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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Mar 01. 2021

주치의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 - 1) 배경

헬스케어 디자이너가 미국에서 눈여겨본 일곱 가지

미국에서 2019년 가을 이후로 '주치의'가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미국에서 PCP(Primary Care Provider 또는 Primary Care Physician)로 표기되는 주치의는 일차 의료를 담당하는 가정의학과, 내과, 노인 의학 또는 소아과 의사로, 나의 전반적인 건강 문제를 담당하고 상담하며 가입한 건강보험의 네트워크 안에서 내 케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미국에서는 의사뿐만 아니라 Nurse Practioner(NP)와 Physician Assistant(PA 또는 PA-C(Physician Assistant-Certified)로 표기)가 PCP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화면. 미국에서 2017년 건강보험 가입 시즌에 맞춰 TV에 방영된 KP의 광고들 중 하나인 Roomies 편 중 Primary Care Provider(PCP)가 등장하는 장면. KP의 팀 기반의 케어를 보여주는 광고로, 여자 주인공이 냉장고에서 탄산음료 병을 꺼내는 순간 PCP가 물로 바꿔치기한다. (링크. Kaiser Permanente “Roomies” Ad: 60 second spot)

애틀랜타에서 시애틀 근교의 레드몬드로 이사하며 HMO 형태의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 Washington(KP WA)) 건강보험을 선택하자 주치의 선택이 필수가 되었다. 건강보험의 홈페이지에 로그인하거나 고객 센터에 연락하면 내가 주치의를 지정해야 함을 알려주었다. 임신 중이라 당장 필요했던 산부인과의 진료를 예약하는 일에 주치의의 역할은 필요하지 않았으나, 그 외 전문과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면 주치의를 거쳐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어느 날, 마음을 정하고 책상 앞에 앉아 KP의 홈페이지에 로그인해 내가 사는 동네의 KP 메디컬 센터에서 진료하는 내과와 가정의학과 의사들 중 한 명을 선택했다. 출산 후에는 아이를 위해 같은 KP 메디컬 센터에 근무하는 소아과 의사 한 명을 선택했다. 


사진. 주치의 선택 후 집으로 배달된 주치의에 대한 소개 편지

한국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입원 중 나를 담당했던 전공의인 '주치의'를 경험한 이후, 공식적으로 '주치의'를 가진 적이 없기에 '주치의'를 갖는 일은 기대가 되면서도 부담스러웠다. 혹시 좋은 의사를 '주치의'로 만나지 못할까 봐, 다른 과의 진료가 필요할 때마다 '주치의'의 상담과 의뢰를 거치는 과정이 불편할 것 같아서, 또 '주치의'라는 사람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거나 요구할까 봐 걱정됐다.


이제 '주치의'가 있는 삶에 있어 3년 차가 되었다. 연말마다 다음 해의 건강보험 상품을 갱신하거나 변경하는 자유가 있는 미국에서, 같은 보험을 한 해 더 이용하는 선택을 두 번 했다. 내가 선택한 '주치의'가 너무 훌륭해서라기 보다, '주치의'를 둘러싼 서비스가 매끄럽게 돌아가게 하는 잘 만들어진 시스템이 편하고 좋았다.


사실, 건강보험으로 주치의를 선택하는 일이 미국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미국 인구의 건강보험 보장에 대한 연간 추정을 제공하는 미국 건강 인터뷰 조사(National Health Interview Survey(NHIS))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에 미국인들 중 10.3%는 어떤 건강보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프. 2019년 미국에서 보험이 없는 사람들(Uninsured)의 연령 별 비율 (인터뷰 당시 보험 여부 기준) (출처. Health Insurance Coverage: Early Release of Estimates From the National Health Interview Survey, 2019))

또 건강보험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치의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민간 건강보험은 여러 형태들이 있는데, 가장 대중적으로 선택되는 보험 형태는 전문의를 만날 때 주치의의 의뢰가 필요 없는 PPO이다. PPO는 비용의 차이는 있지만 건강보험의 네트워크에 포함되지 않는(out-of-network) 시설이나 의사를 이용해도 건강보험의 커버를 받을 수 있다. 이와 달리, HMO와 POS는 주치의와의 상담을 통해 의뢰를 받은 후 다른 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도록 한다. 이중 HMO는 건강보험의 네트워크 안(in-network)에 속한 시설이나 의사를 이용하는 경우에만 건강보험의 커버를 받을 수 있는 반면, POS는 네트워크 밖(out-of-network)의 시설이나 의사를 이용해도 비용은 높아지지만 건강보험의 커버를 받을 수 있다. POS는 POP와 HMO의 중간 형태로 만들어진 건강보험이다.


