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 강보리.
그날은 별 하나 없는 빈 하늘에 속 빈 달이 휑하니 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달빛만은 처연하니 밝았다. 낯선 길은 익숙한 것들마저 생경함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린 길을 잃었다. 어디에서부터 헤매게 되었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다. 산이 깊어갈수록 달의 빈속을 내가 채워가듯 휑한 달은 내 눈앞에 가까이 와닿았다. 눈부신 허망함. 남겨진 것은 껍질뿐이다. 새롭게 채우지도 못할 다문 껍질이다. 애써 채우려 껍질을 열면 부서지고 만다. 다 부질없다. 껍질 속 세상은 그리움의 파도가 일고 붙잡지 못할 애틋함이 바람소리를 낸다.
‘후드득, 후드득.’
눈을 떴다. 굵은 빗소리가 우박 소리처럼 크다. 그럼에도 내리는 비는 집 앞 가로등 불빛에만 보일 뿐 모든 존재를 어둠에 숨기고 있다. 서럽도록 밝은 달을 보며 달리던 산길은 역시 꿈이었나 보다. 뒤척이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일어나 시계를 본다. 서두르면 새벽기도시간에 늦지 않을 듯하다. 바짓가랑이는 물론 왼쪽으로 빗겨 내리는 비에 왼쪽 어깨와 허벅다리는 다 젖어버렸다. 다소곳이 뒷자리에 앉는 순간 아래로부터 습한 공기가 코로 훅 밀려온다. 비어 젖은 옷이 몸에 감긴다. 신앙이 깊은 것도 아니건만 괜한 열심으로 빗길을 뚫고 온 자신이 원망스러워진다. 강단에서는 몇 만 번이고 우려먹었을 자신의 소싯적 이야기를 가래 끓는 소리로 뱉어내는 늙은 목사가 있다.
‘아 맞다. 저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안 나왔던 것이지 '
한동안 열심히 새벽기도를 했던 적이 있다. 작정기도나 특별 새벽기도가 아닌 순수한 마음의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새벽마다 굶주린 듯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자화자찬 풀어내는 목사 앞에 번번이 순수함이 좌절되었다. 그 뒤로 새벽기도를 향한 열정은 다시 생기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주일까지 교회에 가지 않은 날들이 늘어났다. 이게 다 꿈 때문이다. 괜한 일을 한 거다. 지루한 새벽 설교가 겨우 끝날 무렵 늙은 목사는 애써 슬픈 목소리로 광고한다.
강보리 집사. 43세 심장마비로 소천.
강보리 집사. 그녀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그녀의 아들 상담으로 만나게 되었다. 교회에서 폭행사건이 있었고, 아들은 그 사건으로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게 되었다. 이런 부류의 상담은 가족상담으로 이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라 가족상담을 권했다. 아이의 아빠는 직장 때문에 다른 지방에 있어 엄마와 아이의 상담만 이루어졌다. 그녀가 나와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과 그 폭행사건이 우리 교회에서의 문제였다는 것은 제법 상담이 진행된 뒤 알게 되었다. 물론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것도, 사람들과의 교제도 부담스러워 언제나 축도가 시작되면 슬그머니 빠져나와버리는 까닭인 것도 있지만, 강보리 역시 교회에서 활동을 하는 성도는 아닌 탓에 우리는 그 많은 시간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했지만 얼굴이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6개월에 걸친 상담이 끝나고 교회에서 두어 번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있었지만, 우리는 웃으며 가볍게 목례를 나누었고 자연스레 서로를 잊어버렸다.
3개월 전 그녀가 다시 내담자로 나를 찾은 것은 참 의외의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말 많은 곳이 교회라 하지 않는가? 아무리 데면데면한 사이라 할지라도 같은 교회인 것은 안 이상 불편할 것이 당연한 것인데 어떻게 다시금 나를 찾아왔을까? 다시 만난 그녀는 3년 전 아이의 엄마로 앞에 선 것이 아니라 강보리. 43살의 한 여자로 내방을 했다. 석연찮은 마음을 그녀는 나의 표정에서 읽어버린 것일까?
“한 교회에 다니니 오히려 편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해서요.
