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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bez Jan 09. 2021

알함브라 개똥의 추억

회사를 떠났습니다, 아주 잠시 #05

“조심해!” m이 내게 소리쳤다. “쉿!” 하마터면 열심히 밟을 뻔했다.


스페인에는 똥이 더럽게도 많다. 우리는 스페인의 도시 곳곳에서 자세를 낮추고 포진해있는 똥을 목격했다. 처음 발견 장소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간직한 그라나다. 금방이라도 박신혜와 현빈을 맞닥뜨릴 것만 같은 우아한 그라나다의 골목길은 내게 개똥밭스러운 첫인상을 남겨주었다.


m과 나는 오전 산책 삼아 알함브라 궁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 나와서인지 꽤 오랫동안 알함브라를 둘러보고 나왔는데도 시간이 여유로웠다. 남는 시간을 탕진하기 위해 올라갈 때 탔던 버스 대신 걸어서 길을 내려가기로 했다. 군사 요새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붉은 성 알함브라는 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라나다 시내까지 돌아가려면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는 언덕을 지나 이슬람 상점과 음식점이 있는 골목을 통과해 내려가야 했다. 길에는 스페인의 오후 햇살이 키가 큰 나무와 좁은 골목 틈 사이로 얼룩 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그늘 밑에 문제의 개똥들이 숨죽이고 엎드려 있었다. 나는 5분에서 10분 간격으로 그 녀석들을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흠칫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들겼다. 주변에는 외국인들이 반려견을 대동하고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대형견이었다. 운동화만큼이나 큰 놈을 막 밟을 뻔한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흘겼다.


“여기는 배변봉투를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 없나 봐." 운동화를 여기 저거 살피며 내가 투덜댔다.


“그러게. 사람들이 개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반려동물 문화는 아직 우리나라만 못하네.” 그라나다에 도착했을 때 그동안 상상했던 유럽 느낌이 난다며 신나 하던 m도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개똥 피해서 걸으려니 내리막길이 더 힘들다. 이제 내려가는 게 힘든 나이가 됐다니 슬퍼.” m이 지나가듯 하는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괜히 찔려 잠시 주춤했다. 나보다 6살 어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빠도 조심히 내려가. 오빠 체스잖아.”


“체스?” “체력 쓰레기라고.” “아.." 이번에는 뼈를 맞았다. 화제를 돌려야 한다.


“그건 회사에서도 비슷한 거 같아.” 나는 말을 이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처음에는 보통 위로 올라가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내려가는 게 더 힘들고 고될 거 같아.”


“음, 그럴 수 있지.” m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도 올라가는 게 힘들다는 사람들은 그래도 회사에 꿋꿋이 남아는 있잖아. 근데 내려가는 사람들은 어느샌가 회사에서 나가고 없더라고.” 머릿속으로 몇몇의 얼굴이 흘러갔다.


“이런저런 고생 안 겪으려면 애초에 안 올라가면 되지 않나? 올라가면 언젠가는 결국 다시 내려가야 되잖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평탄하게 살고 싶다.” 나의 소신 발언에 m이 이번에는 명치를 때렸다. “못 올라가는 건 아니고?” 자꾸 아프다. 너도 아프냐? “..아니, 알함브라 말이야. 나 체스잖아. 힘든데 괜히 올라왔나 봐.”


“근데 회사에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으면 개똥들은 뭐야?” m이 물었다. “직장 동료. 그런 사람들 있어. 잘 생각해보면 네 주변에도 있을 걸? 알아서 잘 피해 다녀.” 개드립은 여기까지.


회사에도 똥밭이 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히는 수직낙하 프로젝트, 어제까지 멀쩡하다 갑자기 발견되는 장애, 일하다 겪게 되는 각종 실수, 또는 진짜 날 너무 힘들게 하는 직장 동료일 수 있다. 이런 위험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말똥과 개똥 같이 우리를 위협한다. 말똥 같은 리스크는 개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밟았을 경우를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큼지막하지만 사실 잘 보이니 피하기도 쉽다. 진짜 조심해야 하는 건 개똥 같은 작은 리스크다. 이런 위험들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오며 밟기 전에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밟기도 쉽고 한 번 밟아 버릇하면 자꾸만 밟기 십상이다.


그라나다 언덕길을 내려오며 무릎에 무리를 느꼈다. 돌아가면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겠다. 평평한 삶이 쉽지 않다면 잘 오르내릴 수 있는 체력이라도 길러야지. 회사에서도 개똥을 피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다. 한 번 밟으면 실수지만 자주 밟으면 내 실력(?)이 된다. 이번 여행길에 운동화는 하나뿐이고 하필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나는 이 운동화를 신고 오래 걷고 싶다, 평탄하게.


20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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