.
사실 요즘 하도 유명한 고전 작가들을 다시 읽는 중이라, 처음에는 이 책이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문장을 뼈 깍듯이 쓰는 작가를 좋아한다.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한 작가. 누군들 안 그러겠느냐마는 유난히 독하게 단어를 고르는 작가들이 있다. (아마 매거진 chaeg을 구독하는 독자분들쯤이라면, 대충 머릿속에서 몇 명 떠오를 거다. 그렇다. 그분들!) 따라서 필자는 스토리의 플롯보다 한 문장마다 깊은 관찰을 통해 얻은 삶의 철학이 느껴지는 책만을 구매했는데, 그러다 보니 필자의 서재는 심각하게 편식적인 모습에. 웬만한 책이 다 거무튀튀한 색을 가지고 있다. 오늘 필자가 소개할 책은, 그 칠흑의 서재에서, 반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위대한 작가들 사이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조지 실버의 <12월의 어느 날>이다.
전개는 심플하다. 아니, 너무 단순해서 좀 어이가 없을 정도다. 아예 독자가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는, 본격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그 자체이다. 시점은 여주인 로리와 남자주인공인 잭, 이렇게 번갈아 가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보여주다 보니까, 이거 이거 완전 팝콘각. 내 생에 책을 읽으며 팝콘을 먹고 싶을 줄 꿈에도 몰랐다. 작가 조지 실버는 기가 막히게, 독자가 궁금해할 순간마다 시점을 바꿔 주인공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가뜩이나 현대 사회에서 사회관계로 골머리 터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좋은 치유가 없다. 아주 속 시원하게 가려운 부분을 바로바로 긁어주는 책, 이래서 뉴욕타임스 1위, 아마존 킨들 1위에 올랐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또한, 주인공인 로리는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요소는 모두 갖췄다. 주변에 이쁜 친구로부터 오는 부러움, 본인이 평범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 + 약간의 자격지심, 흔들리는 만원 버스에서 느끼는 일상에 대한 깊은 빡침,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식욕에 대한 솔직한 내면의 소리까지, 매 문장마다 정말 영국인이 썼나 할 정도로 문장 하나하나가 웃기고, 자연스럽다. 감히 말하지만, 내 평생 이렇게 대놓고 문장으로 웃기는 번역 소설은 처음이다. (한편으로 옮긴 이가 누군지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항상 스스로를 망한 파리지엔느로 생각했다. 할머니의 체형은 물려받았지만 우아함은 계승하지 못했으니까. 할머니의 단아한 흑갈색 올림머리는 내게 이르러 전기 오른 것처럼 정신 사나운 곱슬머리 다발로 변했다. 더욱이 내겐 댄서의 소양 따위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기에는 내가 초콜렛 비스킷에 너무 환장한다. 내 신진대사가 도저히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이 여자, 너무 매력적이다. 진심으로 나와 빙의 된 줄 알았다. 세상에 저 멀리 영국 너머에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주인공이 있다니. 문체가 어떻든, 전개가 뻔하든 간에 이 책을 필자가 놓을 수 없었던 강력한 이유였다. 여자 주인공인 로리는 이렇게 매 순간 자신이 느끼는 생각을 과하게 솔직할 정도로 표현한다. 자신은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도 말해버린다. 필자가 어이없는 건, 저 주인공의 신념이 책이 시작한 지 몇 장도 되지 않아 바로 뒤집힌다는 것이었다. 그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로리는 남자주인공 잭과 눈이 마주치고, 그 둘은 사랑에 빠진다. 로리는 몇 달간 잭을 상상하며, 본인의 성적 판타지 세계관을 확장시킨다. 그러다, uh-oh, 자신의 단짝인 세라가 새로 사귄 남자친구를 소개하는데... 그렇다. 그 남자가 바로 잭이었다. 이렇게 그 둘의 일기를 몰래 꺼내다 보는 것처럼 이야기는 전개된다.