아시는 만큼 기도해 주실 거라는 생각도 있고....”
‘아, 이럴 때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 네 기도해드릴게요.”라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귀찮은 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삼켜버린다.
그녀의 이름 강보리는 엄마가 지어주셨단다. 그 엄마는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교회에서 사랑 많고, 기도 열심히 하는 모 권사다. 언뜻 강보리와 접촉점을 찾는 나를 본다. 모 권사는 교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분으로 교회의 모든 행사에 얼굴을 나타내는 듯했고, 제법 교회에서 소리를 내시는 분으로 유명하다. 담임목사의 최측근이라 신망이 두텁고, 교회 주방 열쇠를 쥐고 있는 권사회 회장이라 하지 않는가. 애써 찾으려 한 접촉점은 어렴풋이 떠오른 모 권사의 얼굴마저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땅이 꽁꽁 언 밭이랑을 발로 밟는다. 추울수록 좋다. 아주 모질게 질겅질겅 밟아야 한다. 추울수록, 꼭꼭 밟을수록, 그해 보리농사가 잘 된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내라고 그녀의 이름을 “보리”라고 지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보리”라는 이름이 영 마뜩잖다. 자신이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닌 “보리”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그거 알아요? 모 권사님은 친엄마가 아니에요. 누군가가 교회 앞에 저를 버리고 갔데요. 그때는 모두가 먹고살기에 힘들었던 때라 아무리 교회라도, 아무리 목사님이라도 저를 선뜻 키우겠다는 말을 못 하고 있었데요.근데 말이에요. 아들 넷에 살림도 넉넉잖은 우리 모 권사님이 사랑이 많아서, 기도 열심히 하시는 본이 되시는 분이라 절 키우겠다고 하셨어요.모든 교회 분들은 역시 모 권사님 하며 칭송이 자자했다고 해요. 하지만 선생님. 그 사랑 많은 것이 저에게는 참 안된 일이었어요.”
말 수가 적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던 것일까?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성격도 아니건만 강보리의 입술에 집중하는 나는 이상하니 그녀를 내담자로만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녀의 감춰지지 않는 불안, 어둠이 나를 숨 막히게 한다. 불안과 어둠은 대부분의 내담자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분위기다. 하지만 무엇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 미묘하게 변하는 그녀의 눈과 입꼬리에 온통 신경이 쏠린다. 무심히 던지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훈련되고도 세련된 표정. 마치 나를 시험하려는 듯한, 귓가에 들리는 심박동이 그녀의 것이 아닌 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도 얼마의 시간이 안 걸렸다. 초진일 경우 이런 기싸움은 흔한 것이다. 내담자의 말들을 받아 적으며 형식적으로 답을 한다. 간간히 눈 맞춤을 하면서 공감과 무심의 경계 사이를 그네 탄다. 하지만 강보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작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다란 눈이 나를 빨아들여 시선을 거두지 못하게 했다.
오르막길을 오른 그 끝 지점 빨아들일 듯 눈앞에 서 있는 달을 보았다.
올해 4번째로 뜬 마지막 슈퍼 문이라 그랬던가?
태양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았다면 나의 온몸은 녹아 버렸을 거다.
차가운 달. 오히려 꽉 차 있어 속이 비어 버린 듯 나를 빨아들이는 달.
서둘러 그녀에게 자율신경계 검사와 우울도 검사를 해보자고 말은 건네며 수면시간과 패턴, 식사와 기본 생활을 물어보고 결과 후 다시금 뵙자고 부저를 울려 간호사의 안내를 받도록 지시했다.
.
8월의 더운 열기에 습기까지 더해서 장례식장 특유의 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덩치 차이가 확연히 나는 두 아들이 상복을 입고 손님을 맞고 있다. 이른 아침에 내려왔다는 강보리의 남편은 어디 있는 것일까? 헌화하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상주를 향해 인사하려 하니 윗도리도 걸치지 않은 남자가 인사를 한다. 이 사람이 강보리의 남 편? 아무리 교회의 장례식은 천국 환송식이라 잔치와 같다고 하지만 이래도 되는 것인가?
