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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한설 Jan 03. 2023

Slice of Life #2 - 조언

Slice of Life

삶의 달콤씁쓸한 단면들


콜로세움, 로마, 이탈리아. Photo by 아버지



제가 성장하는 동안 제 부모님은 (적어도 제 기억에 따르면) 거의 한 번도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강권한 적이 없습니다. 그 흔한 공부하라는 말도 한 번 하신 적이 없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거나,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거나,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다거나,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매우 소소하기는 하지만 어릴 때부터 제 인생은 작은 의사결정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맞벌이로 바쁘셨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할지를 정하는 것은 하루의 가장 큰 의사결정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즐겨했던 놀이는 부루마불이었습니다. 하교 전에 그날 집으로 같이 갈 친구를 물색하고, 집에서 함께 부루마불을 하고는 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부루마불은 네 명이서 할 때 가장 재미있으니까, 저를 포함해 네 명을 채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게임의 게임판(보드)이 선명히 기억 납니다. 가장 비싼 도시는 게임판의 오른쪽에 있는 라인으로, 서울 100만원, 런던과 뉴욕은 35만원, 파리와 로마는 32만원, 도쿄는 30만원이었습니다. 제가 파악하기에 이 게임의 핵심은 가장 비싼 이 라인의 도시를 몇 개 확보하는지, 그리고 이 라인에 호텔과 빌딩을 복수로 지어 통행료를 높인 뒤, 상대의 주사위가 무엇이 나오든 절대 제 땅을 밟지 않고는 해당 라인을 못 지나가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장난감 종이 돈이 오고 가는 게임이었지만 우리는 사뭇 진지했습니다. 게임을 시작할 때 주어지는 제한된 돈을 어디에 얼마나 투자할지 끊임 없이 의사결정해야 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또한 매우 중요한 의사결정이었습니다. 당시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떡볶이를 팔았습니다(서서 먹어야 했습니다). 떡 두 개에 오뎅 하나, 그리고 자박한 국물이 100원이었습니다. 100원어치는 꼭 먹어야만 하는 것이 일종의 의식이었는데, 200원째는 참는 편이 좋았습니다. 역시 같은 문방구에서 진행되던 "뽑기" 게임이 있었는데 이 것은 한 판 100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것이 제 인생 최초의 사행성 게임이었네요. 이 게임은 높은 확률로, 꽝 바로 위의 상품에 당첨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시 최고 유행하던 음료수인 "석수"였습니다. 게임판의 가장 자리에 있는 뽑기를 뽑으면 특히 확률이 높았습니다(아무에게도 말 안 했던 듯 합니다). 떡볶이를 100원어치 더 먹는 것보다 그 100원을 뽑기에 투자하여 석수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즐겁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기대값"과 "기대효용"의 개념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케이드 게임장이 많았습니다. 네, 오락실이죠.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오락실을 가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왜 그러셔야만 했는지 이해는 잘 안 가네요. 그냥 게임일 뿐인데 말이죠. 어차피 돈은 몇 백원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게임을 할 지를 고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프로세스였습니다. 당시에는 시대를 풍미한 대전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2>가 득세하던 시기였지만, 저는 SNK의 <아랑전설>과 <용호의권>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게임 중 무엇을 해야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아랑전설의 테리 보가드가 최애 캐릭터이기는 했지만 용호의권의 로버트의 매력 또한 만만찮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저는 하나를 선택하려면 다른 선택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기회비용"을 배웠습니다. (저같이 고통스러워 하는 아이들이 많았는지, 추후 SNK는 아랑전설과 용호의권을 통합하고 오리지널 캐릭터들을 대거 도입한 꿈의 대전 게임 <킹 오브 파이터즈>를 내 놓습니다.)


