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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한설 Jan 08. 2023

작은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Crying In The Wilderness

저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을 참 좋아했었는데, 그 시절에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잠잠히 이 지점을 생각해 보면 쉬이 지나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우선 샌님처럼 보이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최강희 병"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톱스타이자 학원물, 로맨틱 코미디의 원톱 여배우였던, (그리고 제가 오랜기간 가장 좋아했던 여배우인) 최강희는 당시 "4차원"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최강희 님 특유의 "헤-"하는 멍한 표정과 말투를 따라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약도 없으며 치료법도 없다는 이 병을 사람들은 최강희 병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무언가 남들과는 다르고 싶고, 나는 조금은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극대화되는 시기인 청소년기와 20대 초반의 시기에 고작 책이나 끼고 사는 범생이, 샌님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Geek(괴짜)이고는 싶어도 Nerd(좀스러운 괴짜)이고 싶지는 않았던 마음이 저 또한 있었달까요. 우리는 도대체 왜 이렇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진하게 의식하고 사는걸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주장하기에는 저는 책을 너무 좋아해, 어디를 가든 꼭 책 한 권을 끼고 다녔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제 주위 사람들은 제가 책벌레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습관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없이 집을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매일 책을 읽습니다. 지금은 이 습관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저의 책벌레됨과 샌님됨을 스스로 인정한달까요.


고교 시절에도 글을 "꽤 쓴다"는 말을 가끔 들었고, 대학 때는 좀 더 자주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대학에 다녀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전공 필수 과목들을 제외하면 제가 좋아하는 수업을 직접, 마음껏 고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 시간표는 온통 문학, 사학, 철학으로 가득차 있었고, 제 소속은 경영대였지만 인문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문대 교수님들은 본인이 걸어가는 길에 대한 자부심이 큰 분들이었습니다. 교재 하나 없이 유인물 하나 없이, 강의실에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해당 강의 주제에 대해 한 두시간 씩 "이야기"하다가 나가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기말고사는 칠판에 딱 한 문제를 쓰셨고, 우리 학생들은 텅빈 백지에 그 한 문제에 대한 본인만의 답을 길게 써내려갔습니다. 한 장이든 두 장이든 상관 없었습니다. 쓰고 싶은 말을 쓰고 싶은 만큼 쓰는 그 시간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드라마 <허준>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었는데, 그 드라마에는 허준이 내의원 시험을 보러가서 가장 먼저 답안을 제출하고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허준은 장원을 차지합니다. 이 장면이 방영된 이후, 답안을 가장 먼저 제출하고 나가는 것을 "허준하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허준하는 것에 집착했었습니다. 답안을 가장 먼저 제출하고 나온 시험의 결과지를 가지러 교수실을 방문했을 때, 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교수님이 "제일 잘 쓴 학생이네"라고 하며 A+가 크게 적힌 답안지를 돌려주시던 장면이 아직 기억이 납니다. 별 것도 아닌데, 인생에서 그 때만큼 순수하게 기분이 좋았던 적도 드뭅니다. 정말 날아갈 듯 기분 좋은 칭찬이었습니다. 


졸업이 다가오면서 친구들이 한 두명씩 인턴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던 순수의 시기가 저물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해야 하는 것을 해야 하는 시기에 직면했습니다. 


제가 택한 인턴은 - 사실은 회사가 저를 택해준 것이지만 - 일간지의 인턴기자였습니다. 전공과도 관계 없는 그 일을 대체 왜 택했던 것일까요. 표면적인 이유는 세상이 작동하는 기제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글에 미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글로 먹고 사는 삶, 혹여라도 잘 풀린다면 인세만으로 먹고 사는 그 삶, 더 나아가 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삶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신문사의 인턴기자 경험은 저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스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무명 안에도 저보다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이 몇 명이나 있었습니다. 고작 스무명 안에 말입니다. 제가 가진 재능이란, 그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일천한 것이었던지요. 


그 후 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비즈니스맨이 되었습니다. 


그간 제 마음이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 인생 최대 분기점은 그 때였습니다. 


15년전 그 갈림길에서 - 회사에 취직해 비즈니스맨의 삶을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꽤나 멋진 15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멋진 일을 하는 충만함을 자주 맛보는 행운이 깃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 때 제가 취직이라는 걸 하지 않고 골방에 틀어박혀서 오롯이 나 자신과 글만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 제 마음과 세상, 그리고 세상 속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하루고 일주일이고 한 달을 그렇게 보냈더라면, 저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 길을 선택한 후, 십수년 동안 제가 쓴 글이라고는 비즈니스 보고서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 시간의 경험들도 글쓰기 실력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정말 많이 썼으니까요. 한 때 "보고서 자판기"라고 불렸던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 후 몇 번의 이직을 하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칼럼을 몇 번 쓴 적이 있고, 메이저 언론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언론사 지면에 게재된 적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 형편 없던 고료에도 불구하고 -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기분이 든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했습니다. 


"나는 글을 잘 쓰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여러 번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 거의 모든 영역이 그러하듯 잘 하는 사람은 정말 많습니다. 대단히 잘 하는 사람들도 부기지수입니다. 


저는 결국 두려웠던 것입니다. 제 재능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평가 받게 될, 그리고 그 평가는 가혹할 것이 거의 분명한 그 길로 들어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제 동생의 권유로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제 인생에서 제일 잘 한 선택 중 하나입니다. 저는 글을 쓰는 것이 이렇게나 즐겁다는 것을, 오랫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던 그 순수한 감각을 그야말로 새삼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마치 수영과도 같이 글쓰기 또한 꾸준히 쓰는 행위를 통해 호흡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쓸 때 저는 저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던 진짜 제 자신을,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이 직시하게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마음이 불편한 과정이지만, 거짓이 아닌 진실을 대면한다는 점에서 저에게 해방을 허락해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글쓰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저 자음과 모음의 조합일 뿐인, 흰 바탕에 쓰인 검은 색 선의 집합일 뿐인 그 글이, 사람의 마음 속에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삼, 제가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그동안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고 싶어하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억누르면서 저 자신을 얼마나 핍박해 왔는지도 깨닫습니다. 


저는 그래서 작은 이야기들을 계속 해 나가려고 합니다. 


글쓰기 기법이나 화려한 수사, 멋들어진 비유는 적을지라도 진실된 마음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좋은 글이라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언젠가는 그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 책도 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말 가능하다면, 등단을 하고 전업작가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확실하네요. 모두에게 항상 "나는 꿈이 없어"라고 말 하며 살아왔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제 꿈은 작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마 소설가였겠지요. 이제 오래된 미래를 향해 더 노력해 봐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건 해 봐야 알겠지요. 그렇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간 제 글들을 읽어오신 분들이 있다면, 마음 속으로 작은 응원을 해 주시기를.




*글쓰기에 관하여 제가 정말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간결하게 쓰라"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글을 간결하게 쓸 줄 모릅니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인데 간결하게 쓰라니요. 제한된 글자수 안에 제 생각 그리고 마음을 우겨넣는 것이 저는 너무나 힘듭니다.


저는 작은 이야기들을, 제 스타일대로, 아주 길게, 아주 오래 할까 합니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에세이 집 제목에서 빌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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