턱 선이 강하다. 검붉게 드러난 팔뚝에 힘줄이 도드라져 보인다. 거친 일을 하는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빨갛게 충혈되었지만 그 눈은 피곤이 아닌 광기를 드러내고 있을 뿐, 43살의 안타까운 죽음도, 젊어 상처한 남편의 비참도 그의 표정에서는 찾아볼 길 없다. 강보리는 3개월 전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내어 놓았다. 볕이 들지 않는 일층인 데다 지은 지 오래된 집인 까닭에 팔리지 않을까 동동거렸다. 그럼에도 이제는 함께 살 거라는 단단한 기대를 진료 때마다 비추었다.
큰 아들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아 선생님?”하고 인사를 한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하는데 자꾸만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문신에 신경이 쏠린다. 제법 착실해졌다고 들었다. 학교도 잘 다니고 엄마를 위해 아르바이도 겸한다했건만 문신? 타투? 요새 아이들이란...
아들의 안내로 자리에 앉았다. 간간히 눈에 익은 얼굴이 보인다. 교회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하다. 그럼에도 강보리의 엄마 모권사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앞세운 자식 장례에 부모는 참석하지 않는 것인가? 문득 경조사에 대해 이 나이가 되도록 상식이 부족하다는 깨달음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주변을 둘러보던 눈을 거두고 묵묵히 소고깃국에 밥 한술을 말았다. 전라도 장례식장에서는 빠지지 않는 홍어. 테이블마다 홍어를 향한 젓가락질이 바쁘다. 상상만으로 비강을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암모니아 향에 속이 울렁거린다.
“지영 선생님, 지영 선생님이 접수받았어요? 구급차 타고 왔고? 누가 접수했데?”
“사인은? 사인은 심장마비가 맞아?”
한눈에도 어려 보이는 지영 선생님에게 질문을 쏟아붓는 사람은 중고등부 담당 전도사였다. 그 전도사는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일까? 전도사는 맞은편에 앉은 일단의 젊은 여신도들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성마른 여자 하나가 입을 연다.
“자살 아니에요? 우울증 있었다던데.”
“이번 주일날 왔었잖아. 심장병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나도 그래서 지영 선생님께 물어본 건데 산소호흡기 하고 들어왔데요. 병원 도착하고 한 15분 후에 소천하셨다하시네요. 원무과 규칙상 차트를 확인할 수 없다네. 일단 심장마비라니 다른 말들은 삼가도록 합시다.”
강보리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3개월 전 시작된 그녀의 상담은 DNRI처방으로 한 달을 매주 만났다. 그 후 그러니까 지난달에는 남편이 있는 경기도를 다녀온다고 처방만 받고 상담은 없었다. 그뒤 그러니까 그녀가 죽기 2주 전 약이 듣지 않는다고 바꿔 달라고 했다. 남편과 불화한 것일까? 한 달 사이 그녀의 얼굴은 거의 두 배가 될 만큼 부어 있었고 체중도 늘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녀의 불안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무서우리만큼 빛났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은 나를 보는 듯 나를 보는 것이 아닌, 그 너머를 보는듯했다. 그녀 특유의 나를 시험하는 듯 무심히 던지던 말들도 속으로 삭히는 웅얼거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선생님. 우리 정진이 폭행사건 기억하시지요? 성탄 연습이 한참이었던 때였어요.”
그날은 보름인데도 내리는 비에 한 점 달빛을 찾아볼 길 없었다. 버스주차장 앞으로 경찰차가 서 있다.
“장난친 건데 얘가 전화한 거예요.”
“같이 성탄 연습하다가 놀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갑자기 자기 혼자 화를 내면서 그러잖아요.”
경찰 앞에 아이들은 변명을 쏟아부었고, 신고자 정진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경찰은 선생님이나 목사님은 안 계시냐 물었다. 아이들의 부름에 나온 부목사는 경찰을 향해 인사를 했다. 몇 마디 말에 상황은 의외로 간단히 정리가 됐다. 경찰차는 떠났고 부목사의 지시에 따라 일단의 아이들은 정진의 어깨를 한 대씩 툭툭 치며 교회로, 정진은 집으로 돌려보내 졌다. 정진은 주먹을 쥔다. 어둠이 내린 밖은 내리는 비로 온통 시야가 가려졌다. 정진은 온몸으로 내리는 비를 맞았다. 자신은 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맞은 것은 자신인데 야단은 왜 자기가 들어야 하는지 애써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익숙한 일 아닌가?
