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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ae Mar 21. 2018

홍콩의 구룡성채와 빈민주거

나는 홍콩에서 가장 재미없는 곳이 쇼핑몰이라고 생각한다. 홍콩은 19세기 영국의 주요무역항 중 하나였다가 2차대전을 거치며 잠시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가 중국본토의 내전을 피해 도망친 이민자들의 도시가 되었다가 지금은 중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다양한 역사를 가진 도시가 되었다. 도시화가 이르게 진행되었던 홍콩의 뒷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구시가지에 비해 할아버지뻘 되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으며, 중경삼림의 촬영지인 청킹맨션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노동자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1층에는 그들을 위한 다양한 식당들이 즐비해 있다. 일요일이면 도시의 작은 공터들에 몰려들어 인도 중간을 차지하고 휴식을 취하고 담소를 나누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출신의 가정부들은 주말 홍콩의 풍경을 이룬다. 이러한 다양한 역사문화적 배경을 가진 홍콩이라는 도시를 설명하기에 쇼핑몰은 사실 너무 단편적이고 화려하고 그래서 지루하다.

홍콩의 우산혁명 관련 이미지

그 중에도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준 공간은 구룡성채(Kowloon The Walled City)라는 곳이다. 여행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곳은 홍콩이라는 독특한 지리적 위치를 가진 도시에서 도시빈민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어떻게 형성했고 해체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Wong Tai Sin Public Housing Estate. Image © Wikimedia user WiNG licensed under CC BY-SA 3.0


구룡성채는 근대세계에서 가장 불합리한 사회문제 중 하나로 여겨지는 곳으로 약 20,000제곱미터 정도 되는 크기의 대지에 33,000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던 1970년대에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주거지였다. 세계의 다른 빈민주거지가 그러하듯 이유가 있어 이 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협소한 대지 위에 집을 무계획적으로 지었다. 이는 이 부지가 건축법의 규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계획적인 아파트 건축의 결과 건물간 간격이 전혀 없어 창문과 창문이 서로 맞닿아 있는, 습하고 어두운 미로와 같은 복도로 서로 연결된 어둡고 음침한 도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구룡성채가 한정된 대지 안에서 공간을 작게 작게 분할해 갔던 반면 나머지 홍콩 전체는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고, 깨끗하고 잘 정비된 도시와 쇼핑몰들을 건설했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모습의 공간이 한 도시 안에 공존하게 되었다.

어떻게 같은 도시 안에 홍콩의 건축법이 적용되지 않던 대지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는 카울룽 지역의 특별한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카울룽은 송왕조 시대(기원 후 900-1279)에 소금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18세기에 군사기지가 지어지면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중국이 영국에게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1842년 홍콩은 공식적으로 영국에 양도되었으나 카울룽 지역은 예외지역이 되었고, 영국은 이 지역 안에 중국인들이 정치적인 반대성향이 없는 이상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인정해 주었다. 중국은 카울룽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지만 본토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어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웠고, 영국정부는 불간섭 정책을 유지했다. 이렇게 두 정부의 법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도시빈민주거지는 성장했고 이런 배경에서 구룡성채가 탄생하게 되었다.

 

홍콩과 구룡성채


구룡성채 안 인구는 1950년에 17,000명이었고, 당시 이 곳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파산했거나, 도주 중이거나, 법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후 중국본토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해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구룡성채 안 건축물은 건축법규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구의 증가에 따라 번식했고, 범죄, 아편, 매춘 등이 성행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 곳은 저렴한 치과들과 당시 홍콩에서는 불법이던 개고기 매점, 그리고 완탕면, 스프링롤 식당에 이르기까지 구룡성채 안 사람들 뿐 아니라 홍콩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공간들이 더 많았다. 이러한 번식은 1984년 중국과 영국 정부가 구룡성채를 홍콩에서 없어져야 할 흉물스러운 존재로 규정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92년에 구룡성채가 철거되고 그 곳에는 기념공원이 들어섰으며 그 곳에 살던 거주자들은 보상금을 받고 퇴거했다.

 

구룡성채 안 삶의 모습을 사진으로 접해보면 불결하고, 위험하고, 열악해 보인다. 몇몇 외국인 사진작가들은 이 곳을 방문해서 사진을 찍어 사진집을 냈고, 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이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라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보게 했다. 또한 구룡성채는 건축법규의 부재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가진 슬럼의 한 예로 자주 소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 발견했던 맛있는 완탕면이나 스프링롤, 지역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구룡성채가 역사에서 사라진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를 살았던 많은 홍콩 사람들은 그 곳을 많은 맛집이 있고 영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특한 홍콩만의 문화를 가진 곳으로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것은 삼합회가 이 안에서는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면서 소방대를 운영하고, 쓰레기를 처리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구룡성채 안의 삶의 모습(City of Darkness/Ian Lambot, Greg Girard)


구룡성채 안에서는 나름의 규칙을 가진 사회가 형성되었고 상업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는 어떤 공간이 법이나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아주 훌륭하고 계획적으로 나아가지는 않더라도 그 곳이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당시 구룡성채를 떠났던 사람들은 구룡성채 안의 지역사회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정부가 보상금을 그 공간을 해체하는 데만 사용하고 지역사회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 곳을 떠난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구룡성채 안에서의 삶이 더 행복했다고 이야기 한다고 한다.

 

1991년의 구룡성채


구룡성채는 전세계적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관광명소도 아니고 홍콩 사람들이 잘 찾는 곳도 아니다. 이는 이 곳이 사람들이 거리끼는 장소가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일상적이고 익숙한 곳이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외부의 이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했을 것이다. 우리는 마치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듯이 삶의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를 보듯이 수십년 산 집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인도나 에티오피아의 슬럼을 바라보며 가지는 시선도 비슷하다. 그 안의 다양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들여다보기 보다는 현상만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판단하는 것이 나는 불편하다. 역사를 간직하고 그 역사를 기반으로 발전해 나가야 그 공간의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하고 보존하면서 성장할 수 있다. 슬럼이라고 불리우는 그들의 공간은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참고: https://www.archdaily.com/800698/heres-what-western-accounts-of-the-kowloon-walled-city-dont-tell-you?ad_source=myarchdaily&ad_medium=bookmark-show&ad_content=current-u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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