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그 깊음을 생각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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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m/s은 소리의 속도로 0.34 km/s로 계산됩니다. 빛의 소리보다는 빠르지 않지만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인 셈이지요. 지난 일 년이 저에게 이러했던 것 같습니다. 멈추어 서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하나의 소리만 들렸고 그 소리를 따라 그 소리의 속도만큼 잰걸음으로 달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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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야 할 만큼 조심조심 멈추어 생각하며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모든 생각이 멈추어 버릴 만큼 정신없이 달려가야 할 때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때가 또한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풍에 휘몰아치듯 휩쓸려 갈 때가 있고 열심을 내어 달려가고자 하지만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자신을 삼켜버려서 하루하루를 앉은뱅이로 지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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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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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나간 그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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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음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그분의 존재는 찬양받기도 하지만 곧잘 무시되기도 해왔으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은 그 어려움을 바라보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분 외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죠. 그런 까닭에 섣부른 신앙적 권면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충고는 고통 속에 있는 자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줄 수 있습니다. 마치 욥의 세 친구들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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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는 복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승자가 패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요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복기는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고통입니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의 환희를 애써 감추고 생각에 집중해야 하며 패자는 패배의 쓴잔을 곱씹기 때문입니다. 승리자가 승리에 취해 피곤으로 복기를 해 주지 않으면 패자는 그 패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또한 패자는 그때 여기에 돌을 두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들지라도 그것들을 고스란히 가슴에 받아 새겨야 할 아픔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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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가운데도 많은 승리와 실패가 있습니다. 그 실패의 현장에서 스스로 우뚝 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대부분 그 실패로 인해서 영원히 아니 아주 오랫동안 서는 법을 잃어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승자의 편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승리와 모든 것의 최고봉이었던 예수는 오히려 스스로 낮아져 가장 연약한 자들, 실패한 자들에게 내민 손이 되어, 그들에게 일어서는 법을, 자신의 어깨를 내밀어 내어 줌으로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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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둑판의 승자의 배려가 아쉬운 세대를 살아갑니다. 스스로 나 자신은 내민 손, 빌려준 어깨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나는 한 발 디딜 수 없는 앉은뱅이로 있음을 봅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지지가 있음에도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볼 때에 무엇이 문제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건강을 잃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없고, 생때같은 자식들과 모든 삶의 무게는 그 지지와 격려가 무색할 만큼 큰 돌덩이로 내려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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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살아갈 시간에 비하면 고통은 짧은 것임을 압니다. 그렇기에 잠시 자신을 보듬어 주려고 합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것들을 멈추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그분과 둘이서 생각하고 마음을 나누는 기도의 깊은 샘에 가야지요. 연약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고 연약한 모습으로 저를 세우시고 작은 꿈을 주시는 그분, 그분이 이루어 가시는 방법은 저로서는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기에 그분에게 여쭤보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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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습니다. 이내 차가운 바람에 마음마저 얼어버려 다른 사람까지도 차갑게 대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붉음을 다시금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