“선생님. 보통 그런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냐?라고 먼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목사님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묻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강보리는 자신이 업둥이라는 것을 안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설마설마 그런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내 이야기 일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느낌은 있었죠. 왜 엄마는 내게만 이러는 것일까? 어려서는 그냥 억울했고. 자라면서 교회랑 집에서의 엄마를 구분하기 시작했죠. 엄마만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저도 자연스럽게 엄마의 템포에 맞춰 모습을 바꿔야 했어요. 내가 나로 있는 시간이 있었을까요? 어느 사이 나는 어떤 모습이 나인지 알 수 없게 되었어요.”
그녀가 7살 무렵 외갓집 식구들이 왔었다고 한다. 어린 강보리는 기분이 그렇게 좋았다. 오빠들만 있던 집에 이종사촌 언니와 여동생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신났다. 한껏 들떠 문을 열고 이종사촌들을 앞세워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 모권사는 강보리의 뺨을 힘껏 때렸다.
“어디서 까부는 거야? 방에 들어가 있어. 네가 낄 자리 아냐.”
맞은 뺨이 아픈 것이 아니었다. 한두 살 터울의 이종사촌의 동그란 눈이 더 커져서 자신을 볼 때 그 낯 뜨거움. 마치 벌거벗은 몸을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에 서둘러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방으로 돌아가 강보리는 그제야 부어오른 뺨에 흐르는 눈물의 짠내와 따끔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이후였다. 자신은 어쩌면 이 집 식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을 하게 된 것이.
하루라도 빨리 독립이 하고 싶었던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고, 빠른 취업을 위해 전문대학을 선택했다. 대학시절 강의를 제외한 모든 시간 일을 했다.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면 할수록 돈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바치는 돈이 늘었다. 모권사는 아르바이트비에서 십일조를, 아르바이트비에서 선교비를, 아르바이트비에서 구제비를 매달 뜯어갔다. 정작 강보리 손에 들려지는 건 교통비가 전부일뿐 점심 밥값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강보리 이름으로 헌금은 올려졌다. 그럼에도 들려오는 소리는 모 권사 칭찬이었다.
“권사님은 자녀를 어떻게 그렇게 잘 키웠어요?”
“세상에 아르바이를 해서 십일조랑 선교헌금 거기다 구제비까지. 저런 믿음이 없네.”
“어머 집사님. 우리 보리는 아르바이트비 받으면 먼저 헌금부터 빼고 나머지는 자기 가 써요. 굳이 아르바이트 안 해도 되는데 용돈 정도는 자기가 번다고 그러네.”
도망가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이 집에서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힌 이곳에서 떠나고 싶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밟으면 밟을수록 더 강해지는 강보리가 아닌 애써 강해지지 않아도 되는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탈출할 방법이 없다. 맑고 투명한, 지문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유리로 도배된 모 권사의 유리 성에는 출구가 없다.
강보리가 남편을 만난 건 초대졸을 졸업한 이듬해였으니 23살 가을이다. 그는 물류창고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 창고를 드나드는 운송기사였다. 딱히 운송기사와 마주할 자리가 아니었으나 구내식당은 운송기사들에게도 열려 있었다. 그날은 무엇이 그렇게 바빴는지 강보리는 제법 늦은 점심을 먹었고, 구내식당은 한산했다. 배가 고팠던 강보리는 마른입에 밥을 욱여넣었지만 마음만큼 밥이 삼켜지지 않았다.
“탁”
“밥 처음 먹습니까? 국도 있던데 국이랑 먹든지. 물부터 마셔요.”
남편이 내려놓은 물컵은 커다란 손에 들려진 장난감 컵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그 넓은 현장 많은 운송기사 가운데서도 남편의 모습은 유독 큰 체구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했기에 그와의 결혼은 운명이라 생각했다. 모 권사를 떠날 수 있다는 현실은 눈앞에 다가온 기적이었다. 행복했을까? 얼마 동안은 강보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결혼 후 어느 보름이다.