선택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미국에서는 HMO의 제한적인 이용 방식에 대한 반발이 커져 지난 20년 간 가입자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참고. An American sickness: How healthcare became big business and how you can take it back). 2019년에 미국 전체 인구 중 55.4%의 사람들이 고용주가 지원하는 건강보험을 가졌는데, 이들 중 PPO, HMO, POS를 선택한 근로자들의 비율은 각각 44%, 19%, 7%였다. 2020년에 PPO, HMO, POS를 선택한 근로자들의 비율은 각각 47%, 13%, 8%였다. (참고. Health Insurance Coverage in the United States: 2019, KFF Employer Health Benefits 2019 Annual Survey, KFF Employer Health Benefits 2020 Annual Survey


단, 각 보험을 선택한 사람들의 비율을 가지고 어느 보험 형태가 가장 좋은 보험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미국에서 직장을 통해 건강보험에 가입하는 경우 직장에서 제공하는 건강보험 옵션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직장을 잃거나 옮기게 되면 다시 새로운 건강보험에 가입하게 된다. 미국에서 평균의 고객은 같은 보험에 6년 미만으로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 The Healing of America: A Global Quest for Better, Cheaper, and Fairer Health Care)


그래프. 직장을 통해 건강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의 2015년과 2020년의 건강보험 형태 선택 비교 (출처. KFF Employer Health Benefits 2020 Annual Survey)

가입할 수 있는 건강보험의 형태가 다양하고, 선택하는 건강보험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다르고 혜택도 다른 미국과 달리, 한국은 의료급여의 혜택을 받는 기초생활수급자 외의 전 국민이 국민건강보험의 커버를 받는다. 한국 내 모든 의료기관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통해 국민건강보험의 지정 의료기관이 되기 때문에 국민들이 어느 의료기관이든 이용할 수 있다. 


미국의 복잡한 건강보험이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만, 미국의 건강보험을 통해 한국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국민들이 의료기관, 전문과와 의사를 마음대로 선택해 이용하는 현재 한국의 방식은 미국의 PPO와 비슷하다. 한국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 국민 주치의제'는 미국의 HMO와 비슷하다. 


미국 사람들은 여러 보험 형태의 장단점을 비교해 가입 시점의 자신의 상황에 맞는 건강보험을 선택한다. 그리고 연말마다 다음 해의 건강보험을 새로 선택하거나 갱신하게 되고, 결혼, 취직, 퇴사 등의 일을 겪는 경우 연말이 아니어도 건강보험을 새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단 '전 국민 주치의제'라는 변화를 도입하면, 이전 방식으로 돌이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HMO 건강보험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와 반응을 통해 한국에서 실제 주치의제를 도입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예상해볼 수 있다. 또 미국의 HMO 중 주치의의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는 잘 만들어진 시스템과 그 안의 편의 기능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미국에서 주치의 선택을 필수로 하는 HMO가 가장 인기 있는 보험 형태는 아니지만, 훌륭한 서비스와 이용자들을 위한 탁월한 기능들로 인정을 받는 HMO들이 있다. 대표적인 곳들이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 KP), 인터마운틴 헬스케어(Intermountain Healthcare), 그리고 가이징어(Geisinger)다. 이들은 헬스케어 시설과 건강보험을 직접 운영하고 의사를 직접 고용해 회원들을 대상으로 통합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좋다고 해서 미국 안의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만이 이들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또 고용주를 통해 건강보험에 가입하는 경우, 고용주가 제공하는 건강보험 옵션에 이 보험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참고로, KP의 서비스 지역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살며 남편의 학교를 통해 건강보험에 가입했던 당시, 학교가 제공하는 건강보험 옵션에 KP가 포함되지 않아 가입할 수 없었다.