중학교 때는 방과 후에 대부분 농구와 독서, 게임을 하면서 놀면서 시간을 보냈고, 고등학교 때는 밤 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이 있어 대부분 학업에 시간을 썼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도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는 비오는 날을 제외하면 거의 예외 없이 농구를 했습니다. 무엇을 하며 놀지, 어떤 공부를 할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책을 읽을지, 어느 과목에 시간을 얼마나 투입해야 할지 이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의사결정에 관여하지 않는 부모님의 훈육 방식 덕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립심이 길러졌던 것입니다. 대학 진학 때의 전공 결정 및 첫 회사 입사, 이후의 직업 선택도 모두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자립심과 독립적 의사결정의 미덕이 엄청나다고 믿습니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집과 독선이 제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첫 번째 부작용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인데 왜 저렇게 우유부단할까"하는 답답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두 번째로, 타인의 조언에 귀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앞서 길을 걸어간 선배들의 조언들도 대부분 "라떼는 말이야"로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서른 다섯이 지나면서, 몸 담은 직장에서도 어느덧 의사결정을 많이 내려야하는 포지션을 맡게 되었고, 싫든 좋든 후배들에게 코칭과 멘토링이라는 이름의 조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지난 시간 선배들이 해 주었던 조언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저를 위해, 제 입장에서 말씀해 주셨던 고마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 시절, 치기 넘쳤던 제가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여전히 저는 조언을 듣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묻지 않았는데 조언하려고 하는 사람"을 잘 참지 못합니다(언제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런 덕에 후배들에게도 최대한 불요불급한 일이 아니면 조언을 삼가려고 하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꼰대"로 비춰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해야 할 피드백과 질책, 조언을 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비겁한 행동임을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좋은 조언"은 무엇일까도 많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선배들과 친구들이 해 준 조언들 중 기억에 남는 최고의 조언들이 몇 개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 동생이 해 준, "형은 글을 써야해"입니다. 참으로 그 덕에 저는 글을 꾸준히 쓰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의 열망을 억누르고 있던 제가 아주 어려운 한 발걸음을 내딛게 해 준 조언이었습니다. 때로 조언은 어떤 어려운 일을 시작하게 하는 기폭제(initiator)가 되어줍니다.


두 번째는 - 매우 뼈 아픈 지적이었는데 - 제가 제 주위에 매력적인 사람이 새로 나타나면 그 친구에게 깊이 빠져들어 옛 친구들에게 소홀해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친구에게 고등학교 때 들었던 이야기로, 아마 이 말을 한 친구는 기억을 못 할 것 같습니다. 뼈를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저를 오래 지켜본 친구가 해 준 이 말은 참으로 진실이었고, 이후 바뀌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세 번째는 누구를 미워하더라도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결코 그 사람의 험담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말은 화살이 되어 본인에게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실천하기 어려운 조언이지만 이 또한 참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네,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면 안 됩니다.


위 조언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저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사람이 해 준 조언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저를 좋아하는 만큼 그들도 일정 수준의 용기를 내어 해 준 조언이라는 점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아무렇게나 내뱉는, 그냥 자기 잘난 맛에 하는 싸구려 조언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의 아집과 독선이라는 옹벽을 무너뜨리고 제 가슴에 그 말들이 와 닿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어제부터 박준 시인의 신간 산문집 <계절 산문>을 구입해 읽기 시작했습니다(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 책에 실린 조언에 대한 시인의 산문을 읽고 큰 울림이 있었기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

박준, <조언의 결>


작은 잡지사에서 처음 책 만드는 일을 배울 때였습니다. 저는 주로 서울 충무로에 있었습니다. 모세혈관같이 구석구석 뻗은 충무로의 작은 골목들에는 출력소와 인쇄소와 제본소들이 줄지어 있었고요. 그곳에서 제가 했던 일은 인쇄되어 나오는 잉크의 채도가 적절한지 혹은 책의 32페이지 다음에 33페이지가 바르게 제본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를 번갈아 맡으며 하루종일 뛰어다니면서도 저는 스스로를 무용하게만 여겼습니다. 매번 작업 과정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기에 제가 할 일이 크게 없었던 것입니다.


