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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Dec 03. 2021

11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12번째 이사.

https://www.youtube.com/watch?v=qipS5uOXt1Q

지금까지 내 인생에 12번의 이사가 있었다. 모두 3개의 도시, 12 집에서 살았는데 그 중 5곳은 부모님과 함께 한 이사였고, 나머지는 혼자였다. 십대 시절엔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나는 게 나의 가장 큰 꿈 중 하나였다. 한국을 떠나고 싶었고, 혼자이고 싶었다. 혼자가 된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진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홀로 있게 되었을때 나는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떠나온 곳에 대한 향수로 눈물을 흘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언어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화가 났고,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속이 울렁거리는 불안과 두려움이 늘 함께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나의 불안을 다스릴줄 알게 되었다. 다스린다는게 맞는 말일까? 어쩌면 무뎌졌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불안은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하고 있지만 더 이상 두려운 감정은 아니다.

삶의 환경을 바꾼다는 것이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이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또다시 삶의 환경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선택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건 어떤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이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원한 것은 고요와 몰입이었고, 마침 내 부모가 시골로 터전을 옮겼기에 나의 선택은 보다 쉬워졌다. 어딘가에 정착을 하고싶다, 하겠다는 욕망이 없는 나로서는 과연 내가 새로운 곳에서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은 없었다. 다만 어떻게하면 고양이가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서 장거리 이사를 할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나의 우려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사를 마치고 적응도 잘 해나가고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사준비는 이사를 결심한 즉시 시작되었다. 부동산과 집주인에게 연락해 이사 사실을 알렸고, 이사 업체에는 이사 한 달 전에 알아봤다. 견적을 뽑고, 적당한 업체를 골라 예약했다. 운전 면허를 땄고, 천천히 조금씩 짐 정리를 해나가면서 버릴 짐들을 갈무리 했다. 원룸 살림에 큰 가구도 없어서 1톤 트럭이면 충분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혼자 살아온 세월의 부피는 만만치가 않았다. 짐을 싸도 싸도 끝이 없었다. 300권이 채 안되는 나의 소박한 서재는 이삿짐 박스 안에서는 결코 소박하지 않았다. 분명 읽었는데 주인공 이름도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 책들이 상당했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들을 보면서 이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 맞는가 하는 엉뚱한 생각부터 책을, 인생을 참 헛되게 읽고, 살고 있구나, 이 책들이 내 인생 안에 있기는 한걸까하는 생각까지. 짐을 싸면서 여러 생각들이 채워지고 버려졌다. 이사 당일이 왔고, 감사하게도 좋은 분을 만나 망가지는 짐 없이 무사히 이사를 마쳤다. 이사 들어올때 선납했던 관리비를 환급받고, 도시가스요금을 정산하고,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까지 모두 돌려받았다.(집주인은 이사를 나가는 당일 보증금을 보내주었는데 신기하고 감사하게도 이사 선물로 십만원을 더해서 보내주었다. 신기한 집 주인.) 그렇게 일년 10개월을 살았던 집을 떠났다. 거대한 통창으로 보이던 바다와 거센 바람소리도 이제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사 당일까지 떠난다는 것에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다가 고양이를 안고 아빠 차 뒷자리에 앉아서야 실감이 났다. 조금 아쉽고 멜랑콜리가 가슴 언저리에서 찰랑거렸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떠남’의 슬픔은 파리를 떠나올때 모두 써버린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무사히 이사를 끝냈다는 안도감이 내게는 더 컸으니까…

상자에 담았던 짐들을 꺼내 정리를 하고, (공간은 더 커졌는데 방은 더 어수선해진 이 아이러니는….음…) 아직은 일상의 루틴이 흐트러져 있는 단계지만 운동도 하고, 운전도 하고, 고양이 똥도 열심히 치우면서 적응해나가고 있다.


혼자가 익숙한 내게 누군가와 함께 (그것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가족이라 더더욱) 살아가는 일은 감히 도전이라 할 만한 것이지만 함께 하는 삶을 통해 나는 받아들임을 배워나간다. 이곳에서 나는 나를 완전히 비우고자 한다. 규율과 공식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나만의 것으로 재밌는 작업을 하는 것이 이곳에 있는 동안 내가 이루고픈 목표이자 꿈이다. 이곳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낼지 모르지만 이곳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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