KP는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존재감이 크며, 그 외 워싱턴, 오레곤, 콜로라도, 메릴랜드, 버지니아, 조지아, 하와이와 워싱턴 D.C.에서 운영된다. 인터마운틴은 유타, 가이징어는 펜실베니아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가입자라 하더라도, 여행 등을 이유로 다른 주에 머무르고 있는 경우 응급실 외의 서비스 이용이 제한된다. 예를 들어, KP Washington을 이용하며 채팅으로 의료진의 상담을 받으려는 경우 상담 시작 시 매번 내가 현재 어느 주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데, 워싱턴주에 위치하지 않은 경우 온라인 채팅이라도 서비스 이용이 제한될 수 있다는 설명을 듣는다.  


그림. 대표적인 HMO들인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 KP), 인터마운틴 헬스케어(Intermountain Healthcare), 그리고 가이징어(Geisinger)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들 (참고. http://info.kaiserpermanente.org/healthplans/index.htmlhttps://intermountainhealthcare.org/annual-report-2019/about-intermountain/https://www.researchgate.net/figure/Geisinger-Health-System-Coverage-Area-Pennsylvania_fig1_333656986)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와 함께 한국에서 일차의료의 강화와 주치의제 도입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어 왔다. 아직까지 주치의제의 도입을 위한 명확한 계획은 없지만, 주치의 제도와 유사하게 동네 의원에서 만성질환자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차의료 만성질환 관리 시범사업이 2019년 1월부터 실시되고 있다. 2019년에는 대한가정의학회가 소비자 단체들과 함께 '주치의 심포지엄 및 선포식'을 개최해 가정의학과 전문의들이 환자와 가족 중심의 전인적 진료를 제공하고 지역사회 건강을 책임지는 주치의 역할을 맡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2020년 7월 '지역사회 일차의료 역량강화 방안과 디지털 헬스케어'를 주제로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는 원격의료와 IT 기술을 보조적으로 활용하면서 일차의료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들이 논의되었는데,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논의는 아직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2020년 11월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가 발표한 주치의제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는 전국 만 20세 이상 남녀 1000명 중 76.1%가 주치의제 도입에 긍정적이었고 11.3%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주치의제와 관련해 ‘용어는 들어봤지만, 내용은 모른다'는 응답이 67%였다. 주치의제의 역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대를 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국민들 사이에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입장에 따라 주치의제의 실행에 대해 염려하는 점들도 차이가 있다. 2018년에 한국의 일차의료연구회와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가 펴낸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에 따르면, 사람들은 주치의제 실행 시 병원이나 의사를 원하는 대로 찾아갈 수 없을까 봐, 좋은 의사를 주치의로 만나지 못할까 봐, 주치의에게 진료를 예약하고 기다려야 하고 또 대기 중에 증상이 악화될까 봐, 주치의의 휴가와 휴무일에 진료를 받기 어려울까 봐 주치의제에 대해 우려하고 불안해한다. 한편 의사들은 주치의로서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행정적 부담이 많아질까 봐, 전화 상담과 야간∙휴일의 근무시간 외 상담 요청으로 사생활에 지장이 생길까 봐, 환자가 타의원에서 진료받은 내용에 대해 주치의에게 제대로 공유하지 않을까 봐, 그리고 교육과 상담 등 추가되는 서비스를 위한 팀 구성과 수가 확보에 대해 걱정한다. 주치의제를 두고 사람들과 의사들이 염려하는 내용들은 서로에게 좋은 환자와 좋은 의사가 되는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수준의 이슈들로 보인다.


이미지.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가 2018년에 펴낸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KP를 이용하며 이전에 말로만 듣던 '주치의'를 선택하고 직접 만나고 연락하고 '주치의제'를 경험하며 알게 된 몇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주치의제는 실력 있는 주치의 한 명을 잘 만나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 주치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진 시스템과 팀이 있어야 한다는 것, 주치의제에서는 주치의를 쉽게 만나는 방법뿐 아니라 주치의를 바로 만날 수 없는 경우를 위한 대안도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좋은 주치의와 좋은 환자는 좋은 인성과 열정에 기댈 것이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주치의 서비스를 이용하며 감탄해온 것들에 대해 제공자가 아닌 이용자의 관점으로 소개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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