문제는 이거다. 우리는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세라와 로리는 그 누구보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단짝 친구라는 상황이다. 작가 조지실버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샌드위치까지 발명했다. 이름은 DS 스페셜. 바로 세라와 로리의 오래된 우정을 보여주는, 암호와도 같은 스페셜 샌드위치이다. DS는 대학 때 그들이 자취방 주소를 따서 딜런시 스트리트이며, 스페셜은 말 그대로 해외의 델리(슈퍼마켓이자 간단한 음식을 파는 편의점)에서, 밀고 있는 시그네쳐 샌드위치에 붙여주는 이름이다. 이 샌드위치는 필자가 추측하건대, 자취하면서 냉장고에 있는 모든 음식을 있는 대로 쑤셔 넣어 만든 음식인데, 우연히 그때 냉장고에 남았던 재료와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는 조합을 가져다주어, 그들에게 오감의 만족을 준 듯하다.
로리는 세라에게 DS스페셜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세라는 말한다. “너도 할 줄 알잖아.” 역시나 우리의 주인공, 로리는 세라 앞에서 나약해진다. “너처럼은 못해.” 이때 독자인 우리들, 로리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왜? 세라는 너무 이쁘니까, 뭐든 다 가졌으니까. 우리 모두, 그런 잘난 친구 하나둘쯤은 있어 봤으니까 말이다.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남자로부터 상처를 못 받았을 것만 같은 그런 여자, 세라. 그런 세라가 홀딱 반해버린 남자친구, 잭. 만약 그 잭이 천천히 로리에게 관심을 끌게 된다면? 자, 어서어서. 1열이다 이건. 무조건, 팝콘각. 가상에서 못한다면, 현실에서라도 즐기자. 독자들이여.
<DS 스페셜 레시피>
재료: 샌드위치 빵, 베이컨, 비트, 버섯, 닭가슴살, 블루치즈, 크랜베리 쨈, 마요네즈, 양상추, 레몬즙
1. 샌드위치 빵을 토스터에 굽는다. 개인적으로 크랜베리가 버무려진 닭가슴살 샌드위치에는 호두가 들어간 호밀빵이 맛있는데, 여자 주인공 식탐 크기로 봐서는 호밀빵 안 먹을 팔자다. 그러니 싱크로율을 위해 뽀얀 흰 빵으로 굽자.
2. 굽는 사이,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닭가슴살을 굽는다. 가볍게 소금, 후추를 치고, 노릇해질 때쯤 빼낸다. (설마 닭가슴살을 사 온 그대로 덩어리째 굽는 사람이 없을 거라 믿는다. 대략 2cm-3cm 정도의 두께임을 명심하자) 다 구웠으면 위에 레몬즙을 뿌려 잡내를 날린다.
3. 팬에 남은 기름으로 베이컨을 굽고, 베이컨에서 나온 기름으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프라이팬을 버리지 말고, 마지막 버섯을 볶는다. 여기서 버섯은 느타리버섯류가 괜찮을 듯하다. 중요한 건, 닭가슴살 수준으로 노릇하게 구워줘야 한다는 점이다.
4. 빵을 구우면 바로 마요네즈를 고르게 바른다. 여기서 마요네즈는 코팅막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래야 빵이 재료 때문에 흐물흐물해지지 않는다. 또 한 번 주인공을 떠올리자. 얇게 바르면 안 되고, 관대하게 바른다.
5. 마요네즈를 올린 빵에, 양상추, 얇게 뜬 비트, 닭가슴살, 크랜베리 쨈, 블루치즈 송송, 구운 버섯, 베이컨 순으로 올린다. 이건 무조건 필자를 따라라. 나름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위치를 정한 것이다.
6. 그 위에 마지막 빵을 덮어, 반으로 잘라 먹으면 된다!
위의 글은 매거진 Chaeg 에 수록된 '우정의 샌드위치에서 불륜의 맛이...'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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