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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준원 Aug 20. 2019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거래하는 방법

상행위는 어째서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가?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갖게 할 방법은 없나요?
없어요(단호)


방송에 나온 어느 외식전문가의 대답이다. 여기서 “주인의식’이란 말이 전달하는 통상적인 개념은 고용된 직원이 스스로는 주인이 아니지만 주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고용한 회사의 번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자세로 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고용된 직원이 회사의 번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 가면서 일한다는 것은 어째서 불가능한 것일까?


직원이 주인의식이 있다면 업무에서 발생되는 크고, 작고, 깨끗하고, 더럽고, 가볍고, 무겁고 한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자기 책임인 것처럼 해낼 것이다. 마감시간에 손님이 들어와도 웬만하면 손님을 돌려보내지 않고 물건을 판매하여 보낼 것이다. 여기까지는 정말 좋을 것이다. 주인이라면 대체로 그렇게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주인의식이 있는 직원은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므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주인과 같은 책임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직원은 고객의 입장에서 고용주에게 부정직한 상품에 대해 고용인인 상인에게 개선을 요구할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고용주인 상인의 몫이 된다. 그 직원과 계속 함께 갈 것인지 거기서 헤어질 것인지 말이다.  


사실 주인의식을 가진 직원을 기대하는 고용주는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부정직한 상인에게 주인의식이 있는 직원이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 때문이다. 부정직한 상인은 주인의식을 가진 직원의 의견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을 것이다. 부정직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부끄러움을 이길 수 없는 직원은 결국 자신이 가진 주인의식에 어울리는 정직한 고용주를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남아 있는 직원은 항상 주인의식이 없는 직원뿐이고, 정직한 상인을 만나지 못한 주인의식이 있는 직원은 실업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연쇄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단호하게 주인의식을 가진 직원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대화는 마치 고용주인 상인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듯한 문맥을 발생시키고 있는데, 질문에 다른 개념을 치환 대입시켜 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정직한 상인이 있을 가능성은 없나요?
없어요(단호) 


방송에 등장한 원래의 문답만큼 사람들이 빠르게 수긍하리라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가? 우리는 상인들에 대해 그러한 선이해 pre-understanding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듯도 하다. 게다가 직원의 불성실함에 대한 단호한 확신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선명하다. 아이러니하게 선명한 것은 너무 선명하여 보이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특별히 주목하기보다는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말할 때처럼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상인은 자신이 판매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최종적 주인은 아니다. 법률상 판매가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들에 대한 소유권은 판매자에게 있을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나중에 그 물건 혹은 서비스를 구매할 고객이 실질적인 주인이며 상인은 장차 판매할 상품에 대한 권리를 미래의 주인으로부터 위탁받은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상인이 준비해 둔 상품들은 자신이 사용할 예정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직원이 아닌 상인도 주인의식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알고는 못 사 먹는다”는 거리의 음식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이야기는 어찌나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지. 경험상 이 말이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대개 그 집에서 일했던 직원의 입을 통해서이다. 바로 그 주인의식이 없다는 직원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상품의 최종적 소유자인 구매자의 입장에서 볼 때 상인은 상품의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으로 보일까? 심지어 단골손님의 입장에서 볼 때도 상인의 주인의식은 항상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이지 것은 아닐까? 같은 집에 반복적으로 방문해보면 안다. 식당의 주인이 다시 구매하러 온 손님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잡아놓은 물고기” 정도로 생각한다는 기분을 느낀 것이 무릇 기하인지. 그 외식전문가에게 물어도 답은 마찬가지로 다만 마음속으로 단호할 것 같다. 외식전문가들도 그 손님은 어차피 또 올 거니까 새로 온 손님에게 우선적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할 것 같다.


실제로 “거래”라는 행위는 계약행위와 그 계약에 대한 이행이 이루어지는 약속과 이행의 과정이며, 거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격이라는 중개자가 자리하게 된다. 가격은 현실적으로 거래에서 재화와 교환하는 가치의 지표로서 매우 결정적인 부분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계약의 행위와 이행의 과정에서 가격은 거래 성립의 매개 행위 이상의 가치를 담을 능력을 가지지 않는다. 구매자가 기대하는 상품의 가치는 계량화하기 어려운 어떤 인격적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격이 그것을 온전히 반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격은 거래의 성립 자체를 결정하지만, 구매자의 기대와 상품의 가치는 가격과는 거리가 있는 다른 영역에 존재하게 된다는 말이다. 거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어떤 휴머니즘적 의식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의식이라는 추상적 가치가 근로계약에 어떻게 개입하는 지를 생각해보면 마찬가지의 결론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고용 면접의 과정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자기소개서라는 서류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보라. 대개 그러하듯이 잘 써진 자기소개서를 보면, 이것을 가격으로 판단한다면, 10배의 임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인재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력서에 붙어 있는 사진은 또 어떠한가? 한없이 단정한, 깎아 만든 듯한 수려한 용모를 보여주지 않던가? 90% 할인 판매이다. 대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않는 메커니즘을 심리적으로 가지고 있다. 지금 방송의 그 대화에 화제로 올려진 주인의식 없다는 직원이란 다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주인의식을 강조해가며 선발된 사람들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치적 판단으로 설득하고 규칙과 형벌로써 사회의 질서를 세우면 
시민들은 죗값을 피해 나가면서 부끄러움을 잃게 된다. 
최상의 가치로 설득하고 합당한 도리로써 사회의 질서를 세우면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최적의 상태이다.  