대부분의 보름이 그러하듯 모든 전등을 꺼버려도 어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마치 보름달이 뜨면 울부짖는 늑대처럼 그는 강보리를 때렸고 까닭 없는 울음을 울었다. 어둠이 달빛에 반짝였다. 그녀는 어둠 속에 몸을 기울이며 또 다른 고립의 감각에 몰두했다. 그럼에도 묘한 쾌감에 전율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리저리 때리고 물건을 부수며 그의 존재를 드러내는 양감이 오히려 편안했다. 온몸에서 풍기는 강한 체취에 안도했다.
“그만”
올라간 손이 멈췄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그를 통제할 수 있다. 아니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의 것이 그라는 것을 안다. 또한 강보리만은 알고 있었다. 그의 손길의 따뜻함을, 늘 추위에 노출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동물적 감각이다.
웬일인지 그의 손찌검은 첫아이 임신과 더불어 멈추었다. 임신기간을 지나 수유기간까지 그는 강보리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마치 넋이 빠진 사람처럼 아니 강보리 존재를 망각한 듯 밥을 먹고 옆에서 자고 일어났지만 말 한마디 온전히 나눈 기억이 없다. 물론 말수가 많은 사람 아니었고, 본디 말이 어눌한 그였기에 강보리는 그에게 동요하지 않았다. 첫째 정진이 태어나고 그녀는 정진에게 집중했다. 그 무엇보다 온전히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작은 생명이 자신의 손에 있다는 기쁨과 그 누구에게도 아니 모 권사가 뺏을 수 없는 강보리의 것이 드디어 생겼다는 충족감에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정진은 또래보다 컸다.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 키만 닮은 것이 아니라 말이 어눌한 것도 산만한 것도 자기 아빠를 닮아 있었다. 특히 부를 때마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보는 이들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데 그 구석까지 꼭 닮았다. 유난히 몸집이 컸던 정진은 그 큰 몸을 가누지 못해 첫걸음이 늦었다. 하지만 첫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여기저기 사고를 일으키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래도 좋았다. 내 것,
어느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고, 앗아갈 수 없는 것, 아니 나를 전부로 생각하고 의지하는, 내가 아니고서는 어쩔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정진이 어린이 집을 가기 시작한 5살부터 정진의 장난과 사고는 집안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이 집에서 감당하기 벅찬 아이. 아파트에서도 주의가 필요한 아이가 되어갈 때 강보리 남편은 정진을 때리기 시작했다.
“저놈의 눈깔 뽑아버려.”
처음에는 잘못에 대해 야단을 치나 보다 생각했지만 정진을 야단치는 남편의 얼굴에 서린 섬뜩한 살기는 5살 아이에게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정진을 때리고 난 뒤 남편은 강보리의 몸을 몇 번이고 탐했다. 커다란 덩치에 눌린 강보리의 팔과 몸은 피멍이 들었고, 땀에 섞인 남편의 눈물을 애써 모른척했다.
얕은 잠. 어두운 산길을 달리던 차가 언덕배기에 다다랐다.
갑자기 사위가 밝아졌다. 달빛만으로 이렇게 밝을 수 있는 것일까?
달빛에 드러난 나무는 앙상하기만 하다.
강보리는 마른 몸을 일으켜 옷을 입었다.
남편은 지방근무를 자원해서 떠났다. 더 이상 정진을 힘으로 이길 수 없는 때가 온 것이다. 정진의 몸이 자라 자신의 체격과 엇비슷해지고 자신의 힘과 겨눌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된 폭력은 정진의 칼부림으로 멈췄다. 남편이 떠나고 강보리에게 아이들이 있었지만 남편이 떠난 후 죽을 것 같은 외로움을 경험했다. 강보리는 자신의 이름을 저주했다. 밟혀야 하고 추워야 하는 자신의 삶이 이름 때문이라 했다. 남편의 손찌검이 폭우처럼 자신의 몸을 탐하는 것도 한기에 노출된 자신의 몸을 데우는 온기였다. 사람이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건 슬픔보다 더 슬픈 일이다. 이제는 강해져야 한다. 보리는 추울수록 밟힐수록 풍년을 맞으니 말이다.
