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미정 Aug 03. 2017

수처작주, 하심의 미학

춘천 봉덕사 금강경 수련회


유난히 일정이 많았던 한 학기였다. 

누적된 피로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춘천에서 송광사 원순 큰스님의 금강경 법회가 있단다. 생불로 알려지신 성철 큰스님의 상좌(제자)이면서 20여 년째 묵묵히 불교 경전을 쉬운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시는 스님이시다.

금강경, 누차 읽었던 경전이다. ‘공’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아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큰스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을 절밥을 먹고 절집에 자면서 가까이서 듣고 싶다. 일주일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걸 잊고 부처님 말씀에 푹 젖고 싶다.

새벽 네 시!

성급히 울어 제치는 알람을 다독여 놓고 밤새 굳어진 몸을 으드득으드득 깨워 일으킨다. 뜨거운 물에 샤워. 하루를 시작하는 경건한 의식이다. 아무리 시간이 촉박해도 빠질 수 없다. 뜨거운 기운이 굳어진 몸에 오늘 하루 움직일 수 있는 만큼의 숨을 불어 넣는다.

지난 밤 챙겨놓은 가방을 들고 차로 향한다. 어디로 가도 막히겠지만 조금이라도 덜 막히는 길이 있을까 동선을 이리저리 궁리하며 고속도로에 오른다. 7시까지 한참 남았는데도 이미 차량이 많다. 장마도 이기는 게 여름의 주말인가 보다. 주변의 풍경과 함께 번잡했던 마음도 점점 정리가 되면서 고불고불 마을길로 들어선다. ‘옥수수 한 개 500원,’ 삐뚤빼뚤 빨간 손글씨가 정겹다. 마을 입구에 큰스님 초청 금강경 법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봉덕사!

그리 높지 않은 산 중턱에 아담하게 자리잡았다. 대웅전 앞의 시원한 마당을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소나무들이 뭐가 그리 궁금한지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며 옹기종기 둘러서 있다. 법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해맑은 기운이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니 저편에 스님이 한분 계신다. 주지스님이신가 보다. 맑고 환한 미소를 띠고 계신다. 뭔가 빗장이 풀어지는 느낌이다. 공손히 삼배를 드린다. 절하는 게 나는 참 좋다. 절하는 순간에는 잠시나마 모든 것이 잊어진다. 스님들께서 절을 올리실 때는 뒤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뭉클하다. 그 깨끗함, 그 따뜻함이 내 마음에도 전해진다. 나도 그렇게 절하고 싶다. 절이 그다지 크지 않아 사람이 많지 않을 줄 알았는데 법당이 꽉 찬다. 금강경에 대한 열기가 대단하다. 법문이 시작된다.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단 한 중생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하느냐는 제자 수보리의 물음에 부처님께서 주신 대답이다. 울림이 전해온다. 강하다. 누군가를 도와주더라도 도와준다는 생각이 없이 도우라는 말씀이다. 일을 하더라도 일을 한다는 생각이 없이 하란 말씀이다. 나아가 연주를 하더라도 연주한다는 생각이 없이 연주하란 말씀이다.

예전엔 이 말씀을 단순히 ‘생색내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 도와준다는 생각조차 들 틈 없이 최선을 다하고, 일을 할 때 일을 한다는 생각조차 들 틈 없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연주를 할 때 연주한다는 생각조차 들 틈 없이 연주에 최선을 다하면,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지고 일과 나의 구분이 사라지고 음악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 모든 것들과 동체일심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수처작주, 하심의 미학이다. 수처작주란 들어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하심, 내 생각을 내려놓고 나를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나를 내려놓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큰 그림을 보게 되고,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눈이 닿는, 그리고 눈이 닿지 않는 모든 곳에서 빛난다. 왜 미처 몰랐을까,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을.



오전, 오후 총 10회의 법문인데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깝다. 봉덕사는 참 풍요롭고 넉넉하다. 곱디 고운 비구니 스님들께서 50여 년간 온갖 애정으로 일구어 오신 절이다. 특히, 주지스님의 염불은 정말 일품이다. 꽃잎 같은 음성으로 금강경을 읽어주시면 나도 모르게 금강경에 푹 젖어든다. 여기 봉덕사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늘 배려하며 사랑이 넘친다. 그래서 매 순간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사랑과 관심 속에서 집중하니 집중의 힘도 훨씬 강하다. 그래서인지 뜨거운 샤워가 아니면 움직일 수 없던 아침도 언제부턴가 뜨거운 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져 있다.

 

큰스님의 금강경 법문이 봉덕사에서 빛나는 건 필연적인 인연이리라.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곳, 부처님 말씀처럼 온갖 시비분별에서 나오는 잡념을 떨쳐 내고 이 청정한 샘물을, 이 시원하고 맑은 샘물을 늘 마음에 담아 두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알지도 못하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