공자가 형벌로 사회를 경영하는 방법과 덕, 즉 최상의 가치로 사회를 경영하는 방법 사이에 차이가 벌어지는 득실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이 통찰력의 문장([논어] 2:2)을 응용해 보자. 이 문장에는 부끄러움이 인간을 가장 인간적이게 하는 요소, 즉 휴머니즘을 가진 인간의 내면에 발생하는 중요한 현상이라는 주장이 녹아들어 있다. 


정치적 판단을 마케팅으로, 규칙과 형벌을 가격으로 치환해 보라. 상인과 구매자는 거래에 분쟁이 생겼을 때 모두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상대가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한다고 하면서 부끄러움이란 찾아볼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 만들어 진다. 익숙하다. 구매자가 까다롭게 따지면 상인은 상품과 서비스에 세심하게 신경을 쓸 것이요, 대부분의 경우 실제로는 신경을 쓰는 척을 할 것이요, 고용인이 주인의식을 요구하면 직원은 주인의식이 있는 행동을 하려 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실제로는 주인의식이 있는 척을 할 것이다. 고용주인 상인이 이것을 두고 직원이 주인의식이 없는 것이라 한다면, 세심하게 신경 쓰는 척만 한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도 실질적으로는 정직하지 않다고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두 번째 문장에서 최상의 가치를 상품의 품질로, 합당한 도리를 휴머니즘적 영역으로 치환해 보라, 상인과 구매자는 각자 자신이 얻은 상품의 질과 그 사이에 개입한 가격이 과도하다고 다른 한 쪽은 너무 적다고 부끄러워하면서 진정으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거래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직한 상인이란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도리에 합당한 거래를 하려고 하는 상인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항상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미흡할까 봐 늘 걱정하기를 전전긍긍하고 늘 모자란 부분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매자는 자신이 지불하는 돈이 정작 많지 않음을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상인의 살림을 걱정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직원도 고용주가 자신에게 주는 임금을 고맙게 생각하며 고용주의 재무가 건전하게 돌아가는지 염려할 것이다. 


이런 일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물론 상인에 대한 선험적 이해에 십분 의거해 보면, 상행위에는 오로지 가격과 이윤이 있을 뿐, 휴머니즘의 영역은 개입하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골방이니 이런 일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인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직원도 분명 존재한다. 상인에 대한 선이해를 버린 사람만이, 그리고 그런 상인이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그런 상인을 만날 수 있다. 다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선이해를, 그 선입견을 버리고 거리에 나서는, 만약 잘못된 상대를 만나더라도 실연의 아픔을 견딜 각오가 되어 있는 용기 있는 구매자가 적을 뿐이다. 


도덕과 상업적 성공이 양립하는 데에는 원초적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경영학에서 이런 시도는 끊임없이 이루어졌지만, 설득력을 가져본 일은 없다. 도덕적 상인이 있다면 그는 확률적으로 이윤을 내지 못해 얼마 가지 않아 망하게 되니 모순이다. 경영이 지속가능하려면, 그 확률을 높이려면, 합당한 도리를 희생해야 하니 모순이다. 이 모순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구매자의 혁명적 자기개발이다.  


세상에는 명창은 없다고 한다. 오로지 귀명창이 있을 뿐이란다. 공자는 단 하루만 인을 체득하는 실천적 행위인 스스로를 극복하여 예의 자리에 돌아가 보면 온 세상이 인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그 이전에는 세상은 어차피 서로 물고 뜯는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천리마는 언제나 있지만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은 좀처럼 있지 않다. 이것이 우리에게 천리마가 없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명백한 죄인을 살리는 대신 자신들에게 피조물의 올바른 길을 가리킨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팔을 높이 들어 소리치지 않았는가? 우리가 가진 업보는 제대로 파악하려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정직한 상인은 없다”라는 선험적 이해에 자신의 존재를 전폭적으로 고착시키고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사고방식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은 상인들의 비도덕을 합리화시키고 재생산시키는 전염병이 된다. 언제까지 용기를 내지 못하고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고 천리마를 찾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면서 세상에 어차피 천리마는 없다는 단순한 선입견을 자신만이 가진 세상에 대한 위대한 통찰인 줄 알고 떠벌이며 우월감을 누릴 것인가? 