“씨발. 그 새끼가 칼을 들 줄 몰랐어. 어떻게 그것마저 닮냐.”
처음에는 남편이라 생각지 못했다. 살면서 전화통화를 몇 번이나 했을까? 급하게 전할 일이 아닌 이상 그렇게 스물 해를 살아도 제대로 통화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
“술 드셨어요?”
“엄마가. 내가 5살 때 가출을 했어. 아버지는 그날 이후 나를 때렸어. 내가 엄마를 너무 고생시켜서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시발. 난 죽어라고 맞았다. 아버지를 죽일 생각으로 밥을 먹었고 아버지를 죽일 생각으로 나는 몸을 키웠지. 근데 말이야. 그 새끼 눈깔이 나를 닮았어. 그 새끼도 그럴 거 아냐. 나를 죽이고 싶겠지.”
그날 이후란다. 그날 이후 그러니까 3개월 전부터 강보리는 남편이 있는 곳을 오르내렸다. 남편의 두려움은 강보리의 마음에 이상하리만큼 강한 연대감을 형성했다. 많은 밤을 모 권사를 죽이는 계획으로 보냈던 자신을 남편을 통해 새삼 떠올린다. 정진이 남편을 향해 칼을 들었을 때 말리면서도 그 칼끝이 조금 더 나가주길 바랬던 섬뜩함은 정진에게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강보리가 꿈꾸던 완벽함.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완벽한 모의. 남편에게 드는 연민 또한 남편이 아닌 자신을 향한 연민이다.
한 달 전 강보리가 약을 바꿔달라며 내방했을 때 퇴락한 빛을 머금은 눈은 초점을 잃었고 횡설수설하는 말은 맥락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묘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신경을 건드렸다. 이미 나는 그때 강보리의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폭력에 강한 애정을 느끼는 강보리의 헛된 기대를 나는 조롱하고 있었다, 뒤틀린 사랑은 생채기를 남기고 결국은 사랑일 수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다. 다만 강보리에게 느끼는 은밀한 연대감을 지속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초기 진료에 쓰는 항우울제를 DNRI에서 SNRI로 바꾸면서 약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부작용은 없나요?”
“일단 항우울제들이 갖는 부작용들은 비슷해요. 하지만 여러 가지 검증을 통해 안정된 약품을 사용하고요,무엇이든 그렇지 않나요? 장기 복용이나 과다복용은 좋지 않아요.”
“선생님, DNRI와 SNRI 중에 어떤 것이 더 치명적인 가요?”
“치명적이라는 뜻,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둘 다 안정성이 확인된 제품들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DNRI보다 SNRI가 강도가 세다고 해야겠지요. SNRI복용 시 혈압상승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럴 일은 없으시겠지만 음주 후 복용은 안됩니다. 혈압상승에 의한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으니 혈압 변동이 있으시면 복용을 중지하시고 내방해주세요.”
순간 나의 착각이겠지만 초점을 잃고 방황하던 강보리의 눈빛이 부작용에 관하여 설명할 때만큼은 또렷하다 못해 날카롭게 베일 것만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내담자의 죽음이 인상적인 경우는 몇 번 있었다. 강보리의 죽음은 인상적인 경우라기보다는 산뜻한 느낌이 없는 묘한 기운들이 나를 감싸고돌았지만 모든 일상은 이전과 다름없이 돌아갔고 나는 강보리를 잊었다. 교회 역시 젊은 여 집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특별한 애도가 없는 듯해 보였다. 모 권사 역시 변함없는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교회에서 맡은 일들을 해 나가고 있었다. 강보리의 존재는 그랬다.
사람일이란 것이 참 이상하다. 엮이고 싶지 않은 일에는 끊임없이 엮이게 되는 역학의 법칙이 이 우주에는 작용되고 있는 것인지. 강보리의 죽음이 여느 내담자의 죽음에서보다 묘한 기운을 느낀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인지. 강보리 아들 정진의 방문은 전혀 뜻밖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동생이 처음 발견하고 너한테 전화했다던데 맞아?”
