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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채 Oct 19. 2017

보통의 슬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아무렇지도 않은 보통의 날이었습니다. 늘 먹던 밥과 반찬처럼 평범하고 똑같은 하루. 온도 차이라곤 없는 평온한 저녁에 감사하며 거품 낸 수세미를 들고 막 설거지를 하려던 그때, 내 안에 갑자기 잉크 같은 슬픔이 뚝 떨어집니다. 

 불한당처럼 쳐들어온 감정이 갑자기 나를 뒤죽 박 죽으로 섞어버립니다. 마치 처음부터 나는 슬펐는데 내가 그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듯이 말입니다. 슬플 이유가 없는데 슬프다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집니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가 당혹스러워 내 안을 뒤적이며 그 근거를 찾아봅니다. 낮에 본 영화에 우울한 장면이 있었나? 신문의 사회란을 너무 많이 본 것은 아닐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부정적인 전조를 감지한 건 아닐까. 감정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 이 뜬금없는 슬픔에도 시작점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이제 드디어 불안이 가세합니다. 알고 보면 평온했던 오늘 하루는 모두 연기였고, 나의 진정한 본질은 슬픔이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 말입니다. 


 슬픔은 어딘지 허락받지 못한 감정처럼 느껴집니다. 슬픔은 기쁨이나 열망에 비해 부정적인 감정이며, 그래서 적극적으로 개선시켜야 할 기분이나 상태로 인식됩니다. 약해빠진 감상에 젖어 슬픔의 구덩이에 빠져있는 사람을 세상은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슬퍼하는 타인에게 가장 먼저 건네는 위로는 "너무 슬퍼하지 마 금방 괜찮아질 거야" 하는 식입니다. 마치 어서 괜찮아지라는 듯이요. 세상은 나에게 어서 그 슬픔에서 빠져나올 것을 종용합니다. 내가 슬픔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걱정하고, 건강하고 쾌활한 감정으로 어서 돌아오라고 요구합니다. 마치 그래서는 안된다는 듯이 말이죠. 


 어릴 때는 넘어져도 울지 말라는 말로, 커서는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말로 슬픔을 인내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아무렇지 않음을 잘 연기해낼수록 훌륭한 어른이고 사회화 과정을 잘 학습한 현대인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업무와 무관한 일로 모욕을 당해도 변함없이 웃는 낯으로 가해자에게 고개 숙여 존경을 표하는 것,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힘들어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인성의 증거가 됩니다. 무감각할수록 차가운 도시의 모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감각이 없는 인간이 정말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새까만 상실감과 마주치게 됩니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며 맛있는 것을 먹고 예쁜 사진도 찍었는데 이 불청객이 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너무나 당혹스럽습니다. 나는 덜컥 겁을 집어먹습니다. 내 삶이 매우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 나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슬픔에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생각이 나를 공격합니다. 그런 생각을 잊기 위해 우리는 일에 매달리고, 연애에 매달리고, 멋져 보이는 많은 것들을 소비하며 불안을 덮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짧고 강렬한 감정 소비의 끝에는 더 큰 적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고독한 슬픔이 대체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10분 전까지는 행복했는데, 왜 나는 끝까지 행복할 수 없는 것인지. 억울하고 분한 마음마저 듭니다. 나 빼고 다 행복한 세상에서 나만 축축한 슬픔에 절어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애써 다스려놨던 감정의 뻘들이 밑바닥부터 뒤집어져 거대한 흙탕물 파도를 일으키며 나를 집어삼킵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측은하게 또는 한심하게 여길 무수한 시선들을 견딜 자신이 없어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쓴 커피처럼 꿀꺽 집어삼킵니다. 그리고 SNS에 오늘 즐긴 맛있는 음식과 멋진 카페 사진을 공유합니다. 화사한 핑크 블루톤의 필터를 입혀서 말이죠.


 왜 슬퍼하면 안 되는 걸까요? 알고 보면 2017년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가벼운 우울감을 마치 상비약처럼 보관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아니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두가 행복해'보인다'는 것입니다. '모두들'의 마음속이 실제로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겉보기만으로 저들은 행복한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라고 판단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정말 행복한지 아닌지는 그들 자신도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반듯하게 자른 무처럼 양분할 수 있는 고체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행복하고, 저 사람은 불행하다 라고 가지런히 분류할 수 있을 만큼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의 천성입니다. 나는 아까 행복했는데, 지금은 불행하다. 그러니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라고 영구적이고 절대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은 마음의 속성을 모르고 하는 행동입니다. 

 마음은 원래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보는 각도와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제멋대로입니다. 내 생각대로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한 철학과 예술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굴절 렌즈 속으로 어떤 형상이 보이든지 간에 그것을 모두 만화경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기쁨과 슬픔 모두 감정의 한 갈래이며 나를 이루는 여러 가지 구성 요소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슬픔도 감정입니다.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갑자기 슬퍼진다고 해서 내 인생이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일을 마치고 정돈된 주방을 보면 다시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슬픔도 때가 되면 가고 지루함이나 즐거움 따위가 그 자리를 채우기 마련입니다.


 어떠한 상태에 있든 그 모든 것이 나입니다. 매일 먹는 밥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보통의 날에 슬픔이 찾아온다면 놀라거나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해결하려고 하지도 말고 없애버리려고 노력하지도 마세요. 슬픔과 친구가 되는 순간 마음속 전쟁은 중단되고 평온함이 찾아옵니다. 슬픔이 찾아오면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 

 무조건 기쁜 사람, 항상 웃고 항상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요. 약속도 없이 찾아온 슬픔을 앉혀놓고 왜 나를 괴롭히느냐고 추궁하는 것은 불안과 우울까지 불러들이는 역효과만 낼 뿐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개의 방 중에 가장 숨기 좋고 아늑한 곳을 골라 슬픔에게 내어주세요. 슬픔의 지위를 인정하고 이 또한 나라는 것을 받아들여 보세요. 가벼운 긴장을 풀어주는 작은 슬픔은 늘 마음속에 준비해둬야 할 감기약 같은 존재입니다. 

 슬플 땐 슬퍼하고, 처질 땐 처지는 대로 잠깐 쉬어간다고 해서 내 삶이 돌이킬 수 없는 불능에 빠져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방금 전까진 평온하고 행복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다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글 그림

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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