종이에 인쇄되어 나오는 색은 처음 설정된 색과 다르지 않았고 32페이지 다음에는 33페이지가 그리고 장을 넘기면 34페이지가 사이좋게 놓였습니다. 책의 제작 과정에 사고가 생기지 않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쓸모를 발견할 수 없는 일과가 더없이 지루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조금이나마 유용한 존재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바로 일을 마치고 저녁밥을 먹는 시간, 혹은 저녁밥을 핑계 삼아 반주로 술을 마시는 때였습니다.


함께 일하던 선배는 충무로 골목 곳곳에 숨은 식당들로 저를 데리고 가주었습니다. 유난히 노포가 많았고 또 어느 집은 간판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무엇을 파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술잔이 한 순배 돌 듯, 충무로 인근의 식당들을 한 번씩 모두 가보았을 무렵, 저는 머릿속으로 좋았던 식당들의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선배에게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다 하고 제안을 하기도 했고요.


그 선배는 제게 술도 잘 사주었지만 조언도 잘해주었습니다. 조언 기술자나 조언의 달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조언이라는 것은 대부분 상대가 나를 위해 해주는 도움의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끝이 조금 까끌하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선배의 조언은 결이 달랐습니다. 반발심이나 동요가 일어나는 법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선배의 조언 비법은 간단했습니다. 최대한 짧고 명확하게 하며 조언에 대한 상대의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간단한 원칙은 선배의 조언을 잔소리나 추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오전에 인쇄한 책, 사진 설명이 바뀌어 있어서 내가 수정했어. 캡션 부분도 본문처럼 신경을 써야 해."라고 말하거나, "오늘 표지 종이는, 나도 몰랐는데 다른 종이보다 잉크가 더 잘 먹어서 색이 진해지더라고" 같은 말이었습니다. 지적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그러고는 으레 웃으며 다른 대화로 화제를 돌렸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오늘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다 선배 덕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언을 새겨두었다가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은 저의 몫이었고요. 그렇게 선배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일을 배웠습니다.


살아오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종종 들었습니다. 내마음 안쪽으로 돌처럼 마구 굴러오던 말들, 저는 이 돌에 자주 발이 걸렸습니다. 넘어지는 날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상대가 나를 걱정하고 생각해주는 사람인지, 그래서 해온 조언인지, 아니면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면박을 주기 위해 하는 말인지. 앞의 경우라면 상대의 말을 한번쯤 생각해보고 또 과한 표현이 있다면 솔직하게 서운함을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뒤의 경우라며 그 말은 너무 귀담아듣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자격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만 가질 수 있으니까요. 빛과 비와 바람만이 풀잎이나 꽃잎을 마르게 하거나 상처를 낼 수 있지요. 빛과 비와 바람만이 한 그루의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이니까.


그 선배와 제가 자주 찾던 한 노포가 기억납니다. 도가니찜을 주로 파는 곳이었습니다. 두꺼운 무쇠 냄비에 도가니와 국물이 자작하게 담겨 나오던. 그리고 냄비 아래에는 숯불이 있었습니다. 직화구이나 훈제도 아닌데 열원으로 숯을 쓴다는 것, 언뜻 생각하면 무용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저도 처음 그 광경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고요. 하지만 냄비 바닥을 저어 마지막 한 숟가락의 국물을 넘기며, 어쩌면 지금 당장은 무용해 보일 수 있어도 끝까지 무용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혹은 마지막으로 떠먹은 한 숟가락의 국물이 여전히 따뜻했던 것처럼. 뜨겁지 않은 세상의 모든 말처럼.


*


박준 시인이 언급한 충무로 도가니탕 집은 <황소집>으로 강하게 추정됩니다. 머지 않은 시간에 저에게 조언을 해 주어도 좋고, 제가 조언을 해 주어도 좋을만한 뜨겁지 않은 따뜻한 사람들과 이곳에서 뜨끈한 도가니탕에 몸을 녹이며 술잔을 기울여야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weekend01/22029666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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