“....”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것일까? 시간을 견디는 것이 상담의 기본이지만 강보리도 그렇고 임정진 역시 사람의 기운을 앗아간다고나 해야 할까? 심리상담을 하는 것. 정신과 치료를 하는 것은 진료자에게 무한한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되는 일이다. 여러 부분에서 무심과 공감이라는 적정선을 유지해가면서 내담자를 객관화시키고, 일종의 사물화 시키는 일은 직업적인 일이다. 간혹 그 선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상담의 내용이 본인의 경험과 맞물린다든지 자신의 가족의 문제라든지 하면 이성의 선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강보리는 어떤 경우일까? 강보리의 경우는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전혀 없는 경우는 아니다. 내담자가 가진 강한 기운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우리가 무속인들을 대할 때의 표현할 수 없는 서늘함. 나의 치부를 들켜버리기라도 한 듯 느껴지는 선뜩함 그런 부류의 무엇인가가 반달진 눈에 서린 빛에서, 묘하니 올라간 입술선에서 느껴진다. 창밖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시내를 벗어난 하구언이었지만 이 노을이 있어 나는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병원 자리를 선택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죽은 거예요.”
“응?”
“내가 죽인 거라고요.”
“엄마에게 효도 못하고 속 썩인 거, 그것 때문 아니야. 정진아.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 안 해.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솔직히 말해줄 수 있을까?”
“선생님 그거 알아요? 엄마랑 외할머니랑 꼭 닮았다는 거.”
“어떤 점이 닮았을까?”
“아빠가 엄마에게 견디지 못하는 부분이 그 부분이었어요. 다른 듯 하지만 사실 두 사람은 똑같은 한 사람이에요. 모든 것을 아는 듯, 모든 것을 참아내는 듯, 혼자 견디는 듯한 삶. 보고 있으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구석. 자신들만의 성에 갇혀서 사람이 옆에서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질색하게 만드는 것. 아빠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같이 살기 싫어하는 것도 아빠가 저를 때리는 것도 다 엄마 탓이에요. 엄마가 얼마나 할머니를 증오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참을 수 없었어요.”
그날도 오늘처럼 노을이 붉게 물든 날이었다. 방안이 빨갛게 변했다. 정진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그날도 오. 늘. 처. 럼.
“아빠가 저렇게 된 것 엄마 탓이야. 엄마가 아빠를 얼마나 짐승 보듯이 보는지 모르지? 엄마가 아빠 모르게 아빠의 폰을 훔쳐보는 거 아빠가 모를 줄 알아? 아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거 이해하는 척하지 마. 엄마는 이해하는 척 용서하는 척할 뿐이지 사람을 미치게 해.”
“그만해 정진아. 엄마 힘들다.”
“그렇게 속삭이듯 말하지 마. 엄마는 왜 자꾸 자신을 숨겨? 왜 자꾸 착한 척 피해자인 척하는 거야?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 다 엄마 탓이야. 엄마가 얼마나 할머니를 닮아 있는지 모르지?”
“아냐. 아냐. 아니라고..”
온통 빨강이다.
사용할 리 없는 진료 차트도 빨갛다. 창틀에 나란히 놓인 소품들도 빨갛다. 온통 빨강이다. 정진의 눈물도 빨강. 정진의 상처도 빨강. 죽은 강보리도 빨강 리본으로 둘러 쌓여 있을까. 상처는 스스로 빛을 낸다. 그 빛은 아마도 빨간 선홍색 핏빛 이리라.
당신과 나. 우리도 그랬다. 붉은 달빛 속을 달렸다. 꽤 오랜 시간 말없이 달리는 차 안에서 당신은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거듭되는 경로 이탈음에 불안이 더해질 즈음이었다.
“사람이 다가갈 수 있는 틈을 줘야지. 당신은 사람을 자꾸만 달아나게 해.”
“그렇게 손에 꽉 쥐고 있으려 하지 말고 그냥 좀 두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사람을 다그치지?”
“당신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그 차근차근한 말투, 모든 것이 당신의 통제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나도 사람이거든.”
붉은빛에 어둠이 스며든다. 아니 어둠 속에 붉은빛이 드러난다. 꿈에서 보았던 달이던가? 나를 삼키려들던 속이 빈 달이 온통 붉음으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