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ejwk Mar 01. 2022

1월과 2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피로엔 겨울잠

https://www.youtube.com/watch?v=_QFgPtmM7Ps

1월.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로감과 함께 2022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입 안 곳곳이 헐어서 음식을 제대로 먹기가 힘들었다. 잠을 충분히 잤음에도 항상 졸렸고, 게다가 생리까지 터져 한마디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매일,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매일 ‘운동’이라는 걸 하고 있고, ‘아이고, 오늘 좀 무리했네.’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비실거려서 무슨 일을 하겠나 싶어 기분까지 가라앉았다.


나는 잠을 많이 잔다. 하루 평균 8시간 이상을 자니 많은 자는 편이다. 식사도 잘 한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먹고, 중간 중간 간식도 먹는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인스턴트 음식, 배달 음식을 안 먹은지도 몇달이 되었다. 술을 자주 마시긴 하지만 과음하지 않고, 운동도 매일 한다. 달리기를 할 때는 5km를 달리는데 딱 적당히 힘든 정도이고, 타바타를 할 때도 30분, 요가 역시 익숙한 동작으로 30분을 절대로 넘기지 않는다. 밤을 새워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낮에 작업할 때도 2시간 이상 집중해서 쓴 적도 없다.) 한가지 고민을 심각하게 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백수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피곤할까?

아마 무료해서 그런 걸꺼야.

과연 그럴까? 엄마의 말이 맞을까?

하지만 나는 무료하지 않다. 에너지가 부족한가? 그걸 부정할 순 없으나 무료한 것은 아니다. 나는 매일 할 일들이 있고, 약속한 일들이 있고, 마음이 늘 바쁘고, 아무튼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이러지 못하고 무료해하는 상태는 아니라는 거다.

유난히 피곤한 날들이 많았던 1월이었다. 나도 모르게 쌓여있던 무언가가 몸 밖으로 나오려 한게 아닌가, 조금씩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한다. 어쩌면, 아마도, 쉽게 피로를 느낄만한 나이가 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아, 매일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듯 아침을 시작하던 시절은 이제 오지 않겠지…(나만 이런 것은 아닐테고, 이런 짜증나고 피곤한 상태를 견디면서, 심지어 아픈 몸으로도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해 내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2월.

작년, 이곳에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해서 집 앞마당에 하얀 눈사람을 만들어 놓을 수 있지 않을까, 태어나 처음으로 눈사람다운 눈사람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컸다. 눈을 볼 수 있는 날들이 있었지만 눈은 아침 해가 뜨면 사라졌고, 이번 겨울엔 바람에 날아가는 눈송이들을 보면서 아, 예쁘다.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함박눈이 내리던 아침, 나와 가족은 신나게 주차장에서 차가 내려가는 길에 내려앉은 눈을 쓸어냈다. 배에 단단히 힘을 주고 오른쪽, 왼쪽, 비질을 신나게 했다. 허벅지가 당기고 숨이 가빠왔지만 신이나서 웃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눈을 쓸어낸 자리 위로 다시 눈이 내려앉았지만 걱정보다 설렘이 더 컸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잠시 쉬었다 나중에 다시 비질을 하자, 그러고 집 안으로 들어왔지만 나중에 다시 비질을 할 일은 없었다. 눈이 그치고 갠 하늘에서 내리 쬐는 햇살에 바닥을 덮은 눈이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눈이랑 놀 생각에 들뜬 마음이 아쉬웠지만 그날 아침 우리가족은 정말 오랜만에 모두 다 함께 크게 웃었고,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2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아침엔 부드러운 햇살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고, 포근한 바람에 뭔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 우리집 마당에 있는 매화 나무에 꽃망울이 맺혔고, 그 중 성격 급한 한 송이는 벌써 활짝 피어났다. 이 꽃망울들이 모두 개화를 하면 달콤한 향을 맡을 수 있겠지. 어느새 성큼 다가온 봄이 반갑다.(그래도 기후변화로 봄이 점점 빨라진다니 걱정이다.) 자연은 성실히 제 할 일을 한다. 나도 이렇게 제 할 일을 해 나가야 할 텐데…. 음… 지루한 자기반성은 자제하자고…


엄마와 아빠가 가물었던 겨울을 이겨내고 물이 고플 나무들에 물을 주는 동안 나는 안절부절하는 루(분리불안, 강아지가 아니라 노인애기)를 구박하며 거실에서 영화를 보았다.

<winter on fire>는 2013-2014 겨울, 우크라이나 혁명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부패한 정치 권력에 맞선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처절하고 아름다운 싸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우리의 지난 촛불시위가 떠올라 굉장히 몰입해서 보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가슴이 먹먹했다. 평범한 시민들의 평화 시위에 권력은 폭력으로 대응했지만 시민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수백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명이 다쳤지만 그들은 승리를 쟁취했다.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 부디, 이 말도 안되는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매일 기도한다.


 요즘은 집에서 내가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내려마신다. 후라이팬에 250그램씩 소량으로 볶아도 어떤 콩은 덜 볶이고 어떤 콩은 까맣게 타버려 색이 얼룩덜룩하지만 신기하게도 커피 맛이 꽤 훌륭하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로 시작해서 지금은 니카라과 커피를 마시고 있고, 다음에는 과테말라 생두를 볶을 계획이다. 홈 로스팅은 꽤나 번거로운 작업(결점두를 골라내는 일이 특히)이지만 소소한 즐거움과 만족감을 준다. 이런 작은 즐거움들이 많은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피어나는 꽃잎을 바라보고, 고양이와 코인사를 하고, 강아지와 가볍게 걷고, 매일 다른 하늘을 보고, 몸을 움직이고,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리고, 음악을 듣고.

작은 즐거움들을 누리고, 감사해하고, 그리고 깊이 고민하고, 집중해서 무언가 만들어내는 시간에 충실하고.


백수린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를 읽었다. 모르고 지나쳤던 인생의 어느 순간,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비로소 보게되는 묘사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단순하고 쉬운 문장으로 은근하지만 정확하게 그려내는 좋은 글이다. 독자를 글 안에만 머물게 하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다. 영화도 마찬가지고, 모든 예술이 그렇다. 한 작품을 통해 우리의 세상은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작가의 의무인 동시에 독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백수린의 글은 훌륭하다.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 나와 타인,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을 입체적으로 보고 이해하게 된다. 그녀를 알게 되어 반갑고, 다른 작품이 궁금하고,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12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