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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Oct 03. 2018

오만과 편견

'좋음'의 진실

대학입시가 끝나고서다. 친구 하나가 묻는다.

“니 노래선교 안 갈래?”

“그기 뭔데?”

“응, 그냥 가서 손 잡고 노래 불러주는 기다. 가아들이 몬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선교란 말에 혹한다.

“내가 무슨 선교? 아직 고등학교 졸업도 안 했는데...”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데 고등학교 졸업장이 무슨 상관이고?”

“알았다. 내가 노래는 몬해도 음정은 맞출 수 있대이.”

“니도 다 아는 노래들이다. 걱정마라.”

“근데 가아들이 몬 알아들을 수 있다는 기 무슨 말이고?”

“가 보면 안다.”     


당시는 봉사라 하면 정말 테레사 수녀님 같은 성인들께만 허락된 일인 줄 알았다. 나 같은 범인에게 그런 기회가 오다니!

일요일이었던 것 같다. 사명감에 벅차 아침부터 달려갔다. 도착해서 보니 몸이 몹시 불편한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다. 선생님들께서 부드러운 미소로 우리를 맞아 주신다.

“좋은 일 하네.”

그 한 말씀에 어깨가 어찌 그리 으쓱해지는지.

열심히 청소하고 부엌 일 거들고 하다가 이제 노래 부를 시간이란다. 좀 움직일 수 있는 아이들만 데리고 옥상으로 이동. 음악을 한답시고 어릴 때부터 조명 휘황한 ‘콘서트’ 무대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자연조명 아래 臺(대) 없는 ‘야외무대’가 얼떨떨하다. 그래도 내색은 금지. 여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리. 무대가 있고 없고가 대수냐.

아이들이 우리를 빙 둘러싸고 앉는다. 우리끼리 원을 만들어 서로 손 잡고 섰다. 그것도 바깥을 향해서. 손 잡고 노래 부른다더니 그 손이 우리 손이다. 친구들은 이미 익숙한가 보다. 질 수 없다. 워낙 무표정한 얼굴이라 마음 감추기는 문제없다.

 

노래를 시작한다. 서로 등지고 있어도 거의 삼년 내내 학교 합창단에서 같이 노래하며 놀던 친구들이라 호흡이 척척이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지 푹 감정이입이 돼서 갈수록 신이 난다. 그렇게 한 서너 곡 불렀나 보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노래가 가진 힘이, 성령이, 몸이 불편한 아이들에게도 ‘역사’하실 거라 믿었다. ‘좋은’ 기운은 학습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좋을 거라 믿었다. 누구나 알아들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아이들의 모습이 내 눈에 비쳤다. 머릿속에서 뭔가,      


퍼억!     


하고 불이 꺼진다.      

우리가 부른 노래는 노래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는 그저 햇살 좋고 바람 시원한 옥상에서 선생님들 품에 안겨 있는 ‘다사로운 시간’인 것이다. 가사야 어차피 못 알아듣는다 해도 이 좋은 노래가, 이 선율이, 이 화음이, 이 힘이, 이 긍정의 에너지가, 왜 아이들한테 의미가 없는 거지?      


...그렇다!

나는 ‘좋음’이라는 이름을 방패로 ‘오만’ 의 날개를 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길 바라고 그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교육’이나 ‘학습’이 필요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 교육이나 학습이 필요한 건 나 자신이다. 그들과 공감하지 못하는 건 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거나 나의 접근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전 알지도 못하던 언니 혹은 누나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온갖 착함과 성실함을 부산스레 늘어놓고 좋은 노래랍시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노래를 자기 흥에 넘쳐 부르는데 무슨 공감이 생기겠는가?      

‘그 날’은 정말 천둥처럼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내가 좋다고 생각한 것이 그 아이들한테 좋은 게 아니었고 봉사한다고 생각한 것이 봉사가 아니었다. 어찌 감히 좋다고 할 것이 있으며, 어찌 감히 봉사할 것이 있겠는가.

오로지 세상 모든 것을 감사히 배울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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