  

상품의 질은 언제나 동일하지 않다. 구매자의 기대치를 넘어가기도 하지만 미치지 못하기도 하고, 날마다 다르기도 해서 어떤 날은 넘어갔다가 어떤 날은 못 미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구매자의 기대 또한 동일하지 않다.  우선 사람마다 동일하지 않고, 동일한 상품을 동일한 사람에게 공급하였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기분 상태에 따라 기대에 넘치거나 미치지 않거나 하는 마음이 요동을 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기대를 넘어서는 품질을 경험한 이유 덕분에 다음에도 항상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경우에도 거래가 성립하기 위해 가격이 수시로 바뀌지는 않는다. 여기에 자리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그것이 이해든 오해든, 팔고자 하는 사람과 사고자 하는 사람이 가진 거래의 절박함이다. 


그러니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으로 거래해야 한다. 상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만드는 상품의 주인인 단골손님이 지불하는 돈을 귀하게 여기고 자신의 상품의 만족도를 언제나 걱정하며 부끄럽게 여기는 휴머니즘의 영역 발휘하면 완벽하다. 구매자의 입장에서도 막상 구입한 물건이 부족하여도 상대가 최선을 다한 것이라면 관용이란 휴머니즘의 영역을 발휘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인 상인과 불완전한 인간인 구매자가 서로의 불완전함을 쳐다보면서 거래하는 것이 휴머니즘적 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이다.

 

우리는 주인의식을 가진 직원이 없다고 하면서, 정작 주인의식을 가진 직원이 있을 때는 그의 근무방식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사람으로 치부하고 왕따 시키고, 혹은 과도한 업무를 요구하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우리는 고객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두고 최선을 다해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상인이 주인의식을 가진 진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돈을 벌려고 별짓을 다한다고 치부하면서, 그렇게 장사 잘하고 싶으면 더 많이 내놓으라고, 더 싸게 내놓으라고 갑질을 하다가 맘대로 되지 않으면 오히려 몹쓸 상인이라고 매도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나는 아주 저렴하면서 품질이 좋은 식사를 하면서 그 집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식사를 내온다고 칭찬하기보다는 다른 집들이 너무 많은 돈을 받는다고 불평하는 돈 많은 사람도 보았다.


공자는 활쏘기를 하되 과녁을 얼마나 맞혔는가를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과녁을 맞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공자는 이것이 능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활쏘기 시합을 할 때 실제로 경쟁하는 것은 과녁을 얼마나 많이 맞혔는가가 아니라 예의를 잘 갖추어 발사대에 올랐는가 자신이 졌을 때 벌칙을 달게 받았는가 하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과녁을 맞히는 것은 제각각이지만 도리를 다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치환식을 다시 한번 시도하면, 과녁을 상행위의 이윤으로 활쏘기의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을 상행위에 최고의 정직을 발휘하는 것으로 치환해보자. 과녁을 많이 맞혀야만 활쏘기에 나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상인이 만드는 물건의 품질은 소외당하게 된다. 좋은 상품을 만든다고 해서 반드시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상품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였는가, 그 상품을 구매자에게 건네는데 있어서 예의, 즉 합당한 도리를 다하였는가 되는 것이다. 


고용주는 가격을 지불하고 고용하게 되는데 가격이라는 규칙에는 주인의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고용이라는 인간관계에는 인간적 도리로서 반영되어 있다. 구매자는 가격을 지불하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데, 가격에는 상인의 정직이라는 가치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거래에는 도리가 내재되어 있다. 거래는 상행위이기 이전에 인간의 관계의 문제라서, 설령 이따금 거래에서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반드시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 가격은 거래의 주연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며, 수익은 상행위의 결정적 부분은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나 창과 방패처럼 거래를 자신의 이익으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누가 손해를 보고 거래가 성립하겠는가? 모든 거래는 가격의 측면에서 보면 제로섬 게임이 아니던가? 갑이 이익을 보았다면 을이 그만큼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라도 그대로 그러하다. 어쨌든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 손해를 보아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거래이다. 


정직한 상인은 맑은 공기, 깨끗한 물처럼 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해 준다. 우리들 중 아무도 자신이 필요한 모든 물건과 서비스를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인들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더없이 중요한 존재이다. 우리 주변에 정직한 상인은 없고 부정직한 상인만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무리 많은 가격을 지불할 돈을 가지고 있어도 나의 삶은 절대 풍요로울 수가 없고 건강할 수가 없다. 천리마는 천리마로 키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정직한 상인을 만나려면, 주인의식이 있는 직원을 만나려면 나부터 귀명창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가 백락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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